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 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 2025년 6월 1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지금 네가 걷는 휘경동 골목, 100년 전엔 논물 소리가 들렸다
1912년 동대문구 휘경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땅과 사람의 이야기
지금 이 순간, 너는 과거 위를 걷고 있다.
아파트 아래, 상가 아래, 네가 밟는 콘크리트 아래
100년 전 누군가의 논이, 밭이, 집이, 무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도.

목차
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논과 밭의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의 삶
집과 무덤 사이, 삶과 죽음의 공존
휘경동을 채운 나무, 작은 숲의 기억
성씨로 보는 휘경동의 주인들
나라 땅과 동척, 역사의 그림자
역사를 품은 휘경동, 발굴의 문을 열다
휘경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는가. 아마 대부분은 동대문구의 평범한 주거 지역, 버스 정류장, 아파트 단지, 그 정도일 거다. 특별히 역사적인 동네라는 인상은 없다. 그런데 1912년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생각이 완전히 뒤집힌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1912년 일제 토지조사부를 동네 단위로 분석해 서울 각 지역의 잊혀진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동대문구 휘경동 기록을 들여다봤을 때, 예상보다 훨씬 풍부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지금부터 그 시간여행을 함께 시작하자.
1. 휘경동, 1912년의 풍경을 만나다
1912년, 동대문구 휘경동은 총 327필지, 약 68만 제곱미터 규모의 땅이었다. 지금처럼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는 도심이 아니라, 논과 밭이 드넓게 펼쳐진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다. 아침이면 수탉 울음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지고, 논에서는 개구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그 풍경을.
지금의 편의점과 카페가 빼곡한 거리를 상상하지 말고, 그 자리에 소박한 초가집 한 채와 구불구불한 흙길 하나를 놓아봐. 그리고 그 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논을 상상해봐. 그게 1912년 휘경동이었다.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 느껴지는가.
서울이 급격하게 도시화되던 시기, 휘경동은 그 변화를 고스란히 겪으며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그 변화의 흔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변화 이전, 1912년의 모습부터 알아야 한다. 땅의 역사는 거기서부터 시작되니까.
2. 논과 밭의 시대, 그 시절 사람들의 삶

1912년 휘경동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건 논과 밭이었다. 논은 무려 115필지에 걸쳐 390,395㎡, 밭은 152필지에 265,690㎡였다. 두 농경지를 합치면 전체 면적의 95%에 육박한다.
327필지
휘경동 전체 필지
약 68만㎡
총 면적
115필지
논 (390,395㎡)
152필지
밭 (265,690㎡)
53필지
대지 (15,061㎡)
5필지
분묘지 (1,107㎡)
논 115필지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걸 잠깐 생각해봐. 필지 하나에 평균 3,395㎡다. 지금의 아파트 단지 하나 면적이 넘는 논이 115개나 있었다는 뜻이다. 그 논에서 봄마다 모내기를 하고, 가을마다 추수를 했을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가는가.
밭도 만만치 않다. 152필지, 265,690㎡. 봄엔 씨앗을 심고, 여름엔 잡초를 뽑고, 가을엔 수확을 하고, 겨울엔 다음 해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이 밭들을 일궜을 거다. 그 일상이 반복되는 동안 세월이 쌓이고, 그 세월이 이 땅의 역사가 됐다.
지금 네가 걷는 휘경동 골목 어딘가에, 그 논두렁 흔적이 콘크리트 아래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할 때 토양 단면을 보면, 과거 농경지였던 땅은 지층 구조가 다르게 나타난다. 흙의 색깔, 퇴적물의 종류, 층위의 두께가 다 다르다. 땅은 정직하게 기억하고 있다.
"계절의 흐름과 함께 살았던 그 사람들의 손끝이,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 남아 있다."
3. 집과 무덤 사이, 삶과 죽음의 공존
1912년 휘경동에는 53필지, 15,061㎡의 집들이 있었다. 전체 면적에서 보면 아주 작은 비율이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수십 가구의 사람들이 매일의 밥을 짓고, 아이를 키우고, 이웃과 정을 나눴다.
당시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거나 기와집이었을 거다.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에 장독이 줄지어 서 있었을 거고, 여름이면 마루에 앉아 부채를 흔들며 이웃과 이야기를 나눴을 거다. 지금처럼 방음이 되는 아파트 속에서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고 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그리고 그 집들 사이에 무덤이 있었다. 5필지, 1,107㎡의 분묘지가 삶의 공간 바로 곁에 자리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낯설 수 있지만, 당시엔 조상의 무덤이 마을 가까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무덤 앞에서 절을 올리고, 술잔을 나누던 그 풍경이 휘경동에도 있었던 거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분묘지는 특히 중요하다. 조선 시대 무덤에서는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는 부장품이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자기, 장신구, 의복 조각, 심지어 나무 관에서는 보존 상태 좋은 유기물이 나오기도 한다. 이 5필지 어딘가에 그런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4. 휘경동을 채운 나무, 작은 숲의 기억
1912년 휘경동에는 임야가 2필지, 11,937㎡ 있었다. 넓지는 않다. 하지만 이 작은 숲이 당시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공간이었을지는 상상 이상이다.
겨울을 나려면 땔감이 필요했다. 가스도 전기도 없던 시절, 아궁이에 넣을 나무를 구하러 숲에 가는 건 계절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그 숲에서 뛰어놀고, 여름에는 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기도 했을 거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이 임야 어딘가에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그 숲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오래전에 벌목되고 개발됐을 거다. 하지만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그 흔적을 토양 층위에서 찾아낼 수 있다. 나무뿌리의 흔적, 숲 토양의 특성, 퇴적된 낙엽층의 흔적들이 땅속에 증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숲은 사라졌지만 땅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5. 성씨로 보는 휘경동의 주인들
1912년 휘경동 토지 기록에는 여러 성씨가 등장한다.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건 김씨로, 98필지를 소유했다. 그 뒤를 박씨 35필지, 이씨 21필지, 정씨 18필지, 민씨 14필지가 이었다.
98필지
김씨
35필지
박씨
21필지
이씨
18필지
정씨
14필지
민씨
김씨 98필지. 이건 단순히 특정 성씨가 많은 게 아닐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같은 집안의 사람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집성촌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즉, 당시 휘경동에는 특정 본관의 김씨 일가가 대대로 이 땅을 지켜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 김씨 집안의 족보, 선산, 문중 기록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휘경동의 역사를 훨씬 풍부하게 복원할 수 있을 거다.
민씨 14필지도 눈에 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흥 민씨 계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추정에 불과하지만, 이런 연결고리를 추적하는 것이 문화재 역사 연구의 묘미이기도 하다. 성씨 하나가 그 시대 사회 구조 전체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되기도 하니까.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기록은 매우 실용적인 역할을 한다. 어느 구역에 어느 성씨가 살았는지 알면, 그 지역에서 나오는 비석·도자기·생활 유물의 귀속을 특정 가문과 연결할 수 있다. 이름 없는 파편 하나가 성씨 기록과 만나면 갑자기 누군가의 이야기가 되는 거다.
6. 나라 땅과 동척, 역사의 그림자

