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 서울 HI
- 6월 10일
- 2분 분량
1912년 휘경동, 시간의 땅을 밟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서울의 한 골목, 휘경동.
이제는 아파트와 상가들이 빼곡한 도심이지만, 이곳이 1912년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서울의 한 동네에도 역사의 숨결과 사람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오늘은 100년 넘게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목차
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논과 밭의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의 삶
집과 무덤 사이, 삶과 죽음의 공존
휘경동을 채운 나무, 작은 숲
성씨로 보는 휘경동의 주인들
나라 땅과 동척, 역사의 그림자
역사를 품은 휘경동, 발굴의 문을 열다

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1912년, 동대문구 휘경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한적하고 고요했다. 327필지, 약 68만㎡라는 공간 속에 펼쳐진 풍경은 현대인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현대의 편의점과 카페가 즐비한 거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논과 밭, 소박한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대가 변해도 땅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에, 휘경동의 옛 모습을 되돌아보는 것은 시간여행자의 즐거움이다.
논과 밭의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의 삶
휘경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했던 것은 다름 아닌 논과 밭이다. 논은 무려 115필지에 걸쳐 390,395㎡나 차지했고, 밭은 이보다 더 많은 152필지, 265,690㎡였다.
이곳 주민들은 땅과 함께 삶을 꾸려갔다.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기다리며, 계절의 흐름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아래서 쌀과 채소를 키우던 농부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진다.
집과 무덤 사이, 삶과 죽음의 공존
휘경동엔 집도 적지 않았다. 53필지에 달하는 집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가족을 이루고,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갔다. 면적은 작았지만, 15,061㎡의 대지에 촘촘히 세워진 집들은 사람들의 웃음과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무덤도 있었다. 5필지 1,107㎡의 분묘지가 있었는데, 삶의 공간 바로 곁에 죽음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식을 느끼게 해준다.
휘경동을 채운 나무, 작은 숲
1912년 휘경동엔 작지만 소중한 숲이 있었다. 2필지, 11,937㎡의 임야는 주민들에게는 쉼터이자 생활 자원이었을 것이다. 작은 숲에서 사람들은 땔감을 얻고, 아이들은 뛰어놀았을 것이다.
성씨로 보는 휘경동의 주인들
1912년 휘경동의 주요 성씨는 김씨였다. 김씨는 98필지를 소유하며 압도적으로 많았고, 박씨가 35필지, 이씨가 21필지, 정씨 18필지, 민씨 14필지로 뒤를 이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성씨별 공동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성씨는 단순히 이름을 넘어 지역 사회를 이끄는 중심축이었던 것이다.
나라 땅과 동척, 역사의 그림자
휘경동엔 나라의 땅과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도 있었다. 13필지의 국유지는 정부 소유로 관리됐고, 일제강점기 땅 수탈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땅도 무려 53필지나 있었다.
이 땅들은 휘경동의 어두운 역사를 증언하며, 지금 우리가 편하게 걷는 이곳의 역사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역사를 품은 휘경동, 발굴의 문을 열다
휘경동의 1912년 모습을 이해하면 이 땅의 가치와 중요성을 새롭게 보게 된다. 휘경동은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곳이며, 우리가 발굴하고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다.
서울지역에서 문화유적 시굴조사나 발굴조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휘경동에서 과거를 만나게 될 것이다. 휘경동의 역사적 가치를 깊이 탐색하며, 이 땅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해내는 일은 시대를 잇는 의미 있는 작업이다.
휘경동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앞으로 이 길을 걷는 걸음마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들 것이다. 다음 발자국은 더 깊고 의미 있게 남기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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