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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신공덕동의 1912년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 2025년 5월 29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지금 네가 걷는 신공덕동, 100년 전엔 전체의 3분의 1이 무덤이었다

1912년 서대문구 신공덕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분묘·밭·일본인 소유지의 이야기

신공덕동을 걷다가 딱 한 번만 멈춰봐.


지금 네 발 밑 이 땅,


100년 전엔 51,259㎡의 거대한 무덤이 있었고,


일본인 소유지가 20필지나 파고들었으며,


밭이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그 위에 지금 이 빌딩들이 서 있다.



목차

  1. 뜻밖의 시간여행, 1912년의 신공덕동

  2. 신공덕동의 집들, 100년 전 그곳의 풍경

  3. 거대한 무덤, 신공덕동을 뒤덮다

  4. 잡종지와 밭이 말하는 신공덕동의 생활상

  5. 성씨별 땅 소유 현황과 그 숨겨진 이야기

  6. 국유지와 일본인 땅의 숨은 의미

  7. 오늘날의 신공덕동, 과거와의 연결점


신공덕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뭐가 떠오르는가. 서대문구에 위치한 이 동네는 공덕역 근처, 마포와 서대문 사이 어딘가의 평범한 주거·상업 지역이다. 화려한 핫플레이스도 아니고, 역사 명소라는 인상도 없다. 그런데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시선을 멈추게 만든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에 따르면, 신공덕동 전체 면적 153,329㎡ 중 무려 51,259㎡가 분묘지였다. 전체의 33%, 즉 3분의 1이 무덤이었다. 지금 이 동네를 걷는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지지 않는가.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보자.


1. 뜻밖의 시간여행, 1912년의 신공덕동

1912년 서대문구 신공덕동은 총 150필지, 면적 153,329㎡로 이루어진 동네였다. 지금의 신공덕동이 고층 빌딩과 빠르게 달리는 차들로 가득한 도심이라는 걸 생각하면, 110년 전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달랐을 거다.

당시 신공덕동은 서울 외곽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논도 거의 없었다. 밭이 중심이었고, 그 밭 사이로 집들이 들어서 있었으며, 그리고 무덤이 있었다. 아주 많은 무덤이. 그 구성이 신공덕동을 서울의 다른 동네들과 구별 짓는 가장 강렬한 특성이다.


2. 신공덕동의 집들, 100년 전 그곳의 풍경


1912년 신공덕동에는 대지가 104필지, 40,271㎡ 있었다. 전체 150필지 중 70%에 달하는 필지가 집터였다는 건 신공덕동이 농경지보다 주거 중심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필지 수는 많지만 면적이 40,271㎡로 상대적으로 좁다. 즉, 작은 집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는 밀집 주거 마을이었을 거다.

150필지

신공덕동 전체

104필지

대지 (40,271㎡)

44필지

밭 (106,499㎡)

분묘지

51,259㎡

20필지

일본인 소유

8필지

국유지

104필지의 집들. 초가지붕 아래 작은 마당이 있고, 그 마당 한쪽에 장독대가 줄지어 서 있었을 거다. 이웃집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목소리가 닿는 그 가까운 거리. 저녁이면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밥 짓는 연기가 신공덕동 전체를 감쌌을 거다. 지금 이 동네 어딘가에 오래된 골목이 남아 있다면, 그게 그 104필지의 기억일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 재층, 생활 도기 같은 유구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복원한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104필지에서 살았던 신공덕동 사람들의 하루하루가 다시 눈앞에 펼쳐질 수 있다.


3. 거대한 무덤, 신공덕동을 뒤덮다

이제 이 블로그의 핵심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됐다. 신공덕동 전체 면적 153,329㎡ 중 분묘지가 51,259㎡. 숫자만 보면 와닿지 않을 수 있으니 비율로 표현하면, 전체의 33.4%다. 신공덕동 땅 세 평 중 한 평이 무덤이었다는 뜻이다.

51,259㎡의 분묘지 — 서울에서 이 숫자가 의미하는 것

51,259㎡는 축구장 약 7개를 채울 수 있는 면적이다. 이 블로그 시리즈에서 소개한 서울 여러 동네 중 분묘지가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넘는 곳은 신공덕동이 유일하다. 이는 신공덕동이 조선 시대부터 서울 외곽의 장례 공간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특정 가문의 선산이거나, 여러 가문이 공동으로 사용한 공동 묘지였을 수 있다.

전체의 3분의 1이 무덤이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봐. 지금 신공덕동 도로를 걷다가 만나는 빌딩 하나 건너 하나 자리가 100년 전엔 조상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였다는 거다. 그 위에 도로가 깔리고, 건물이 올라갔다. 개발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무덤들이 어디로 갔는지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별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영역이다. 조선 시대 묘에서는 피장자의 신분과 생활상을 알려주는 유물들이 종종 나온다. 백자 제기, 동전, 비석 조각, 금속 장신구, 목관 흔적 같은 것들. 51,259㎡라는 광대한 분묘지에서 아직 조사되지 않은 구역이 남아 있다면, 그곳에 귀중한 역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개발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전체의 3분의 1이 무덤이었다. 신공덕동은 삶과 죽음이 나란히 공존하는 땅이었다."



