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은평구 구산동
- 5월 25일
- 6분 분량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기초자료 · 은평구 구산동
거북이 등 같은 산자락에관청이 21채나 들어서던 날 —1912년 구산동 국유지 21필지의 이야기
21필지, 19,900㎡. 대지와 밭. 서울 서북쪽 끝, 거북산 기슭의 이 작은 동네에 국가 건물 12채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비밀을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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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거북산 아래 마을, 구산동(龜山洞)의 기억
21필지 19,900㎡ — 두 가지 지목이 만드는 이야기
대지 12,363㎡ — 12필지에 건물이 빼곡했던 이유
밭 7,537㎡ — 9필지 농경지가 품은 역사
봉현봉수와 구산동 — 국경 너머 소식을 전하던 땅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기록이 갖는 의미
성공 사례 — 은평구 땅이 꺼낸 역사들
지금 이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서울의 서쪽 끝, 거북이 등처럼 생긴 산 아래 작은 마을. 그런데 이 조용한 동네에 1912년 국가 소유 건물이 12필지나 들어서 있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은평구 구산동(龜山洞). 거북산 자락에 위치한 데서 이름이 붙은 이 동네는, 지금은 6호선 구산역이 있는 은평구의 조용한 주거 지역입니다. 하지만 1912년의 구산동은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맞닿는 지점에서 무언가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21필지 19,900㎡의 국유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대지 12필지와 밭 9필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드립니다.

1. 거북산 아래 마을, 구산동(龜山洞)의 기억
구산동(龜山洞)이라는 이름은 거북이 산(龜山) 동네라는 뜻입니다. 고양시와의 경계를 이루는 산세가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산에 거북 받침의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가 있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인조(仁祖). 조선의 16대 왕, 병자호란을 겪은 그 임금의 별서(別墅, 별장) 터가 이 동네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구산동의 역사적 깊이를 단번에 보여줍니다.
구산동의 행정 변천을 따라가면 이 땅의 역사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불광천 동쪽 지역만 한성부 성저십리에 속했는데, 구산동은 불광천 서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구산동도 한성부 성저십리의 연은방(延恩坊) 영역으로 편입됩니다. 즉 구산동은 조선 후기에 비로소 서울의 성저십리 안으로 들어온 동네였습니다.
조선 초기
불광천 서쪽 — 성저십리 밖 경기 지역. 고양 방면 농촌 마을
조선 후기
한성부 성저십리 북부 연은방(延恩坊) 편입. 서울 경계 안으로 들어옴
1911년
경성부 은평면으로 통합 — 연은방·상평방이 하나로 묶임
1912년
토지대장 기준 — 국유지 21필지 19,900㎡ 기록
1914년
일제 행정 개편 —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산리로 변경
1949년
서울 서대문구 편입 — 비로소 서울 주소 획득
1979년
서대문구에서 은평구 분구 — 현재의 은평구 구산동 완성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구산동 뒤에 있는 산줄기의 봉현(蜂峴) 서쪽에 봉현봉수(蜂峴烽燧)가 있었습니다. 봉수(烽燧)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망의 핵심인 봉화대입니다. 고봉성산에서 오는 봉화 신호를 받아 서울 도성으로 전달하는 봉수가 구산동 산자락에 있었다는 사실. 이것이 1912년 구산동에 왜 그토록 많은 국유 대지가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2. 21필지 19,900㎡ — 두 가지 지목이 만드는 이야기
1912년 구산동의 국유지는 21필지, 19,900㎡입니다. 지목은 대지와 밭 두 가지뿐입니다. 앞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보면 이 구성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임야도, 수도용지도, 철도용지도, 분묘지도 없습니다. 오직 건물 부지와 농경지만 있습니다.
구산동 국유지 전체19,900㎡21필지 · 2가지 지목 · 대지 + 밭
대지 (건물 부지)12,363㎡12필지 · 62.1%
밭 (농경지)7,537㎡9필지 · 37.9%
대지
12,363㎡ (62.1%)
밭
7,537㎡ (37.9%)
대지가 전체의 62.1%를 차지합니다. 12필지에 12,363㎡. 이것이 이번 기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냥 농촌 마을인 것 같은 이 동네에, 국가 소유 건물 부지가 12곳이나 흩어져 있었다는 것. 이유 없이 그럴 리는 없습니다.
3. 대지 12,363㎡ — 12필지에 건물이 빼곡했던 이유
12필지 12,363㎡의 국유 대지. 평균 1,030㎡짜리 국유 건물 부지가 12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규모 단일 시설이 아니라 작은 관청 건물들이 마을 곳곳에 분산되어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필지 수
12필지
국유 대지 · 전체의 57%
평균 필지당 면적
1,030㎡
약 311평 · 소규모 관청 크기
1912년 구산동 일대는 경성부 은평면의 변두리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고양 방면의 경계 지점이자, 평양과 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중요한 교통로 위에 놓여 있던 곳입니다. 은평 지역은 예로부터 "평양·개성에서 서울로 오자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목에 역참(驛站)과 파발(擺撥) 관련 시설이 있었습니다. 연신내 일대의 연서역(延曙驛), 구파발의 파발 시설이 대표적입니다. 구산동의 12필지 국유 대지는 이러한 교통로 관련 국가 시설들, 즉 역참 부속 건물, 관아 별관, 봉수 관련 시설 등이 분산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한 봉현봉수와의 연관성을 생각해보면, 봉수대를 운영하는 봉군(烽軍)들이 거처하던 막사와 창고, 그리고 관리 건물들이 구산동 대지 12필지에 분산되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봉수는 단순히 불을 피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24시간 감시 인원이 상주해야 하는 국가 군사 시설이었기 때문입니다.
12필지라는 많은 수의 국유 대지가 한 동네에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단순한 농촌이 아니라 국가가 다수의 시설을 운영하던 기능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각 건물의 위치와 구조를 밝히는 것이 문화재 발굴조사의 핵심 과제입니다.
문화재 조사 관점에서 본 국유 대지 12필지
12곳에 분산된 국유 대지는 각각 다른 시대, 다른 기능의 건물 유구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봉수 관련 시설이라면 군사 관련 유물(화기 부품, 신호 장비, 군영 도기)이 출토될 수 있고, 역참·파발 관련 시설이라면 말 관련 유물(마구류, 편자, 여물통)이나 여행자 관련 유물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12필지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독립적인 조사 대상입니다.

