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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은평구 대조동에 떨어진 거 실화?!

  • 2025년 3월 3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북한산 자락 은평구 대조동,


110년 전 이 땅엔 논과 밭이 전부였다.

184필지, 464,224㎡. 그 숫자 뒤에 박씨 가문이 있었고, 수탈의 흔적이 있었고, 한 시대 사람들의 삶 전체가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낸다.


목차

1.110년 전 대조동의 문을 열다

2.184필지의 실체 — 숫자가 품은 이야기

3.논 36필지, 땅의 절반이 물을 품었다

4.밭 105필지, 대조동을 먹여 살린 땅

5.집터 24필지, 사람들이 살던 공간의 크기

6.무덤과 산 — 삶과 죽음이 공존한 마을

7.박씨 36필지 — 대조동의 땅 주인 이야기

8.은평구가 품은 역사 — 진관외동과 함께 읽다

9.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

10.마무리 — 이 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



1. 110년 전 대조동의 문을 열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지금은 북한산 자락 아래 조용한 주거지구로 알려진 이 동네에, 110여 년 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지금 대조동 주민들이 매일 오가는 그 골목,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 공원 자리에 한때는 논물이 출렁이고 밭고랑이 길게 뻗어 있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공개한 1914년 지적 자료에 따르면, 당시 대조동은 184필지, 464,224㎡로 이루어진 광대한 농경지 마을이었다. 축구장 66개를 합친 면적이다. 이 숫자들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 안에 박씨, 김씨, 공씨, 이씨 가문이 살았고, 봄이면 모내기 소리가 울려 퍼졌고, 가을이면 수확의 기쁨이 마을을 가득 채웠다.

은평구는 서울에서도 유독 역사 층위가 두껍게 쌓인 지역이다. 인접한 진관외동(현 진관동)의 기록만 봐도 1912년에 489필지, 796,446㎡라는 압도적인 규모의 농촌 공동체가 존재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 흔적도 19필지나 남아있었다. 대조동은 그 이웃 마을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물을 마시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2. 184필지의 실체 — 숫자가 품은 이야기



184필지, 464,224㎡. 이 두 숫자가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풀어보면, 1914년 대조동이 얼마나 온전한 자급자족 농촌 공동체였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184

총 필지 수

464,224㎡

총 면적 (축구장 66개)

105필지

밭 (233,825㎡)

36필지

논 (216,691㎡)

24필지

대지 (17,064㎡)

16필지

임야 (89,778㎡)

전체 면적의 절반 가까이가 논과 밭이었다. 밭이 105필지에 233,825㎡, 논이 36필지에 216,691㎡. 두 농지를 합치면 무려 450,516㎡로 전체의 97%에 달한다. 다시 말해 1914년 대조동은 그야말로 '농사가 전부인 마을'이었다. 집은 겨우 17,064㎡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거주 공간만 확보하고, 나머지는 모두 농사에 헌납했다는 뜻이다.

105필지 · 233,825㎡

36필지 · 216,691㎡

임야

16필지 · 89,778㎡

분묘지

3필지 · 6,862㎡

대지

24필지


3. 논 36필지, 땅의 절반이 물을 품었다



36필지, 216,691㎡의 논. 이것은 대조동 전체 면적의 46%가 넘는 규모다. 논 하나를 생각해봐라. 봄에는 모내기로 온 가족이 허리를 굽히고, 여름엔 뙤약볕 아래 잡초를 뽑고, 가을엔 황금빛 벼 이삭이 출렁이는 풍경. 그 논이 36개나 되는 필지로 대조동을 덮고 있었다.

대조동에 논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 덕분이었다. 산자락의 계곡물이 자연스럽게 마을을 적셔주었고, 그 물이 논으로 흘러들었다. 은평구는 서울에서도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고, 그 덕분에 대조동은 논농사가 가능한 구릉 마을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대조동에서 논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파트 단지와 도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논이 있던 자리는 특수한 지층 구조를 갖는다. 수백 년간 물이 고였다 빠지기를 반복한 논바닥에는 점토층이 두껍게 형성되고, 그 층 안에 당시의 생활 유물들이 더 잘 보존되는 경향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대조동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36필지의 논에서 물이 출렁이던 그 소리, 지금은 아파트 소음 아래 잠들어 있다.


4. 밭 105필지, 대조동을 먹여 살린 땅

밭은 105필지, 233,825㎡로 대조동에서 단연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논이 쌀을 책임졌다면, 밭은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졌다. 감자, 고구마, 배추, 무, 콩, 고추. 사계절 내내 다른 작물이 이 밭을 채웠고, 그것들이 대조동 주민들의 밥상 위에 올랐다.

105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면적이 아니다. 각각의 필지마다 주인이 있었고, 그 주인이 심을 작물을 결정했다. 봄이면 씨앗을 고르는 기쁨이 있었고, 가을이면 수확물을 이웃과 나누는 정이 있었다. 밭 한 뙈기가 한 가족의 한 해 식량을 결정하던 시절, 105필지의 밭은 대조동이라는 공동체를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심장이었다.

밭은 또한 문화재 발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오래된 밭자리 아래에는 농기구, 씨앗 보관 용기, 생활 도구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접한 진관외동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은평구 일대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1914년의 밭 아래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된 시대의 흔적이 층위를 이루며 깔려 있을 수 있다.


5. 집터 24필지, 사람들이 살던 공간의 크기

대지, 즉 집터는 24필지, 17,064㎡였다. 전체 토지의 고작 3.7%에 불과하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1914년 대조동 사람들은 집보다 밭을 훨씬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생존이 우선이었고, 집은 비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면 충분했다.

