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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의 동대문구 회기동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 2025년 5월 27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서울 역사회기동동대문구

당신이 매일 걷는 그 길,사실은 100년 전 왕실의 땅이었다

1912년 회기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서울의 잊혀진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경희대 앞 그 익숙한 골목, 매일 지나치던 그 자리가


조선 왕실 창덕궁의 땅이었다면 믿겠는가?



1912년의 회기동 토지대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목차

  1. 잊혀진 땅, 1912년 회기동을 걷다

  2. 회기동의 들녘 — 논과 밭이 말해주는 것들

  3. 삶이 피어난 집터의 기록

  4. 고요한 흔적 — 무덤과 사사지가 품은 이야기

  5. 숲과 언덕이 머물던 임야, 그리고 성씨로 읽는 마을

  6. 국유지·동척·창덕궁 — 땅의 주인이 드러내는 시대의 아픔

  7.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주목하는 이유

  8.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로 걷다



01 — 잊혀진 땅, 1912년 회기동을 걷다

우리가 매일 발을 디디는 이 땅이 한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지금의 동대문구 회기동은 경희대학교와 경희의료원, 카페와 식당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청년들의 거리다. 출근길에, 강의실 가는 길에, 혹은 친구와 걸어가는 그 골목에서 우리는 오늘만을 산다. 그런데 바로 그 발밑, 그 땅의 기억을 19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2년의 회기동은 총 112필지, 197,928㎡ 규모의 마을이었다. 지금의 콘크리트와 아스팔트 아래에는 한때 논과 밭이 넘실대고, 사람들의 삶이 고요하게 흘렀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는 조사 기관들이 바로 이 1910년대의 토지 기록을 핵심 자료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땅의 과거를 알아야만 땅의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오늘 회기동 어딘가를 걸었다면, 당신은 이미 역사 위를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함께 그 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총 필지

112필지

1912년 회기동 전체

총 면적

197,928㎡

약 6만 평 규모

논(답)

14필지

64,889㎡

밭(전)

56필지

97,960㎡


02 — 회기동의 들녘, 논과 밭이 말해주는 것들

1912년의 회기동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압도적인 농경지의 비율이다. 전체 면적의 절반이 훌쩍 넘는 땅이 논과 밭으로 채워져 있었다. 논은 14필지에 약 64,889㎡, 밭은 무려 56필지에 97,960㎡에 달했다. 두 가지를 합하면 전체 면적의 약 82%가 농경지였다는 뜻이다.

여름이면 초록빛 벼가 바람에 일렁이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들판이 지금의 경희대 캠퍼스 자리에 펼쳐져 있었다. 밭에는 배추, 무, 콩, 팥 같은 작물들이 계절마다 색깔을 바꾸며 자라났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 농경지는 단순한 토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이었고, 가족이었고, 계절의 리듬 그 자체였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은 이런 과거 농경지 자료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논이었던 지역에는 수분이 많아 유기물이 잘 보존되고, 밭이었던 지역에서는 생활 도구나 토기 조각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912년의 이 기록은 오늘날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와 표본조사의 기초 자료로 직접 활용된다.

"논과 밭의 분포는 단순히 농업 현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권, 물길, 지형의 흐름을 통째로 담은 살아있는 지도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관련 자료에서


03 — 삶이 피어난 집터의 기록

넓디넓은 들판 사이사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터가 있었다. 1912년 회기동의 대지(집터)는 35필지에 24,641㎡였다. 지금처럼 빼곡한 건물이 아닌, 마당이 있는 아담한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웃의 울음소리도,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도, 밥 짓는 연기도 골목을 타고 흘러다녔을 그 마을.

집터 35필지라는 숫자 속에는 수십 가구의 삶이 담겨 있다. 아침이면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저녁이면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을 그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이 딛고 살았던 땅은 지금도 우리 발아래에 있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서울 구도심 일대에서 시굴조사나 표본조사를 진행할 때, 이런 옛 집터 기록은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집터 아래에는 온돌 흔적, 우물 터, 기와 조각, 생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 도심 개발 현장에서 조선시대의 건물지나 일상 유물이 출토되는 경우, 1910년대 지적 자료에 표시된 '대지' 위치와 상당 부분 겹친다는 사실이 조사 기관들의 보고서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04 — 고요한 흔적, 무덤과 사사지가 품은 이야기

농경지와 집터 너머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공간이 있었다. 1912년 회기동의 분묘지는 3필지에 2,403㎡ 규모였다. 조상의 무덤은 단지 죽음을 기억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봄이면 성묘를 올리며 한 해의 안녕을 빌고,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는 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그리고 회기동에는 2필지, 6,466㎡에 이르는 사사지(寺社地)가 있었다. 사사지란 사찰이나 신사가 들어섰던 자리, 혹은 그 부속 토지를 의미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부처님께 합장하거나 마을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땅 아래에는 그날의 기도가 고요히 잠들어 있다.