4. 밭 7,537㎡ — 9필지 농경지가 품은 역사
9필지 7,537㎡의 국유 밭. 전체의 37.9%입니다. 국유 밭이 9필지나 된다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이 밭들은 관청에 딸린 부속 경작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 역참에는 역전(驛田)이라 하여 역참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부속 농지가 있었고, 봉수대에도 봉수군의 식량을 자급하기 위한 경작지가 배정되어 있었습니다.
9필지가 서로 다른 위치에 흩어져 있었다면, 각 관청 건물이나 시설에 딸린 소규모 텃밭의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평균 필지당 837㎡, 약 253평의 작은 밭들. 이 크기는 자급자족을 위한 채소밭이나 소규모 곡물 재배지로 적합한 규모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밭 지층은 중요한 고고학적 정보를 제공합니다. 밭은 정기적으로 경작되어 윗 지층이 교란되지만, 깊은 층위에는 경작 이전 시대의 생활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밭고랑과 두렁의 패턴이 지층에 남아 있으면 당시 농업 방식과 토지 이용 형태를 직접 알 수 있습니다.

5. 봉현봉수와 구산동 — 국경 너머 소식을 전하던 땅
구산동을 이야기할 때 봉현봉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봉수(烽燧)는 조선시대 군사 통신의 핵심이었습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이 시스템은 전국 5개 노선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각 노선마다 수십 개의 봉수대가 릴레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봉현봉수는 구산동 뒤편 산줄기의 봉현 서쪽에 있었습니다. 고봉성산(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방면)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 다음 봉수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신호 전달 체계의 서쪽 끝에는 중국 국경 방면에서 오는 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즉 구산동의 봉수는 한반도 서북쪽 변방의 상황을 서울 도성에 전달하는 중요한 고리였던 것입니다.
봉수대는 단순한 불 피우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봉수군(烽燧軍) 수십 명이 교대로 상주해야 했고, 그들의 숙소, 창고, 우물, 부속 시설이 함께 있었습니다. 구산동의 12필지 국유 대지 중 일부는 이 봉수대 관련 시설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봉수대 유구는 성곽, 석축, 봉수군 막사 터, 연료 저장 구덩이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 문화유산에 해당합니다.
봉현봉수 유구는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1912년 국유 대지 12필지의 분포를 분석함으로써 봉수 관련 시설의 위치를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는 것이 구산동 문화재 조사의 핵심 과제입니다.

