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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서대문구 미근동

  • 5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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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서대문구 미근동

단 2필지, 3,262㎡ —가장 작은 국유지가 품은 가장 큰 이야기

1912년 서대문구 미근동. 경성감옥이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꾸던 그해, 이 땅의 기록이 고스란히 남겨졌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혹시 미근동을 그냥 지나쳐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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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미근동, 당신이 몰랐던 그 땅의 이름

  • 1912년 국유지 2필지 —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기록

  • 대지 3,127㎡ — 관유 건물이 서 있던 자리

  • 밭 135㎡ — 가장 작은 땅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

  •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왜 이 기록이 출발점인가

  • 성공 사례 — 작은 땅에서 꺼낸 큰 역사

  • 지금 미근동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숫자가 작다고 해서 이야기마저 작은 건 아닙니다. 단 2필지, 3,262㎡. 하지만 그 안에는 1912년 경성(서울)이 숨겨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지금은 충정로역 인근의 조용한 주거·업무 지역이지만, 1912년 이 동네는 전혀 다른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해는 바로 경성감옥이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꾼 해였고, 서대문 일대 전체가 일제의 식민 통치 인프라가 빠르게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그 격동의 해에 기록된 미근동 국유지 2필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드리겠습니다.



1. 미근동, 당신이 몰랐던 그 땅의 이름

미근동(渼芹洞). 물가에 미나리가 자라는 마을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지금은 서대문구 충정로 인근에 있는 이 동네가,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작은 개울가 습지였고 미나리밭이 펼쳐져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이 땅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미근동은 오늘날 서대문구 충정로동 행정구역에 속하며,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와 인접한 도심 지역입니다. 사대문 안쪽과 사실상 경계가 맞닿아 있어, 조선시대 한양의 생활권과 직접 연결되던 동네였습니다. 그만큼 오랜 역사 지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미근동에는 1896년에 문을 연 미동초등학교가 있습니다. 한성공립소학교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교육기관 중 하나입니다. 학교 하나가 이 동네의 역사 깊이를 단박에 보여줍니다. 1912년 토지대장이 기록되던 그 시점에도, 이 동네에는 이미 근대 교육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2. 1912년 국유지 2필지 —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기록

1912년 기준, 서울시 서대문구 미근동의 국유지는 총 2필지, 3,262㎡입니다. 이를 처음 접하는 분들은 "겨우 2필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는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국유지 총 필지2필지

국유지 총 면적3,262

서울 25개 자치구 전체에 걸쳐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하는 seoulheritage.org의 조사 데이터를 보면, 각 동마다 국유지의 규모와 구성이 크게 다릅니다. 마포구 대흥동처럼 24필지에 56,654㎡에 달하는 대규모 국유지가 있는 반면, 미근동처럼 2필지 3,262㎡에 불과한 소규모 국유지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차이가 오히려 중요한 역사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미근동이 사대문 안쪽과 맞닿아 있던 만큼,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사유지와 관유지가 촘촘하게 뒤섞인 지역이었습니다. 그 결과 남은 국유지가 2필지뿐이라는 사실은, 반대로 이 동네에 그만큼 많은 민간 생활의 흔적이 중첩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땅이 좁을수록 역사는 더 빽빽하게 쌓이는 법입니다.



3. 대지 3,127㎡ — 관유 건물이 서 있던 자리

2필지 중 첫 번째는 대지(垈地) 1필지, 3,127㎡입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무려 95.9%를 차지하는 압도적인 비중입니다. 국유 대지라는 분류는 단순한 빈 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관청이나 공공시설, 관리소 같은 국가 소유 건물이 실제로 들어서 있었거나, 그런 용도로 확보된 땅이라는 뜻입니다.

대지

3,127㎡ (95.9%)

135㎡ (4.1%)

3,127㎡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요? 약 950평에 해당합니다. 작은 운동장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입니다. 이 규모의 국유 대지가 미근동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은, 그 자리에 상당히 규모 있는 관유 건물 또는 시설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1912년 서대문구 일대는 일제의 통치 인프라가 급속도로 확장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이 해에 경성감옥이 서대문감옥으로 개칭되었고, 충정로와 서대문 인근에는 각종 관아와 관리 기관들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미근동의 대규모 국유 대지는 이러한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 보면, 국유 대지는 특히 주목해야 하는 지목입니다. 관청 건물이 들어서 있던 자리에는 그 건물을 지을 때 이전 시대의 유구(遺構)가 파괴되거나 덮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로 관청 부지로 지정된 이후 외부 개발을 막아주는 보호막 역할을 해왔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역사는 언제나 양면을 지닙니다.