1912년 휘경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 여기다. 국유지 13필지,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땅 53필지.
국유지 13필지는 그나마 이해가 가는 범위다. 도로, 관청 부지, 공공 시설 등으로 쓰이던 땅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동척 소유 53필지는 다른 이야기다.
동양척식주식회사 — 수탈의 시스템
1908년 일제가 조선의 경제와 토지를 장악하기 위해 세운 국책회사. 조선인의 땅을 헐값에 빼앗거나 강제로 매입해 일본인 이민자에게 재분배했다. 소작농들에게는 수확의 50% 이상을 소작료로 요구했고, 이에 항거한 농민 투쟁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1917년 말 기준 조선 총독부 다음의 조선 최대 지주였다.
동척 53필지. 휘경동 전체 327필지의 16%가 넘는 땅이다. 이 땅들이 어떻게 동척의 손에 넘어갔는지는 기록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과정이 결코 공정했을 리 없다는 건 역사가 이미 말해주고 있다.
그 땅에서 일했던 조선인 소작농들을 상상해봐. 내 땅이 아닌 남의 땅을, 그것도 수탈 기관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내야 했던 그 삶. 그 분노와 슬픔이 휘경동 이 땅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
실제로 동척의 수탈에 맞선 저항은 역사에 또렷이 남아 있다. 1926년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는 경성의 동척 건물에 폭탄을 던지며 일제 수탈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분노가 아니었다. 땅을 빼앗기고, 삶을 빼앗긴 수백만 조선인의 분노가 한 몸에 담긴 행동이었다. 휘경동의 동척 땅 53필지도 그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광복 이후 동척의 재산은 미군정에 의해 몰수됐고, 이후 토지 개혁을 거쳐 조선인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빼앗겼던 세월과 거기서 흘린 땀, 그리고 눈물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흔적들이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하나씩 기록되고 있다.
7. 역사를 품은 휘경동, 발굴의 문을 열다

휘경동의 1912년 기록을 이해하고 나면, 이 땅을 걷는 느낌이 달라진다.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건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 땅에 매장된 문화재가 있는지 미리 확인하는 사전 조사다. 3만 제곱미터 이상의 건설 사업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법적 의무이기도 하다. 조사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 순서로 이어진다. 이 단계들은 단순히 유물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그 땅이 어떤 시간을 살아왔는지를 기록하는 행위다.
휘경동처럼 논이 115필지, 밭이 152필지이던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하면 무엇이 나올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조선 시대 농경 관련 유구들이다. 논의 경계를 표시하던 두렁 흔적, 물을 끌어들이던 수리 시설, 농기구를 보관하던 건물터 같은 것들. 그리고 분묘지 5필지 어딘가에서는 조선 시대 매장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나올 수도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바로 이런 정보를 미리 파악해두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12년 토지 기록을 분석해서, 어느 지역에 어떤 역사적 가능성이 있는지 데이터를 쌓는 것. 그게 지표조사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고, 개발과 보존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기초 작업이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이런 사전 조사 덕분에 귀중한 유산을 지킨 사례들이 있다. 종로구 공평동에서는 대규모 재개발 이전 발굴조사에서 조선 시대 골목과 건물 터가 드러나면서, 지하에 유적 전시관을 만들어 보존하는 방식으로 개발 계획이 바뀌었다. 파괴하지 않고 기억하는 방법을 찾아낸 거다.
휘경동도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이 동네의 땅 아래에, 1912년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그 기억을 깨우는 것, 기록하는 것, 지키는 것. 그게 문화재 지표조사이고, 발굴조사이고, 시굴조사가 하는 일이다.

휘경동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 아래를 생각해줘.
그 아스팔트 아래, 수백 년 전 누군가의 논이 있었고,
그 논을 빼앗긴 누군가의 분노가 있었고,
그럼에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버텨낸
이름 모를 휘경동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
지금 네가 밟고 있는 이 땅이, 그 자체가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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