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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구기동, 그곳엔 시간여행이 가능한 비밀이 있다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지금 고급 주택가인 구기동, 1912년엔 밭이 94%였다


265필지 중 밭 169필지·집터 89필지. 김씨 140필지의 압도적 지배. 그리고 땅 속에서 나온 김씨 문중 제기 — 여의도 절반 크기 땅에 숨겨진 구기동의 시간


목차

1. 서울 한복판, 100년 전 구기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2. 265필지 81만㎡, 이 시리즈 최대 규모 마을

3. 밭이 마을을 삼켰다 — 94%가 농경지

4. 김씨 140필지 — 전체의 53%, 구기동의 지배자

5. 이씨·홍씨·설씨·임씨가 이루던 나머지

6. 사사지·임야·국유지 — 구기동 속 작은 땅들의 이야기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본 구기동의 가치

8. 성공 사례 — 땅 속에서 나온 김씨 문중 제기

9. 마무리 — 구기동은 서울의 살아있는 책이다


지금 구기동이라고 하면 고급 주택가, 대사관, 북악산 자락의 조용한 골목이 떠오른다. 그런데 딱 110년 전 이 동네의 기록을 펼쳐보면 입이 벌어진다. 265필지 중 169필지가 밭이었다. 집터보다 농경지가 두 배 가까이 많았고, 면적으로 보면 전체의 94%가 밭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충격. 그 265필지 중 김씨 가문이 140필지를 가지고 있었다. 53%. 앞서 권농동에서 정씨가 59%를 차지해 이 시리즈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구기동의 김씨도 과반수를 넘는다. 게다가 140필지라는 절대적 수치는 훨씬 크다.


1. 서울 한복판, 100년 전 구기동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서울 도심에서 북악산 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소음이 줄어들고 골목이 조용해진다. 지금은 고급 주택가로 이름난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밭이 가득한 농경 마을이었다. 그 반전이 이미 이야기의 시작이다.

1912년 일제가 토지조사를 강행하던 시기, 구기동은 총 265필지에 걸쳐 812,873㎡의 땅이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수십 개의 종로구 동네를 살펴봤는데, 이렇게 넓은 면적을 가진 동네는 구기동이 처음이다.


2. 265필지 81만㎡, 이 시리즈 최대 규모 마을

812,873㎡. 이 숫자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렇게 비교해보자.

여의도 면적의 약 28%

여의도 전체가 약 290만㎡. 구기동 1912년 면적은 그 약 28%에 해당한다.


앞서 살펴본 궁정동(66,076㎡)의 12배가 넘는 규모다.

265필지

총 필지 수

812,873㎡

총 면적 (여의도의 28%)

약 3,068㎡

필지당 평균 면적

필지당 평균 면적이 약 3,068㎡, 약 930평이다. 궁정동의 필지당 204평도 상류층 마을이라고 했는데, 구기동은 그 4.5배가 넘는다. 이 숫자가 말하는 건 구기동이 도심형 주거지가 아닌, 드넓은 농경지가 펼쳐진 교외형 농촌 마을이었다는 것이다.


3. 밭이 마을을 삼켰다 — 94%가 농경지

구기동의 가장 충격적인 특징이 여기 있다. 265필지 중 169필지, 767,854㎡가 밭이었다. 면적으로 보면 전체의 94.5%다.

94.5%

1912년 구기동 전체 면적 중 밭이 차지한 비율.


집터(대지)는 고작 89필지, 26,882㎡로 전체의 3.3%에 불과했다.

169필지

767,854㎡ — 전체의 94.5%

대지 (집터)

89필지

26,882㎡ — 전체의 3.3%

임야

5필지

15,226㎡

사사지

2필지

2,909㎡

이 수치를 앞서 살펴본 동네들과 비교하면 충격이 배가된다. 낙원동은 대지가 99.7%였다. 구기동은 그 정반대다. 대지 3.3%에 밭 94.5%. 같은 종로구 안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두 동네가 공존했다는 사실이 1912년 서울의 다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 대사관과 고급 빌라가 들어선 그 자리. 1912년에는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가을이면 수확하던 밭이 가득했다."


4. 김씨 140필지 — 전체의 53%, 구기동의 지배자

구기동에서 또 하나의 시리즈 기록이 나온다. 김씨 140필지. 전체 265필지의 53%다.

53%

265필지 중 김씨 가문이 140필지를 소유.


권농동 정씨의 59% 점유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절대적 필지 수 140필지는 이 시리즈 단일 성씨 최대 규모다.

140필지라는 숫자의 규모를 생각해봐야 한다. 권농동의 정씨가 112필지로 역대 최고 점유율 59%를 기록했는데, 구기동의 김씨는 140필지로 절대적 규모에서는 더 크다. 게다가 이 140필지 대부분이 밭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구기동의 김씨 가문은 드넓은 농경지를 지배하던 대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순한 지주가 아니었다. 대대로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마을 공동체의 중심을 지키던 가문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140필지 구역은 가장 풍부하고 일관된 유물 층위를 기대할 수 있는 최우선 조사 대상이다.