6.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기록이 갖는 의미
1912년 구산동 국유지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갖는 의미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대지 12필지와 밭 9필지라는 두 가지 지목이 각각 다른 조사 방향을 제시합니다.
대지 12필지는 각각 독립적인 건물 유구 조사 대상입니다. 12개 필지의 위치를 특정하고, 각 필지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해 기와편, 도기류, 석재 등 건물 관련 유물의 분포를 파악하는 것이 첫 단계입니다. 그다음 시굴조사를 통해 건물 기초 구조물의 잔존 여부를 확인합니다. 봉수 관련 시설이라면 군사 유물이, 역참 관련 시설이라면 말 관련 유물이나 교통 관련 유물이 주요 발견 대상입니다.
밭 9필지는 농업 고고학적 접근이 효과적입니다. 밭고랑 패턴의 잔존 여부, 토양 성분 분석을 통한 작물 재배 흔적 확인, 그리고 깊은 지층의 이전 시대 유적 여부를 순서대로 확인합니다. 국유 밭이 봉수군의 자급 경작지였다면, 봉수 관련 생활유물(도기, 취사 도구)이 밭 지층에서도 출토될 수 있습니다.
seoulheritage.org의 은평구 지역조사 시리즈에서 진관외동, 진관동에 이어 구산동 자료가 추가되면, 은평구 전체 역사 지층 지도가 더욱 촘촘해집니다. 특히 은평구는 서울의 다른 지역과 달리 '서울로 편입된 역사가 짧은' 지역이라는 특성 덕분에 전통 경기도 농촌 지역의 역사 유적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7. 성공 사례 — 은평구 땅이 꺼낸 역사들
성공 사례 1
은평구 진관외동 기초조사 — 잊혀진 땅의 기록
seoulheritage.org가 공개한 은평구 진관외동 1912년 기초조사는 "잊혀진 땅의 기록"이라는 제목을 달 만큼 은평구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 사례입니다. 진관사, 북한산 자락의 역사 지층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보여준 이 조사는 구산동 기록 분석의 중요한 선행 연구가 됩니다.
성공 사례 2
은평구 진관동 시간 여행 — 역참 관련 유적의 발견
seoulheritage.org의 은평구 진관동 조사에서는 조선시대 교통로와 관련된 역사적 흔적들이 확인되었습니다. 평양·개성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던 은평 일대의 역참 관련 유적이 주목받았습니다. 구산동의 12필지 국유 대지도 같은 교통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성공 사례 3
은평 불광동 기초조사 — 봉수와 사찰의 흔적
seoulheritage.org의 은평구 불광동 1912년 조사에서도 사찰 관련 지명(불광동의 유래가 불광사)과 군사 시설 관련 흔적이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봉수대·역참·사찰이 은평구 전역에 걸쳐 복합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이 사례는, 구산동 봉현봉수 연구의 중요한 비교 대상이 됩니다.

8. 지금 이 기록이 우리에게 묻는 것
21필지, 19,900㎡, 대지와 밭. 이 기록을 읽고 나면 1912년 구산동이 어떤 곳이었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봉수대의 불빛이 산 너머로 이어지고, 역참의 말발굽 소리가 길목을 울리고, 국가 관리들이 소박한 건물에서 서울과 국경을 연결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그 조용한 마을.
첫째, 12필지의 국유 대지는 구산동 일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개발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근거입니다. 분산된 12개 필지 각각이 독립적인 문화재 조사 대상이며, 어느 하나를 빠뜨리더라도 역사의 일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습니다.
둘째, 봉현봉수 유구의 위치 비정을 위한 핵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봉현봉수를 추적하는 데 1912년 국유 대지 12필지의 분포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셋째, 이 기록은 은평구가 단순한 서울 외곽 주거 지역이 아니라 조선시대부터 국가 군사·교통 인프라의 핵심 축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거북이 등 같은 산 아래 작은 마을이 한반도의 안위를 지키는 봉화 신호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역사가 지금도 구산동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거북이 등 같은 산 아래,봉화 신호가 산 너머로 이어지고,말발굽 소리가 길목을 울리던 1912년 구산동.21필지 19,900㎡의 기록이 그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12필지의 관청 건물 터, 9필지의 자급 농경지.봉현봉수의 불빛과 역참의 말 울음소리가 이 땅 위에 쌓인 기억들입니다.기록 한 장을 제대로 읽는 것이그 기억에 귀 기울이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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