4. 잡종지와 밭이 말하는 신공덕동의 생활상

1912년 신공덕동에는 밭이 44필지, 106,499㎡ 있었다. 집터 40,271㎡보다 훨씬 넓은 면적이 밭이었다. 신공덕동 사람들의 삶이 농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106,499㎡의 밭. 지금 신공덕동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당시 이 밭에서 배추·고추·콩·마늘이 자랐고 그게 이 동네 사람들의 식탁을 채웠다. 집이 104필지, 밭이 44필지라는 구성을 보면, 각 집마다 작은 텃밭을 가진 것도 있었겠고, 큰 밭을 따로 가진 경우도 있었을 거다.

잡종지도 있었다. 단 1필지, 971㎡로 규모는 작았지만, 이 작은 잡종지가 마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상상이 가능하다.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을 수도 있고, 장날마다 소를 묶어두던 공터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마을 어른들이 저녁이면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느티나무 아래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5. 성씨별 땅 소유 현황과 그 숨겨진 이야기

1912년 신공덕동 토지 기록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김씨로 21필지였다. 박씨와 조씨가 각각 14필지로 공동 2위, 최씨 12필지, 이씨 11필지 순이었다.

21필지

김씨

14필지

박씨

14필지

조씨

12필지

최씨

11필지

이씨

김씨 21필지. 이번 시리즈에서 소개한 다른 동네들과 비교하면 최다 성씨의 필지 수가 상당히 적다. 종암동 김씨는 31필지, 역촌동 김씨는 81필지였는데 신공덕동은 21필지가 최다다. 이건 신공덕동의 토지 소유가 특정 성씨 하나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가문에 고르게 분산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박씨와 조씨가 각각 14필지로 동률인 점도 흥미롭다. 두 가문이 마을에서 비슷한 영향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21·14·14·12·11로 이어지는 분포는 어느 한 가문이 독주하지 않는 비교적 평등한 토지 분포를 보여준다. 신공덕동이 특정 집성촌이 아니라 다양한 가문이 함께 모여 사는 열린 마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런 분산된 토지 분포는 다양한 가문의 유물이 혼재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정 성씨와 연결되는 기물이 여러 구역에서 나올 수 있고, 그 분포 패턴이 당시 마을의 공간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6. 국유지와 일본인 땅의 숨은 의미



1912년 신공덕동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두 항목이 있다. 국유지 8필지, 그리고 일본인 소유지 20필지.

일본인 소유지 20필지. 전체 150필지 중 13%가 넘는 땅이다. 이건 신공덕동이 일제강점기의 흐름 속에서 이미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아니라 직접 일본인 개인이 소유한 땅이었다는 점에서, 이 20필지는 일본인 거주자나 사업가들이 신공덕동에 토지를 확보했다는 뜻이다.

일본인 소유지 20필지 — 서대문구 신공덕동의 맥락

서대문은 한양 도성의 서쪽 관문으로,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주요 교통 거점이었다. 공덕 일대는 경성 외곽이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어서 일본인들의 거주·사업 거점으로 일찍부터 활용됐다. 신공덕동의 일본인 소유지 20필지는 그 흐름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높다. 거주용이었는지, 농장이나 사업용이었는지는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추적할 수 있다.

국유지 8필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국유지는 도로, 관청 부지, 공공 시설이 주를 이뤘다. 서대문 지역의 교통 요충지적 성격을 감안하면, 신공덕동의 8필지 국유지 중 일부가 도로 부지나 관청 관련 시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공공 시설 부지는 행정 관련 유물이 나올 수 있는 흥미로운 조사 대상이다.


7. 오늘날의 신공덕동, 과거와의 연결점



신공덕동의 1912년 기록을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지금 이 동네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104필지의 집터, 44필지의 밭, 51,259㎡의 분묘지, 20필지의 일본인 소유지, 8필지의 국유지. 이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1912년 신공덕동의 진짜 얼굴이다.

특히 전체 면적의 3분의 1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은 신공덕동이 조선 시대부터 장례와 기억의 공간으로 기능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 무덤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지금 어느 건물 아래 그 흔적이 남아 있는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그 답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신공덕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구축하고 있다. 개발이 계속되는 이 지역에서 공사 전 지표조사, 필요 시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작업. 그게 51,259㎡의 분묘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잃지 않는 방법이다.



신공덕동을 걸을 때, 딱 한 번만 멈춰봐.



지금 네가 서 있는 이 자리,


100년 전엔 어쩌면 무덤이 있었을 수 있다.


김씨 가문의 밭도 있었고,


일본인의 깃발이 꽂힌 20필지도 있었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전체의 3분의 1이 무덤이던 땅에서


사람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음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그 삶의 무게가 지금 이 땅 아래에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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