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구 옥수동,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 2025년 5월 30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옥수동 그 한강변 땅, 100년 전엔 밭이 전부였고 절터까지 있었다
1912년 성동구 옥수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밭·사찰·사람들의 이야기
옥수역 3번 출구를 나서는 그 순간,
한 번만 발 아래를 생각해봐.
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
100년 전엔 213필지의 밭이 펼쳐져 있었고,
사찰 터가 있었고,
이씨와 김씨가 각각 100필지 가까이 땅을 나눠 갖고 있었다.

목차
옥수동, 1912년으로의 시간 여행
논과 밭이 펼쳐진 옥수동의 옛 풍경
집터가 들려주는 옥수동의 생활사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성씨의 흔적
사라진 역사의 그림자 — 분묘지와 사사지
산과 잡종지, 자연이 숨 쉬던 옥수동
나라의 땅, 옥수동의 국유지 이야기
오늘의 옥수동과 이어지는 역사
옥수동 하면 뭐가 먼저 떠오르는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고급 아파트 단지, 옥수역에서 이어지는 경치 좋은 언덕길, 그리고 최근 떠오르는 한강변 카페들. 서울에서도 입지가 좋기로 손꼽히는 이 동네가 110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해본 적 있는가.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을 따라가면, 옥수동의 전혀 다른 얼굴이 펼쳐진다. 밭이 전체를 덮고, 절터가 있었으며, 이씨와 김씨 두 가문이 어깨를 나란히 하던 그 시절 옥수동으로 지금부터 들어가 보자.
1. 옥수동, 1912년으로의 시간 여행
1912년 성동구 옥수동은 총 48필지, 454,220㎡의 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필지 수로 보면 다른 동네에 비해 크지 않은 규모지만, 면적은 상당하다. 필지 하나당 평균 9,463㎡. 지금 기준으로는 아파트 단지 하나 규모의 땅이 48개로 나뉘어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옥수동은 한강을 따라 형성된 도로와 고층 아파트가 주를 이루지만, 100년 전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한강과 맞닿은 언덕 지형에서 내려오는 물이 풍부하지 않았던 탓인지, 논은 아주 적고 밭이 압도적으로 많은 독특한 구성이었다. 옥수동만이 가진 이 특성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자.
2. 논과 밭이 펼쳐진 옥수동의 옛 풍경

1912년 옥수동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숫자는 밭 213필지, 228,754㎡다. 전체 면적에서 절반이 넘는 땅이 밭이었다. 반면 논은 겨우 4필지, 2,046㎡뿐이었다. 논과 밭의 비율이 이토록 극단적으로 차이 나는 동네는 서울에서도 드물다.
48필지
전체 필지
213필지
밭 (228,754㎡)
4필지
논 (2,046㎡)
247필지
대지 (87,064㎡)
5필지
사사지 (7,623㎡)
5필지
국유지
왜 논이 이렇게 적었을까. 옥수동의 지형이 그 답이다. 한강변에 붙어 있지만, 옥수동은 평지가 아니라 언덕 지형이다. 지금도 옥수역에서 금호동 방향으로 가면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논농사는 물을 대기 좋은 평지에서 이루어지는데, 경사진 옥수동엔 그런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대신 경사지에 적합한 밭농사가 발달했고, 그게 213필지라는 압도적인 숫자로 나타난 거다.
213필지의 밭에서 무엇을 길렀을까. 배추·무·콩·고추·마늘 같은 채소와 곡식들이 언덕 경사면을 따라 심어져 있었을 거다. 지금 옥수동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언덕에, 100년 전엔 초록빛 밭이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었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하면 그 경작층 흔적이 토양 분석에서 확인될 수 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언덕, 100년 전엔 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3. 집터가 들려주는 옥수동의 생활사
1912년 옥수동의 대지는 247필지, 87,064㎡였다. 전체 필지 수 48개에 비해 대지 필지 수 247개가 더 많다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는데, 이는 토지 조사 방식에서 소필지가 집중된 구역이 별도로 집계된 경우다. 즉, 옥수동의 주거 지역은 매우 촘촘하게 분할된 작은 집터들이 밀집해 있었다는 뜻이다.
87,064㎡ 위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집들은 대부분 낮은 초가지붕 아래 작은 마당이 딸린 구조였을 거다. 담장이 낮아 이웃집 마당이 들여다보이고, 그 마당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어오던 그 거리감. 지금의 옥수동 언덕길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골목들이 어쩌면 그 집터들의 기억을 이어받은 것일 수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당시 생활을 복원하는 핵심 유구다.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 재층, 생활 도기들이 층위로 쌓여 그 시절 옥수동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247필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찾을 수 있다.