5. 이씨·홍씨·설씨·임씨가 이루던 나머지

김씨의 140필지 뒤로 이씨 22필지, 홍씨 18필지, 설씨 13필지, 임씨 11필지가 따랐다.

김씨

140필지

이씨

22필지

홍씨

18필지

설씨

13필지

임씨

11필지

이씨 22필지가 2위이지만 김씨와의 격차가 압도적이다. 22필지 대 140필지. 이 차이가 구기동 마을 공동체에서 김씨 가문이 가졌던 영향력의 크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눈에 띄는 성씨가 있다. 설씨 13필지와 임씨 11필지.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에서 설씨가 상위 5위 안에 든 경우는 없었다. 구기동에서만 나타나는 이 독특한 성씨 구성이 북악산 자락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문중 공동체가 이 산 자락에 터를 잡고 대대로 이어온 역사가 설씨와 임씨의 등장에서 느껴진다.


6. 사사지·임야·국유지 — 구기동 속 작은 땅들의 이야기

사사지 2필지(2,909㎡)는 이 넓은 농경 마을 안에서 종교와 신앙의 공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이 땅에서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고,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임야 5필지(15,226㎡)는 지금도 북악산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자연 환경과 연결된다. 1912년 이 임야는 땔감과 약초의 원천이었고, 마을 경계의 자연 장벽이기도 했다. 국유지 3필지는 이 시기 조선총독부 명의로 등록됐을 가능성이 있다. 농촌 마을 한가운데에 국가 소유지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 당시 일제의 토지 행정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했는지를 보여준다.

사사지 2필지는 구기동의 종교적·공동체적 생활 공간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문화재 발굴 시 이 구역에서는 조선 시대 불교 또는 유교 의례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어 당시 구기동 주민들의 정신 문화를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본 구기동의 가치

구기동처럼 오랜 역사와 농경 문화가 중첩된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왜 필수인지는 이미 데이터가 말해준다. 94.5%의 농경지, 김씨 가문의 140필지, 사사지와 임야의 존재. 이 모든 요소가 땅 아래에 풍부한 역사 층위를 예측하게 한다.

토지대장 분석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정밀발굴

구기동에서 부지를 개발하려면 반드시 문화재 조사를 선행해야 한다. 특히 구기동처럼 역사적 가치가 높고 자연 환경과 인접한 지역은 문화재청과의 협의가 중요한 과정이 된다. seoulheritage.org는 구기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역사 토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브하며 이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8. 성공 사례 — 땅 속에서 나온 김씨 문중 제기

구기동 일대 주택 신축 공사 전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 시대 토기와 유물들이 발견됐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제기(祭器)로 추정되는 유물들이었다. 이 제기들은 구기동을 지배하던 김씨 문중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발굴 성과가 의미하는 건 단순한 유물 발견이 아니다. 구기동이 단순한 거주지가 아닌, 조상 숭배와 가문의 정체성이 깃든 장소였음을 증명하는 물질적 증거였다. 140필지의 농경지를 지배하던 김씨 가문이 이 땅에서 어떤 의례를 치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제기 하나를 통해 드러났다.

구기동 발굴에서 김씨 문중 제기가 출토된 사례처럼, 대규모 농경 마을에서의 발굴은 당시 농촌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와 신앙 문화를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94.5%의 밭이 지배하던 구기동은 앞으로도 발굴이 이루어질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9. 마무리 — 구기동은 서울의 살아있는 책이다

오늘 구기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고급 주택과 대사관 사이를 지나면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드넓은 밭이었을 수도 있고, 설씨나 임씨의 농경지였을 수도 있다. 사사지의 기도 공간이었을 수도 있고, 북악산 자락 임야의 끝자락이었을 수도 있다.

265필지, 812,873㎡. 이 숫자 뒤에는 봄마다 씨앗을 뿌리고 가을마다 수확을 기다리던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제기에 제물을 올리며 조상에게 안녕을 기원하고, 이웃 김씨 가문과 밭 경계를 나누며 살아가던 그 사람들. 지금 이 땅 아래에 그들의 기억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구기동은 서울의 과거를 담은 가장 크고 깊은 책이다. 그 책을 여는 열쇠가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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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절반 크기 땅의 94%가 밭이었던 1912년 구기동

265필지, 812,873㎡. 밭 94.5%, 김씨 53% 점유, 설씨와 임씨라는 독특한 성씨 구성. 그리고 땅 속에서 나온 김씨 문중 제기. 지금 고급 주택가인 구기동 아래에 조선 농경 마을의 기억이 겹겹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구기동에서 건축이나 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지표조사 의뢰 방법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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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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