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훈정동 토지로 읽는 서울의 시간 - 사사지 하나가 말해주는 도시의 기억
-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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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월 20일
서울 문화유산 심층 분석
1912년 훈정동 땅속에잠든 서울의 비밀
한 장의 지적도가 열어준 도시의 기억 — 문화재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숫자로 다시 읽는 종로구 훈정동 이야기
129총 필지 수
199,865㎡전체 면적
185,369㎡사사지 면적
92.7%사사지 비율
지금 네가 걷는 그 골목 아래, 아무도 모르는 시간이 묻혀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거야. 훈정동이라는 이름 석 자가 단순한 주소가 아니라, 서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지워지고, 어떻게 다시 발굴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이 이야기는 1912년 한 장의 지적도에서 시작된다.
CHAPTER 01
한 장의 지적도에서 시작된 질문

1912년이라는 숫자를 들으면 뭐가 먼저 떠오르나. 아마 대부분은 일제강점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거야. 맞아. 그 시절이 맞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어두운 역사 안에서도 놀랍도록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록 하나에서 시작한다. 바로 토지조사부, 쉽게 말하면 지적도야.
1912년 종로구 훈정동의 토지조사부를 펼치면 첫 눈에 들어오는 건 숫자다. 총 129필지, 면적으로는 199,865㎡. 그냥 읽으면 그냥 데이터처럼 보이지만, 이 숫자를 조금만 뜯어보면 당시 훈정동이라는 동네의 성격이 아주 또렷하게 드러난다.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었어. 이 동네는 다른 종로 일대의 동네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사사지'라는 토지 유형 때문이다.
사사지. 사찰과 종교 시설의 부지를 뜻하는 이 단어 하나가, 훈정동의 모든 이야기를 결정지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기록들은 문화재 발굴기관과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왜냐고? 그 이유를 지금부터 하나씩 풀어볼게.
CHAPTER 02
1912년 훈정동,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해지는 풍경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1912년 훈정동의 토지 구성표를 보는 순간, 이 동네의 정체가 한 번에 드러난다. 아래 표를 보자.
토지 유형 | 필지 수 | 면적(㎡) | 비율 |
대지 (주거) | 127필지 | 14,049㎡ | 7.0% |
사사지 (종교·사찰) | 1필지 | 185,369㎡ | 92.7% |
밭 | 1필지 | 446㎡ | 0.2% |
합계 | 129필지 | 199,865㎡ | 100% |
이 표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나. 필지 수로 따지면 대지가 127필지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 실제 면적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단 1필지의 사사지가 전체 면적의 92.7%를 차지하고 있어. 이건 단순히 '사찰이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 동네의 공간 구조 자체가 사사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는 말이야.
대지 127필지의 면적은 고작 14,049㎡. 필지 하나당 평균 약 111㎡, 대략 34평 정도야. 요즘 기준으로 봐도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풍경이었을 거야. 그 작은 집들이 185,369㎡짜리 사사지 하나를 빙 둘러싸고 살았다는 거지. 상상이 돼? 거대한 사찰 공간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오밀조밀 모여든 집들. 이 공간 구성은 문화재 발굴 기관이 조사 우선순위를 정할 때 핵심 변수가 된다.