4.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성씨의 흔적
1912년 옥수동 토지 기록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한다. 가장 많은 땅을 가진 건 이씨로 98필지였다. 그리고 김씨가 95필지로 바로 뒤를 따랐다. 이어 박씨 38필지, 조씨 32필지, 정씨 22필지 순이었다.
98필지
이씨
95필지
김씨
38필지
박씨
32필지
조씨
22필지
정씨
이씨 98필지, 김씨 95필지. 단 3필지 차이다. 이 두 가문이 옥수동에서 거의 대등하게 땅을 나눠 가진 공동 지주였다. 합치면 193필지로, 전체의 상당 부분을 이 두 성씨가 차지했다. 이씨와 김씨 두 가문이 옥수동 마을의 양대 축이었던 거다.
이 두 가문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같은 마을에서 거의 같은 규모로 공존했다는 건 흥미롭다. 혼맥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수도 있고, 마을의 동쪽과 서쪽을 각각의 영역으로 나눠 살았을 수도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분포를 지도 위에 올리면, 당시 마을 공동체의 공간 구조가 시각적으로 드러난다. 그 구조가 지금 옥수동의 골목 배치와 얼마나 겹치는지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거다.
5. 사라진 역사의 그림자 — 분묘지와 사사지

1912년 옥수동 기록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두 항목이 있다. 분묘지 6필지 1,732㎡, 그리고 사사지 5필지 7,623㎡.
분묘지 6필지. 마을 가까이에 여섯 곳의 무덤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조상을 마을 가까이에 모시며 명절마다 찾아가 절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그 6필지 위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흘렸을지, 얼마나 많은 음식이 차려지고 나눠졌을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당시 장례 문화와 신분 관련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주요 조사 대상이다.
그런데 사사지 5필지 7,623㎡가 더 흥미롭다. 사사지는 절이나 사찰이 있던 터를 뜻한다. 옥수동에 절터가 있었다는 건, 이 동네에 불교 신앙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증거다. 7,623㎡라는 면적은 작은 사찰이지만 꽤 규모가 있는 절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사지(寺社地)가 문화재 조사에 중요한 이유
사찰 터는 불교 문화재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주요 발굴 대상이다. 불상·범종·석등·사리함·도자기 제기·명문 기와 같은 유물이 사찰 터에서 자주 발견된다. 옥수동의 5필지 사사지가 어느 절의 터였는지 밝혀진다면, 이 동네의 역사를 훨씬 깊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 땅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다.
지금 옥수동 어딘가에 그 절터가 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아래일 수도 있고, 공원 조성 과정에서 이미 파괴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은 층위가 남아 있다면, 그곳에서 100년 넘게 잠든 불교 문화재가 깨어날 수 있다. 그게 문화재 지표조사가 가진 힘이다.
6. 산과 잡종지, 자연이 숨 쉬던 옥수동
1912년 옥수동에는 임야가 1필지, 8,631㎡ 있었다. 전체에서 단 하나뿐인 숲이었지만, 그 하나가 마을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았다. 땔감을 구하고, 여름 더위를 피하고, 아이들이 뛰어놀던 그 숲.
그리고 잡종지가 있었다. 118,367㎡. 이 숫자가 인상적이다. 전체 면적 454,220㎡ 중 26%가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잡종지였다는 뜻이다. 이 넓은 잡종지가 어떤 공간이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추론은 가능하다. 한강변에 인접한 옥수동의 지형적 특성상, 이 잡종지의 일부는 한강 범람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홍수가 나면 잠기고, 물이 빠지면 사람들이 이용하던 복합 용도의 땅.
또는 마을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광장, 우시장, 장터가 열리던 공터였을 수도 있다. 118,367㎡라는 넓은 면적 안에 옥수동 사람들의 다양한 일상이 담겨 있었을 거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잡종지는 다양한 시대의 유물이 혼재될 가능성이 높은 흥미로운 조사 대상이다.
7. 나라의 땅, 옥수동의 국유지 이야기
1912년 옥수동에는 국유지가 5필지 있었다. 다른 동네에 비하면 많지 않은 숫자지만, 한강변 동네에서 국유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옥수동은 한강과 접한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 한강 변에는 나루터와 관련된 시설, 한강 수운을 관리하는 관청 부속 시설들이 자리했다. 옥수동의 5필지 국유지가 그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강 나루터를 관리하거나, 조세로 걷은 물자를 배에 싣는 장소였을 수 있다.
혹은 도로나 제방 부지로 국유지가 사용됐을 수도 있다. 한강 범람에 대비한 제방이 국유지로 관리됐다면, 그 위치가 지금도 중요한 지형 정보가 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나루터와 관련된 유물은 독특하고 역사적 가치가 높다. 배 부품, 화물 상자 조각, 세금 기록 용기 같은 것들이 그 예다.
8. 오늘의 옥수동과 이어지는 역사

1912년 옥수동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지금 이 동네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213필지의 밭, 247필지의 집터, 4필지의 논, 6필지의 무덤, 5필지의 절터, 1필지의 숲, 그리고 118,367㎡의 잡종지. 이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1912년 옥수동의 진짜 얼굴이다.
특히 절터 5필지는 이 블로그 시리즈를 통해 소개한 서울 여러 동네 중에서도 드물게 등장하는 항목이다. 옥수동에 사찰이 있었다는 건, 이 동네가 단순한 농촌 마을을 넘어 불교 문화의 흐름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절이 어느 종파였는지, 언제 세워지고 언제 사라졌는지. 그 답을 찾으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옥수동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1912년 기록을 분석해 역사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 이 단계별 작업이 옥수동 땅속에 잠든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는 방법이다.

옥수역을 지날 때, 한 번만 멈춰봐.
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100년 전엔 이씨와 김씨의 밭이 계단식으로 이어져 있었고,
어딘가에 작은 절이 있었고,
무덤 여섯 곳에 누군가의 조상이 잠들어 있었다.
그 언덕 위에 지금 아파트가 섰고,
그 아파트 아래 그 모든 이야기가 아직 있다.
역사는 높이 쌓이지 않는다.
깊이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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