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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효제동 토지로 읽는 도시의 기억 - 집과 밭,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 이야기

최종 수정일: 1일 전

서울 문화유산 심층 분석 · 종로구 편

1912년 효제동,집과 밭 사이에서 살았던 사람들

332필지 84,701㎡ 안에 담긴 도시와 농촌의 경계 —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데이터로 다시 쓰는 종로구 효제동의 진짜 이야기

332총 필지 수

84,701㎡전체 면적

206필지주거 대지

124필지경작지(밭)

아직도 그 밭의 기억이 땅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효제동이라는 이름이 완전히 달라 보일 거야. 도심 한복판에 밭이 있었고, 집과 경작지가 나란히 붙어 있었던 동네. 그 안에서 이씨, 김씨, 박씨가 이웃으로 살았고, 어느 날 미국인의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지기 시작했어. 1912년 한 장의 토지조사부가 열어주는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그리고 그 세계는 지금도 땅속에 묻혀 있어.


CHAPTER 01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효제동 이야기



처음엔 숫자였어. 332필지, 84,701㎡. 그냥 보면 행정 서류에 박힌 건조한 데이터 같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아침에 나무 대문 여는 삐걱거리는 소리, 괭이로 흙을 뒤집는 숨소리,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발소리. 1912년 종로구 효제동은 지금 우리가 아는 종로의 모습과 전혀 달랐거든.

지금의 효제동은 도시 한복판이야. 지하철역이 있고, 카페가 있고, 빌라와 다세대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그런데 딱 100년 전만 해도 이 동네는 집과 밭이 나란히 공존하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 어딘가에 있었어. 사람들은 집에서 나와 바로 밭으로 걸어갔고, 저녁이 되면 밭에서 집으로 돌아왔어. 그 일상의 흔적들이 지금도 땅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이 글은 단순한 토지 통계 정리가 아니야.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준비할 때 반드시 한 번 짚고 가야 할, 효제동의 원형에 대한 이야기야. 그리고 동시에, 이름도 기록도 없이 이 땅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해.


CHAPTER 02

1912년 효제동의 전체 풍경 — 332필지에 담긴 일상

1912년 효제동의 숫자를 표로 정리하면 이래. 한눈에 보면 이 동네의 성격이 또렷하게 드러나.

토지 유형

필지 수

면적(㎡)

비율

대지 (주거)

206필지

31,031㎡

36.6%

밭 (경작지)

124필지

50,787㎡

59.9%

잡종지

2필지

2,882㎡

3.4%

국유지

6필지

기록 있음

합계

332필지

84,701㎡

100%

이 표를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 싶지 않아? 필지 수는 대지가 더 많아. 206 대 124. 그런데 면적을 보면 밭이 50,787㎡로 압도적으로 넓어. 대지 전체 31,031㎡의 거의 두 배야. 이 말은 곧, 효제동의 공간 대부분이 경작지였다는 뜻이야. 집들은 상대적으로 작고 좁게 모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넓은 밭이 펼쳐져 있었던 거야.

문화재 발굴 조사 관점에서 이 구조는 굉장히 중요한 시그널이야. 생활유구와 농경유구가 같은 층위에서 동시에 확인될 수 있는 조건이거든. 우물, 도랑, 밭고랑의 흔적, 씨앗이나 곡물 흔적, 농기구 파편 같은 것들이 이 밭 구역에서 나올 수 있어. 효제동은 이 지점에서 단순한 주거 유적 이상의 가치를 갖는 지역이야.

생활공간과 경작공간이 분리되지 않은 동네. 그게 바로 1912년 효제동의 본질이야.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복합 구조의 지역은 조사 우선순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어.


CHAPTER 03

집이 있다는 건 삶이 있다는 것 — 대지 206필지의 의미



206필지의 대지. 필지당 평균 면적으로 계산하면 약 150㎡, 45평 정도야. 요즘 기준으로도 작은 편이지. 이 작은 집들이 206채나 모여 있었어. 그 안에 부엌이 있고, 우물이 있고, 마당이 있고, 가족의 시간이 쌓여 있었던 거야.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대지 비율이 높다는 건 아주 명확한 신호야. 생활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거든. 도자기 조각, 생활 토기, 우물의 석조 구조, 배수로 흔적, 아궁이 터, 온돌의 구들장. 이런 것들이 한 필지 안에서도 여러 개가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아. 집이라는 공간이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동안 계속 쓰이면서 켜켜이 층위가 쌓이기 때문이야.

특히 효제동처럼 다양한 성씨가 섞여 살던 동네는 계층이 단일하지 않았어. 양반 계층의 집도 있었을 것이고, 중인이나 평민 계층의 집도 섞여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그 말은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도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야. 청자나 백자 같은 고급 도자류부터 일상적인 옹기류까지, 다양한 층위의 생활상이 한꺼번에 나올 수 있어.