대규모 사사지는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야. 그 주변으로 생활, 교육, 의례, 장례 문화까지 겹겹이 얽혀 있었어. 그게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지역에 높은 점수를 주는 이유야.
CHAPTER 03
집은 작고, 사사지는 압도적으로 컸다
생각해봐. 하루하루 생계를 꾸려가던 사람들이 거대한 사찰 공간 옆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야. 사찰은 그 시대에 교육 기능도 했고, 의료 기능도 했고, 장례와 제의 문화를 중심으로 마을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어. 그 공간 안팎에서 수백 년에 걸친 서울 사람들의 삶이 쌓였다는 말이야.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이런 구조의 동네가 얼마나 흥미로운 대상인지 아마 일반인은 잘 모를 거야. 지표조사란, 땅을 파기 전에 지표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문화재 흔적들을 먼저 살피는 작업이야. 기와편, 도자기 파편, 석재 흔적 같은 것들이 지면 위에 노출되어 있거나 표토층 바로 밑에 있을 수 있거든. 훈정동처럼 대규모 사사지가 존재했던 곳은 이 단계에서 이미 많은 정보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다음 단계가 시굴조사야. 지표조사에서 유물이 확인되거나 가능성이 높은 구역을 골라서 좁은 구덩이를 파보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발굴조사. 본격적으로 땅을 파서 유구와 유물을 기록하고 수습하는 과정이야.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발굴조사
서울의 다른 사사지 인근 발굴 사례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게 있어. 우물터, 담장의 기초, 기와편, 소규모 건물지의 초석들이야. 이런 생활유구와 종교유구가 같은 층위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아. 훈정동이 바로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야. 아직 제대로 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말 그대로 잠들어 있는 공간이라는 거지.
성공 사례 | 서울 도심 사사지 발굴
청진동·운니동 사례: 사사지 인근에서 조선 시대 생활유구 확인
CHAPTER 04
훈정동을 소유했던 사람들 — 성씨로 본 토지 구조

데이터는 땅의 모양만 보여주는 게 아니야. 누가 살았는지도 알려줘. 1912년 훈정동의 토지 소유를 성씨별로 분류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징 |
김씨 | 27필지 | 최다 소유 |
이씨 | 22필지 | 2위 |
박씨 | 11필지 | 3위 |
기타 한국인 성씨 | 64필지 | 소규모 분산 소유 |
법인 | 1필지 | 사사지 |
일본인 | 4필지 | 근대기 유입 |
김씨 27필지, 이씨 22필지, 박씨 11필지. 보면 어때. 특정 가문이 이 동네를 독점한 게 아니야. 다양한 성씨들이 각자 크지 않은 땅을 나눠 가지고, 그 사사지를 중심으로 함께 살아갔던 거야. 이건 단순한 토지 분포 데이터가 아니야. 이 동네가 특정 세력이 지배하는 폐쇄적인 공간이 아니라, 열린 생활 공동체였다는 증거야.
문화재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는 이런 데이터를 '취락 구조 해석'의 근거로 활용해. 성씨 분포를 보면 어떤 가족 단위가 어떤 방식으로 땅을 관리했는지, 마을의 계층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거든. 즉, 땅속 유물을 해석할 때 이 소유 구조 데이터가 배경 맥락이 되는 거야. 고고학과 역사 기록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야.
성씨 분포는 단순한 인구 통계가 아니야. 누가 어디에 살고,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마을의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지도야.
CHAPTER 05
법인과 일본인 소유 토지가 의미하는 것
자, 여기서 이야기가 좀 더 복잡해져. 1912년 훈정동 129필지 중에서 법인 소유 1필지, 일본인 소유 4필지가 있어.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일 수 있어. 고작 5필지잖아. 그런데 1912년이라는 시점을 같이 생각해봐.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진 건 1910년이야. 훈정동 토지조사부가 작성되던 그 시점은, 이미 조선의 토지가 근대적 소유권 개념으로 재편되던 한가운데였어. 그 과정에서 일본인의 이름이 지적도에 새겨진다는 건, 전통 공간 속으로 식민지 질서가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신호야. 조용한 침투, 그 첫 흔적이 바로 이 4필지야.

역사적으로 이런 패턴은 반복됐어. 사사지 인근의 일본인 소유 토지는 이후 도로 개설, 건물 철거, 공간 재편의 기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거든. 훈정동 역시 그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그 흔적들이 지금 땅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 있어. 파괴된 건물의 기초, 뜯겨나간 담장의 흔적, 그 위에 덮인 근대의 층위들.
이런 이유로 훈정동은 단순한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를 넘어서, 근대 도시사와 식민지기 공간 변동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아주 드문 사례 지역이야. 문화재 발굴기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동네는 조선 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도시 변화의 단면을 하나의 지역에서 모두 볼 수 있는 '교과서 같은 장소'라고 할 수 있어.
성공 사례 | 근대 이행기 발굴 성과
종로 피맛골 발굴: 조선~근대 공간 변화의 다층 기록
CHAPTER 06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훈정동의 잠재력

