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효제동 토지로 읽는 도시의 기억 - 집과 밭,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 이야기
- 서울 HI
- 1월 9일
- 3분 분량
목차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효제동 이야기
1912년 효제동의 전체 풍경, 332필지에 담긴 일상
집이 있다는 건 삶이 있다는 것, 대지 206필지의 의미
밭이 더 많았던 동네, 도시와 농촌의 경계
잡종지와 국유지가 말해주는 숨은 행정의 흔적
성씨로 본 효제동, 누가 이 동네를 살았을까
미국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시대의 그림자
오늘의 효제동에서 1912년을 상상하다
기록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남겨야 할 것
————————————————
1912년 효제동은 숫자로 보면 조용하지만, 들여다보면 아주 시끄러운 동네였다.
————————————————
1장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효제동 이야기
처음엔 숫자였다.
332필지, 84,701㎡.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숫자들을 오래 보고 있으면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든다.
아침에 문 여는 소리, 밭을 가는 숨소리, 골목에서 오가는 발걸음.
1912년 종로구 효제동은 지금의 도심 이미지와 전혀 달랐다.
도시 한복판이지만 농촌의 리듬이 남아 있었고, 집과 밭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이 글은 단순한 토지 통계 정리가 아니다.
서울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할 때 꼭 한 번 짚고 가야 할, 효제동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다.
————————————————
2장 1912년 효제동의 전체 풍경, 332필지에 담긴 일상
1912년 효제동의 전체 면적은 84,701㎡.
필지 수는 332필지였다.
이 숫자만 보면 꽤 빽빽한 동네처럼 보이지만, 토지 이용을 나눠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온다.
이 동네는 주거지이자 경작지였다.
잠자는 공간과 먹고사는 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아주 생활 밀착형 동네였다.
이 구조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생활유구와 농경유구가 동시에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효제동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라, 조사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바뀐다.
————————————————

————————————————
3장 집이 있다는 건 삶이 있다는 것, 대지 206필지의 의미
1912년 효제동에는 대지가 206필지, 면적은 31,031㎡였다.
전체 필지의 절반이 넘는다.
이 말은 곧, 효제동이 분명한 주거 중심지였다는 뜻이다.
대지는 단순히 집이 있는 땅이 아니다.
부엌이 있고, 우물이 있고, 마당이 있고, 가족의 시간이 쌓이는 공간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대지 비율이 높다는 건 뚜렷한 신호다.
생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도자기 조각, 생활 토기, 우물 흔적, 배수로.
효제동은 그런 이야기들이 땅속에 켜켜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다.
————————————————

————————————————
4장 밭이 더 많았던 동네, 도시와 농촌의 경계
효제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숫자는 밭이다.
124필지, 50,787㎡.
면적만 보면 대지보다 훨씬 넓다.
이건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1912년 효제동은 ‘도시 속 농촌’이었다.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바로 밭으로 갔고, 생활과 생산이 한 공간 안에서 이어졌다.
이런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농경 흔적과 주거 흔적이 동시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확장됐는지,
어디까지가 도시였고 어디부터 농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바로 효제동이다.
————————————————

————————————————
5장 잡종지와 국유지가 말해주는 숨은 행정의 흔적
잡종지는 2필지, 2,882㎡.
숫자는 작지만 의미는 작지 않다.
잡종지는 도로, 하천, 공공 목적의 여지가 있는 땅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미 이 시기에 동네 관리와 행정의 손길이 닿고 있었다는 증거다.
국유지도 6필지가 존재했다.
이건 효제동이 완전히 개인의 땅으로만 구성된 동네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공적인 공간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고,
훗날 도시계획의 씨앗이 되는 구조가 이때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

————————————————
6장 성씨로 본 효제동, 누가 이 동네를 살았을까
효제동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씨는 이씨 73필지, 김씨 71필지다.
그 다음으로 박씨 21필지, 최씨 15필지, 정씨 14필지, 안씨 10필지.
특정 성씨가 독점하지 않았다.
여러 가문이 비교적 고르게 섞여 있었다.
이건 한 집안이 지배한 동네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 생활 공동체였다는 뜻이다.
발굴조사에서 이런 지역은 유물의 성격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계층이 단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7장 미국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시대의 그림자
효제동에는 미국인 소유 토지가 16필지 있었다.
일본인 소유 토지는 1필지였다.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이지만, 상징성은 크다.
이 땅들은 단순한 개인 소유가 아니다.
외세가 서울의 공간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흔적이다.
문화재 발굴이나 시굴조사를 할 때,
이런 필지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건물 구조, 사용 방식, 유물 성격이 다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

————————————————
8장 오늘의 효제동에서 1912년을 상상하다
지금 효제동을 걸으면 이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땅은 기억한다.
발굴조사라는 건,
땅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작업이다.
1912년 효제동의 구조를 알고 나면,
지표조사 한 번, 시굴조사 한 트렌치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
여긴 그냥 동네가 아니다.
서울이 도시가 되기 직전의 호흡이 남아 있는 장소다.
————————————————
9장 기록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남겨야 할 것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제 효제동은 단순한 지명이 아닐 거다.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사람이 살았던 공간.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파내는 일이 아니라,
미래에게 설명할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1912년 효제동은 그 언어를 만들기에 충분히 풍부한 동네다.
그리고 이 기록을 읽는 우리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차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