서울 도심 발굴조사에서 이렇게 다양한 계층의 생활유구가 한 구역에서 나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아. 효제동 대지 206필지는 그런 의미에서 굉장히 풍부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CHAPTER 04

밭이 더 많았던 동네 — 도시와 농촌의 경계

효제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숫자는 단연 밭이야. 124필지, 50,787㎡. 이 숫자 앞에 서면 잠깐 멈추게 돼. 도심 한복판에서 이 정도 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는 게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되거든.

1912년 효제동은 '도시 속 농촌'이었어. 종로라는 서울의 심장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은 자기 집 옆 밭에서 작물을 키우며 살았어. 이 공간 구조가 말해주는 건 명확해. 이 시기 서울은 도시화가 완성된 공간이 아니었다는 거야. 도시의 외형을 갖추면서도, 농촌의 생활 방식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어.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런 경작지 흔적은 매우 중요한 조사 대상이야. 밭고랑의 방향과 간격, 관개를 위한 수로 흔적, 작물과 관련된 씨앗 유체, 농기구 파편 같은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거든. 실제로 서울 외곽 지역 발굴조사에서는 이런 농경 관련 유구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어. 도심 지역에서 이 정도 규모의 경작지 흔적이 확인된다면, 그건 매우 드문 사례가 될 거야.

게다가 이 경작지와 주거지가 맞닿아 있다는 구조 자체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확장됐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야. 어디까지가 도시였고 어디서부터 농촌이었는지, 그 경계의 실제 모습이 효제동의 124필지 밭 안에 담겨 있어.

밭 50,787㎡는 단순한 경작지가 아니야. 서울이 도시가 되기 직전, 그 마지막 농촌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공간이야. 문화재 발굴기관이 이 지역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CHAPTER 05

잡종지와 국유지가 말해주는 숨은 행정의 흔적

효제동의 332필지 중에 잡종지가 2필지, 국유지가 6필지 있었어. 숫자는 작아. 그런데 이 작은 숫자들이 품고 있는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커.

잡종지라는 분류는 특정 용도로 정해지지 않은 땅이야. 이 시기에 잡종지가 생긴다는 건, 동네 안에 도로나 공공 목적의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어떤 길이 생겼거나, 물이 흐르는 도랑이 정비됐거나, 공동으로 쓰는 공간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있어. 이건 단순히 땅의 용도 분류가 아니라, 동네가 근대적 행정 체계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야.

국유지 6필지는 더 명확해. 국가가 이 동네 안에 소유권을 가진 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거든. 이건 효제동이 단순히 개인들의 사적 공간으로만 구성된 동네가 아니었음을 말해줘. 공적인 공간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고, 훗날 도시계획의 씨앗이 되는 구조가 이 시기부터 천천히 형성되고 있었어.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국유지와 잡종지는 흥미로운 조사 대상이야. 공공 목적으로 쓰인 공간은 사용 흔적이 다양하게 남을 수 있거든. 도로면의 판석, 하수 처리 시설, 건물 기단, 담장 기초 같은 것들이 이 구역에서 나올 수 있어.


문헌 기초조사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


CHAPTER 06

성씨로 본 효제동 — 누가 이 동네를 살았을까

데이터는 토지만 보여주는 게 아니야. 사람도 보여줘. 1912년 효제동의 소유자 성씨 분포를 보면, 이 동네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나.

성씨

소유 필지 수

순위

이씨

73필지

1위

김씨

71필지

2위

박씨

21필지

3위

최씨

15필지

4위

정씨

14필지

5위

안씨

10필지

6위

기타 한국인

다수

미국인

16필지

외국인 최다

일본인

1필지

이씨 73필지, 김씨 71필지. 이 두 성씨가 전체 소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렇다고 이 동네를 독점한 건 아니야. 박씨, 최씨, 정씨, 안씨까지 다양한 성씨가 비교적 고르게 분산돼 있어. 특정 가문이 동네를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집안이 섞여 살아간 진짜 생활 공동체였다는 뜻이야.

고고학자들은 이 성씨 분포 데이터를 '취락 구조 해석'의 기초 자료로 활용해. 누가 어디에 살았는지, 집들이 어떻게 배치됐는지, 혈연 관계가 공간 배치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추론하는 데 이 데이터가 핵심 근거가 돼. 단순한 명단이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를 읽는 도구야.

이씨 73필지, 김씨 71필지. 단 2필지 차이야. 이 두 성씨가 팽팽하게 공존했던 동네. 경쟁인지 공생인지 모를 그 긴장감이, 효제동의 골목 곳곳에 배어 있었을 거야.