자, 이제 실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훈정동이 실제로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 올라온다면, 어떤 평가를 받을까. 지표조사 단계에서 조사단이 가장 먼저 보는 게 바로 역사 문헌 자료야. 그 지역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거든. 훈정동은 이 부분에서 이미 탄탄한 기초를 갖추고 있어.
첫째, 대규모 사사지의 존재. 185,369㎡라는 어마어마한 면적의 사찰 공간이 이 동네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건, 이 지역에서 종교 유구가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야. 사찰 건물의 초석, 석탑의 기단부, 청동 불구류, 기와 가마의 흔적 같은 것들이 나올 수 있어.
둘째, 소규모 주거지의 밀집. 127필지에 달하는 주거 대지는 생활유구의 보고야. 아궁이 흔적, 온돌 구조, 우물, 소형 창고지, 수로 흔적 같은 것들이 이 범위 안에서 확인될 수 있어. 생활사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이 데이터는 굉장히 중요해.
셋째, 근대기 소유 변동 흔적. 일본인 소유 토지 4필지와 법인 소유 1필지는, 이 지역에서 근대 이행기의 건축 행위나 공간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이런 구역은 조선 시대 층위 위에 근대기 층위가 덮여 있는 복합 유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에서, 훈정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보기 드문 지역이야. 아직 땅속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잠든 기록들이 그 아래 있다.
실제로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에서 수집하는 1912년 토지조사부 기초 데이터는 바로 이런 분석을 위한 선행 자료야. 발굴 전에 어디를, 왜 파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이 기록이 직접 활용되는 거야. 이게 바로 100년 전 지적도가 지금도 살아 있는 문서인 이유야.
평가 항목 | 훈정동 현황 | 조사 잠재력 |
대규모 사사지 | 185,369㎡ (92.7%) | ★★★★★ |
주거지 밀집도 | 127필지 / 14,049㎡ | ★★★★☆ |
소유 변동 복잡성 | 일본인·법인 5필지 | ★★★★☆ |
역사문헌 기록 풍부도 | 1912년 토지조사부 보존 | ★★★★★ |
복합 층위 가능성 | 조선~근대 이중 구조 | ★★★★★ |
CHAPTER 07
오늘의 훈정동,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지금의 훈정동을 걸어가 봐. 아마 1912년의 흔적을 육안으로 찾기는 어려울 거야.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간은 완전히 바뀌었어. 도로가 생기고, 건물이 들어서고, 또 허물어지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것들이 쌓이는 사이클이 반복됐거든. 그게 도시라는 공간의 숙명이야.
그런데 땅속은 달라. 공간이 바뀌고 사람이 떠나도, 땅속에는 기억이 남아. 기와 한 조각, 우물의 돌, 누군가의 밥그릇 파편. 이 것들이 아직 훈정동 지하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그리고 문화재 발굴기관이 하는 일이 바로 그 기억을 꺼내는 거야.
문화재 발굴은 땅을 파는 행위가 아니야. 도시가 스스로의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이야. 서울이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지, 그 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야. 그리고 그 작업의 출발점이 항상 이런 기초 데이터야. 1912년의 지적도 한 장이, 오늘의 발굴 계획서 한 줄이 되는 거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런 기초 조사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쌓아가고 있어. 종로구 훈정동을 시작으로, 서울 25개 구 전체를 대상으로 한 지역별 문화유산 기초조사가 진행 중이야. 이 데이터들이 쌓일수록, 서울이라는 도시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능력은 더 깊어져.
이게 왜 너한테도 중요한지 알아? 지금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매일 걷는 골목, 내가 밥 먹는 식당 아래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어.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냥 생겨난 게 아니야.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만들어진 곳이야. 그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이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어.
훈정동은 더 이상 지도 속 작은 이름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됐어.
1912년의 숫자들이 오늘도 말을 걸고 있어. 129필지, 199,865㎡, 그리고 92.7%의 사사지.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천 명의 서울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남긴 기억을 꺼내는 일. 그게 문화재 발굴이고, 문화재 지표조사야.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 여기 이 글을 읽는 너도 이어받을 수 있어.
서울은 아직 다 말하지 않았다. 땅은 기억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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