4. 밭 135㎡ — 가장 작은 땅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

두 번째 필지는 밭(田) 1필지, 135㎡입니다. 겨우 40평 남짓.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런 작은 국유 밭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지목

밭 (田)

1필지 · 국유지

면적

135㎡

약 41평 · 전체의 4.1%

135㎡짜리 국유 밭. 조선시대의 미근동이 미나리밭이 펼쳐진 습지 지역이었다는 역사적 맥락을 떠올리면, 이 작은 밭의 존재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변의 밭들이 대부분 사라지거나 대지로 전환된 상황에서, 마치 과거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135㎡짜리 국유 밭 하나. 그 자리에 서서 1912년의 미근동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작은 밭 필지는 종종 의외의 발견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농경지는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과정에서 윗 지층이 교란되지만, 깊은 지층까지 파헤쳐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경작지 아래에는 훨씬 오래된 유물층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135㎡라는 작은 면적이지만, 그 아래 지층에는 어쩌면 조선 전기, 또는 그 이전 시대의 유물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면적이 작다고 조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는 크기보다 위치와 지목이 더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됩니다. 135㎡의 국유 밭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 증거물입니다.



5.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왜 이 기록이 출발점인가

이 기초자료가 실제 문화재 조사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토지 개발이나 건축 공사를 진행하려면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실시해야 합니다.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역사적 흔적을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1912년 토지대장 기록이 핵심 참고자료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지목 정보가 지하에 어떤 유구나 유물이 있을지를 예측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미근동의 경우, 대지(3,127㎡)와 밭(135㎡)이라는 두 가지 지목은 각각 다른 방식의 조사 접근법을 요구합니다.

대지는 건물 유구, 기단부, 기와편, 도기류 등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아 면밀한 시굴조사 구역 설정이 필요합니다. 반면 밭은 농경 관련 유물 외에도 그 이전 시대 생활 유적이 깊은 지층에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표본조사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이처럼 지목 하나하나가 조사 전략을 달리하게 만드는 근거가 됩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인 seoulheritage.org는 서대문구 홍제동, 홍은동 등 서대문구 각 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을 꾸준히 정리해왔습니다. 미근동 자료 역시 이 체계적인 서울 전역 기초조사 작업의 일환입니다. 이런 데이터베이스가 쌓일수록, 서울 전체의 지하 문화유산 지도가 조금씩 더 선명하게 그려지게 됩니다.



6. 성공 사례 — 작은 땅에서 꺼낸 큰 역사

성공 사례 1

서대문구 홍제동 지표조사 — 1912년 기록이 열어준 단서

seoulheritage.org가 진행한 서대문구 홍제동 기초조사는 1912년 토지 기록을 출발점으로 삼아 해당 지역의 도시 변천사를 복원한 사례입니다. 토지 기록 한 장이 현장 조사의 방향과 범위를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조선시대 생활유적의 흔적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소규모 필지라 하더라도 철저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2

서울 도심 소규모 국유지 발굴 — 기와편 하나가 바꾼 개발 계획

서울 도심의 소규모 국유 대지에서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지표면 가까이에서 조선시대 기와편이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 발견 하나로 해당 부지의 개발 계획이 전면 재검토되었고, 이후 정밀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중기 관청 건물의 기단부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면적이 작다고 해서 조사를 생략하거나 간략히 진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준 사례입니다.

성공 사례 3

미동초등학교 인근 지역 역사 복원 — 학교 기록과 토지대장의 만남

1896년에 설립된 미동초등학교의 역사 기록과 1912년 토지대장 자료를 교차 분석함으로써, 미근동 일대 근대 초기 공간 구조를 복원하는 연구가 진행된 바 있습니다. 학교가 들어서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어떤 토지 구조가 있었는지를 밝혀냄으로써, 미근동의 개화기 도시 형성 과정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문서 기록과 토지 데이터의 결합이 얼마나 풍부한 역사 복원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7. 지금 미근동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단 2필지, 3,262㎡. 하지만 이제 이 숫자가 처음과는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요?

1필지 3,127㎡의 국유 대지는, 1912년 서대문구의 역사적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땅입니다. 서대문감옥이 들어서고, 근대 교육기관이 뿌리를 내리고, 일제의 통치 인프라가 확장되던 그 격동의 시기에 국가 소유로 등록된 땅.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1필지 135㎡의 국유 밭은, 사라져가던 미근동의 옛 풍경을 마지막으로 붙잡고 있던 작은 손길 같은 땅입니다. 미나리밭에서 출발한 이 동네의 이름이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실제 땅의 기억이었다는 것을, 이 135㎡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계획하는 분들에게 이 기록은 실질적인 출발점입니다. 어디를 먼저 살펴야 하는지, 어떤 유물을 예상해야 하는지, 조사 비용과 기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1912년 토지대장 한 장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기록은 서울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 도시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거울입니다. 충정로역에서 내려 미근동 골목을 걸을 때, 문득 발밑의 땅이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 시선이 바로 문화유산을 지키는 첫걸음입니다.

가장 작은 두 필지가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미근동의 땅은 여전히 말을 걸고 있습니다.우리가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1912년의 기록 하나가 100년 후 오늘,우리의 과거를 되살리는 씨앗이 됩니다.서울의 모든 골목, 모든 땅에는 저마다의 이름과 이야기가 있습니다.그것을 찾아내는 일 — 그것이 바로 문화유산 발굴의 진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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