CHAPTER 07

미국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가 남긴 시대의 그림자



효제동에는 미국인 소유 토지가 16필지 있었어. 일본인 소유 토지는 1필지. 이 숫자를 처음 보면 좀 어리둥절할 수 있어. 1912년 종로구 효제동에 미국인? 그것도 16필지나?

이걸 이해하려면 그 시대 배경을 알아야 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들은 서울 곳곳에 학교와 병원과 교회를 세웠어.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병원, 정동 일대의 여러 종교 시설들이 다 그 시대의 산물이야. 효제동 인근에도 이런 맥락의 외국인 소유 부지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아.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나 의료 시설과 관련된 땅이었을 수 있어.

그리고 일본인 소유 1필지. 훈정동에 비하면 훨씬 적은 숫자야.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직후 작성된 이 기록에 이미 일본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건, 식민지 질서가 효제동 안으로도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런 외국인 소유 필지는 다른 시선으로 접근해야 해. 서양식 건물 구조가 적용됐을 가능성이 있고, 그에 따른 건축 재료나 유물의 성격이 한국 전통 주거지와 완전히 다를 수 있거든. 벽돌, 유리, 금속 부재, 수입 도자기 같은 근대 물질 문화의 흔적이 나올 수 있어. 이건 서울이 어떻게 근대화됐는지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야.


CHAPTER 08

오늘의 효제동에서 1912년을 상상하다

지금 당장 효제동으로 나가봐. 걸어가다 보면 낡은 빌라와 새 카페가 섞여 있고, 아스팔트 도로가 곳곳에 깔려 있어. 1912년의 흔적을 육안으로 찾기는 거의 불가능해. 집들은 허물어지고, 밭은 도로가 됐고, 우물은 묻혔어. 100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공간을 바꿔놨어.

그런데 땅속은 달라. 지표면이 아무리 바뀌어도, 지하에는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어. 지표조사 단계에서 도로 공사나 건물 기초 공사로 잘린 단면을 보면, 층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있어. 현대의 콘크리트 층 아래에 일제강점기의 벽돌과 흙이 있고, 그 아래에 조선 시대의 기와와 토기가 있어. 이 층위들이 겹쳐 있는 구조가 바로 서울이라는 도시의 진짜 단면이야.



효제동의 332필지는 지금 지도 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하지만 그 아래는 달라. 206필지의 집터가 남긴 우물과 초석, 124필지의 밭이 남긴 고랑과 수로, 미국인이 세운 건물의 기초, 국유지에 놓였던 도로의 돌판. 이것들이 아직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을 문화재 발굴기관과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은 배제하지 않아. 오히려 이 기초 데이터를 근거로, 조사 가치가 높은 구역으로 평가하지.

발굴조사라는 건, 땅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작업이야. 1912년 효제동의 구조를 알고 나면, 지표조사 한 번도, 시굴조사 트렌치 하나도 전혀 다르게 보여. 여긴 그냥 동네가 아니야. 서울이 도시가 되기 직전의 마지막 숨결이 남아 있는 장소야.


CHAPTER 09

기록을 읽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남겨야 할 것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제 효제동은 단순한 지명이 아닐 거야.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이씨와 김씨와 박씨가 살았고, 미국인 선교사의 땅이 있었고, 아침이면 밭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었던 공간. 그게 1912년 효제동이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이런 기초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발굴조사는 땅을 파는 일이 아니야. 땅속에 잠든 기억을 꺼내서, 그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야. 그리고 그 번역의 첫 페이지가 바로 이런 기초 기록 분석이야.

1912년 한 장의 토지조사부가 지금 이 순간 문화재 지표조사 계획서의 기초 자료가 된다는 사실. 100년 전의 숫자가 오늘 땅속 어디를 파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 된다는 사실. 이게 역사 기록이 살아 있다는 증거야.

평가 항목

효제동 현황

조사 잠재력

주거 밀집도

206필지 / 31,031㎡

★★★★★

농경지 규모

124필지 / 50,787㎡

★★★★★

외국인 소유지 흔적

미국인 16필지

★★★★☆

공공·국유지 존재

국유지 6필지

★★★☆☆

복합 층위 가능성

조선~근대 이중 구조

★★★★★

역사문헌 기록 풍부도

1912년 토지조사부 보존

★★★★★

이 기록을 읽는 우리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차례야. 효제동의 땅속에 아직 꺼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어.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기다리고 있어.

효제동은 더 이상 지도 위의 작은 이름이 아니야

집과 밭이 나란히 있었던 그 동네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천 명의 서울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이 남긴 기억이 아직 땅속에 있어. 우물 하나, 기와 조각 하나, 밭고랑 하나.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야. 그리고 이 글을 읽은 너는, 그 기억을 아는 사람이 됐어.

서울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땅은, 절대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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