분묘지

3필지

2,403㎡

사사지

2필지

6,466㎡

임야

2필지

1,566㎡

대지

35필지

24,641㎡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사사지와 분묘지는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구역이다. 이 구역에서는 도자기 조각, 묘비 파편, 제기류, 불교 관련 유물 등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서울 인근의 실제 발굴 사례를 보면, 1910년대 토지대장에 '분묘지'로 표시된 지역에서 조선시대 분청사기 조각과 제사 관련 철기가 출토된 경우가 보고된 바 있다. 회기동의 이 작은 숫자들은 그래서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05 — 숲과 언덕, 그리고 성씨로 읽는 마을

회기동에는 크진 않지만, 2필지 1,566㎡의 임야가 있었다. 작은 야산 혹은 언덕이었을 이 숲은 마을 사람들의 쉼터였고, 나무를 하거나 약초를 캐던 생활의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노인들이 해 질 녘 걸음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던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회기동 토지대장에 기록된 성씨를 보면 마을의 인구 구성이 어렴풋이 보인다. 김씨가 12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보유했고, 이씨가 3필지, 박씨·정씨·임씨·최씨가 각각 1필지씩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씨들이 그 시절에도 이 땅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 묘하게도 정겹게 느껴진다.



성씨별 토지 분포는 단순한 부동산 기록 그 이상이다. 어떤 문중이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는지, 어떤 씨족 공동체가 이 땅을 함께 경작하며 역사를 만들어 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이다. 문화재 조사 기관들이 지표조사 시 지역의 씨족 역사와 고문서를 함께 검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6 — 국유지, 동척, 그리고 창덕궁의 땅

이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하고 무거운 지점으로 들어간다. 1912년 회기동에는 개인 소유 외에도 다양한 주체가 땅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선 국유지가 54필지에 달했다. 전체 112필지 중 거의 절반이 국가 소유였다는 말이다. 이 땅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거나 주민에게 임대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의 토지가 31필지나 있었다. 동척이라는 이름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가슴이 무거워지는 이름이다. 1908년 일본이 설립한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회기동 땅 31필지에 동척의 이름이 올라있다는 사실은, 이 작은 마을도 일제강점기의 거대한 수탈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었음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창덕궁 소유의 토지가 회기동에 5필지나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 왕실의 이궁(離宮)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창덕궁이, 먼 회기동 땅에까지 소유권을 뻗고 있었던 것이다. 이 토지는 왕실이 직접 관리하거나 특정 목적으로 사용하던 별도의 용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 우리가 경희대 앞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때, 우리는 한때 왕실의 땅이었던 그 위를 걷고 있는 셈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회기동은 그냥 평범한 동네가 아니다.


07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주목하는 이유

서울 도심의 개발이 지속되면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지표조사란 공사 예정지를 대상으로 문헌 기록과 현장 답사를 통해 매장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사전에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가능성이 확인되면 표본조사 → 시굴조사 → 정밀 발굴조사 순으로 단계가 진행된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발굴조사는 조사 대상 면적의 종류에 따라 표본조사(2% 이내), 시굴조사(10% 이내), 정밀발굴조사로 구분된다. 이 과정에서 1912년의 토지대장 자료는 해당 지역의 사사지·분묘지·집터 위치를 특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100여 년 전의 지적 기록을 여전히 들여다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회기동을 포함한 동대문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의 외곽 지역으로, 왕실 소유지와 사찰, 농경지가 혼재하던 복합적인 공간이었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존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분류되며, 개발 공사 전 반드시 사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을 비롯한 전문 기관들이 1912년 회기동과 같은 자료를 공개하고 기록하는 것은, 단순한 과거 기록의 보존을 넘어 미래의 발굴 조사를 위한 살아있는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땅의 역사를 먼저 듣는 행위다. 그 첫 번째 귀를 기울이는 곳이 바로 1910년대의 지적 기록이다."


08 —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로 걷다

이렇게 1912년의 회기동을 걸어왔다. 논과 밭, 집터와 무덤, 사사지와 임야, 김씨와 이씨의 땅, 그리고 국유지와 동척과 창덕궁의 토지까지. 숫자로 기록된 112필지의 이야기 속에 한 마을의 생로병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 모든 역사 위에 서 있다. 경희대학교 캠퍼스의 잔디밭이 예전에는 황금빛 벼가 익어가는 논이었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가 한때 왕실 소유의 고요한 땅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분명 다르다. 역사를 아는 사람은 땅을 다르게 본다. 더 조심스럽게, 더 소중하게, 더 감사하게.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그 '아는 것'을 체계적으로 실현하는 행위다. 어떤 건물을 짓기 전에, 어떤 도로를 내기 전에, 먼저 그 땅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 1912년의 회기동 기록은 그 귀 기울임의 출발점이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단지 오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의 사람들이 갈고 닦아 오늘의 우리에게 넘겨준 유산이며, 오늘의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미래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만이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있고, 현재를 제대로 사는 사람만이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

오늘 당신이 걸은 그 길이,


누군가의 논이었고, 무덤이었고, 기도하는 자리였다.



그 땅의 기억을 우리가 기억할 때,


비로소 이 도시는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오늘도 회기동을 걷는 당신에게,


이 땅이 품은 100년의 이야기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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