24필지의 집터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농촌의 대가족 문화를 감안하면 수십 가구, 수백 명이 이 좁은 집터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을 것이다. 이웃집 담장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지은 집들, 아침마다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긷는 사람들, 저녁이면 마루에 앉아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 24필지의 집터에는 그런 삶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6. 무덤과 산 — 삶과 죽음이 공존한 마을

분묘지는 3필지, 6,862㎡였다. 산(임야)은 16필지, 89,778㎡. 이 두 항목은 1914년 대조동이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삶과 죽음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완결된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조선 시대와 그 직후까지 무덤은 마을의 일부였다. 명절이면 조상 묘에 벌초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었다. 대조동의 분묘지 3필지는 당시 사람들이 어느 방향에 조상을 모셨는지, 어떤 형식으로 무덤을 썼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재 자료다. 무덤 주변의 지층은 당시의 장례 문화와 함께 부장품, 도자기, 금속 유물이 보존될 가능성이 높은 지점이기도 하다.

임야 89,778㎡는 대조동 주민들의 뒷산이자 놀이터였고, 겨울이면 땔나무를 구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다. 지금 대조동의 산자락이 그 흔적이지만, 100년 전의 숲은 지금보다 훨씬 울창하고 자연 그대로였을 것이다.


7. 박씨 36필지 — 대조동의 땅 주인 이야기



1914년 대조동의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박씨가 36필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김씨(18필지), 공씨(16필지), 이씨(11필지)가 따랐다.

박씨36필지 (1위)

김씨18필지 (2위)

공씨16필지 (3위)

이씨11필지

박씨가 1위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전국적으로 김씨, 이씨가 인구 최상위를 차지하지만, 대조동에서는 박씨가 가장 많은 땅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대조동 일대에 박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특정 성씨가 한 마을에 집중적으로 모여 살면서 공동 경작과 상부상조로 살아가던 집성촌 문화, 그 구체적인 증거가 36필지라는 숫자다.

공씨 16필지도 눈에 띈다. 공씨는 전국적으로 많지 않은 성씨인데, 대조동에서는 3위에 올라있다. 이 역시 공씨 일가가 대조동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성씨 분포 데이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해당 지역 가문의 역사를 추적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8. 은평구가 품은 역사 — 진관외동과 함께 읽다

대조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접한 진관외동(현 진관동)의 기록과 함께 읽어야 한다. 진관외동은 1912년 기준으로 489필지, 796,446㎡의 광대한 면적을 가진 마을이었고, 논 159필지와 밭 255필지로 이루어진 거대한 농경 공동체였다.

대조동 (1914년)

184필지 · 464,224㎡

진관외동 (1912년)

489필지 · 796,446㎡

진관외동 기록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씨가 무려 160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19필지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세운 기관이다. 대조동을 포함한 은평구 일대에서도 이 수탈의 손길이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은평구는 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역사 깊은 지역이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까지 각 시대의 역사가 지층에 층층이 쌓여 있다. 이는 서울에서도 문화재 발굴 잠재 가치가 특히 높은 지역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9.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이 세 단계는 하나의 연속된 흐름이다. 각 단계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면, 왜 대조동 같은 역사 깊은 마을에서 이 절차가 반드시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1단계 — 문화재 지표조사

개발 사업 착공 전, 해당 부지의 역사 기록과 지표면을 분석해 문화재 존재 가능성을 평가한다. 1914년 지적 자료처럼 구체적인 역사 데이터가 있을수록 정확도가 높아진다.

2단계 — 시굴조사

지표조사에서 유적 존재 가능성이 확인된 구역에 트렌치(시굴갱)를 파고 토층을 분석한다. 유물 파편이나 유구의 흔적이 확인되면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3단계 — 발굴조사

본격적인 유적 발굴이 시작된다. 기와편, 도자기, 철기, 목재 구조물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이것들이 역사 기록으로 다시 살아난다.

발굴 성공 사례 —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중기 분묘군과 생활 유구가 다수 출토됐다. 수백 기의 묘에서 청자, 백자, 금속 유물이 확인됐으며, 이 발굴은 은평구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역사 깊은 생활 공동체였음을 입증했다. 사전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영영 사라질 기록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은 서울 25개 자치구 전역의 1912년~1914년 지적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해 각 동네의 문화재 잠재 가치를 데이터화하고 있다. 은평구 대조동을 포함해 진관동, 진관외동 등 은평구 전역에 걸친 분석 결과가 이미 공개되어 있으며, 이 데이터들은 미래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


10. 마무리 — 이 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



1914년 대조동. 184필지, 464,224㎡. 박씨 36필지, 논 36필지, 밭 105필지. 이 숫자들을 하나씩 읽고 나면, 그 뒤에 살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다. 봄비 맞으며 모내기를 하던 손, 가을 햇살 아래 고추를 따던 손, 밤이면 마루에 앉아 별을 세던 눈. 그 손들이 일구어 온 대조동 위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대조동 어딘가에서 낡은 건물이 허물리고 새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서 1914년의 박씨 가문이 심어놓은 무엇인가가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기와 조각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그 증거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지키는 일이 발굴조사다.

한 번 사라진 역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포클레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유물은 흙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지금이 중요하다. 대조동의 이야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날 때마다, 이 땅의 역사는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대조동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100년 전 모습이 궁금하다면?은평구 진관동, 진관외동 등 은평구 전역의 1912년 기록이 이미 공개되어 있습니다.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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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1914년 대조동에서 밭을 갈던 박씨 어른은110년 뒤 누군가가 자신의 땅 이야기를 이렇게 들여다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당신이 그 이야기를 읽었다.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역사는 살아있다.당신이 방금 그 역사를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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