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 2025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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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월 12일
지금 당신이 걷는 하왕십리,그 땅 아래엔 무덤이 있었다.
1912년 성동구 하왕십리 — 850필지, 50만 8,332㎡. 논과 밭, 집과 무덤이 공존했던 그 땅의 기억
목차
1.서울 도심 속 시간 여행, 하왕십리 1912
2.논과 밭, 그리고 무덤까지 —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3.집이 619필지 — 하왕십리 사람들의 삶
4.성씨로 읽는 하왕십리 마을의 구성
5.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나 — 국유지 485필지의 비밀
6.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18필지
7.100년 전 서울, 우리가 알지 못한 풍경
8.문화재 지표조사 — 잊힌 시간을 발굴하는 이유
9.마무리 — 이 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 서울 도심 속 시간 여행, 하왕십리 1912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지금은 뚝섬역과 왕십리역 사이,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빽빽하게 들어선 도심이다. 하지만 113년 전, 이 땅은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 빌딩 대신 벼가 자라고, 아스팔트 대신 흙길이 마을을 가로지르고, 공원 자리에 누군가의 무덤이 있었다.
총 필지 수
850필지
서울 역사 기록 중 대규모 마을
총 면적
508,332㎡
축구장 약 72개 규모
대지 (필지 1위)
619필지
118,919㎡ — 주거 밀집 마을
분묘지
37필지
30,981㎡ — 삶과 죽음이 공존
1912년 하왕십리의 총 면적은 508,332㎡, 850필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동네들 중 가장 많은 필지 수다. 하지만 숫자가 큰 것보다 더 흥미로운 건 그 구성이다. 논과 밭이 있었고, 집이 있었고, 그리고 무덤도 있었다. 생과 사가 한 마을 안에 공존했던 그 땅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자.
2. 논과 밭, 그리고 무덤까지 —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밭
156필지
166,939㎡
논
28필지
74,671㎡
분묘지
37필지
30,981㎡
임야·기타
다수
자연 공간

하왕십리의 땅 구성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동네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분묘지, 즉 공동묘지가 37필지, 30,981㎡나 된다는 사실이다. 다른 동네에서는 한두 필지에 그쳤던 분묘지가 하왕십리에서는 묵직한 비중을 차지한다.
논은 28필지, 74,671㎡였다. 지금의 성동구 도심 한가운데에 벼가 자랐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지만, 그 논에서 수확한 쌀이 마을 사람들의 한 해 양식을 채웠다. 밭은 156필지, 166,939㎡로 논보다 훨씬 넓었다. 채소와 곡식을 기르며 일상의 끼니를 만들어가던 삶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37필지의 무덤. 그곳은 하왕십리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던 곳이었고, 동시에 그 땅에 누가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역사 유적이기도 하다. 무덤 하나가 한 시대의 장례 문화를, 한 가문의 계보를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다.
3. 집이 619필지 — 하왕십리 사람들의 삶

850필지 중 집터인 대지가 619필지였다. 전체의 70% 이상이 주거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하왕십리는 농촌이면서도 이미 상당한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던 생활 마을이었다. 총 대지 면적은 118,919㎡. 좁고 촘촘한 골목 사이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한 평의 땅이 곧 생존을 의미하던 시절, 619개의 집터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피어났다. 아궁이 연기가 골목마다 피어오르고, 저녁이면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었다. 이 619필지 아래 쌓인 생활의 층위가 얼마나 두터울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지 상상만 해도 흥미롭다.
4. 성씨로 읽는 하왕십리 마을의 구성
김씨
82필지
이씨
35필지
최씨
30필지
박씨
29필지
홍씨
16필지
장씨
13필지
정씨
13필지
조씨
12필지
하왕십리에는 다양한 성씨들이 공존했다. 김씨가 82필지로 압도적 1위였고, 이씨 35필지, 최씨 30필지, 박씨 29필지가 뒤를 이었다. 홍씨 16필지, 장씨와 정씨가 각 13필지, 조씨 12필지까지. 이 여덟 성씨만 해도 230필지에 달한다.
이 마을에서 김씨와 이씨는 이웃이었을 것이고, 최씨와 박씨는 같은 골목에서 살았을 것이다. 장씨와 정씨는 혼인 관계였을 수도 있고, 조씨 집안은 마을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8개 성씨가 공존하는 이 복잡한 관계망이, 땅속 어딘가에 유물과 유구의 형태로 아직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37필지의 분묘지가 그 관계망의 마지막 흔적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5. 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나 — 국유지 485필지의 비밀
하왕십리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는 따로 있다. 국유지가 무려 485필지였다. 전체 850필지의 57%가 넘는다. 이게 무슨 뜻일까. 절반 이상의 땅이 개인이 아닌 국가의 소유였다는 뜻이다.
1912년은 대한제국이 이미 무너지고 조선총독부 통치가 시작된 지 2년째였다. 국유지 485필지는 사실상 일본 식민 당국이 관할하는 땅이었다. 왕실 소유였던 땅, 관청 소속이었던 땅, 주인이 명확하지 않아 국가로 귀속된 땅들이 한꺼번에 이 범주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이 거대한 국유지의 존재는 하왕십리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식민지 행정 체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역사적 맥락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을 통해 조선 전역의 토지를 새롭게 등록했다. 이 과정에서 소유권이 불분명한 땅은 대거 국유지로 편입되었고, 사실상 조선총독부의 재산이 되었다. 하왕십리의 485필지 국유지는 이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다.
6.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18필지

국유지 485필지 외에도 하왕십리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땅이 18필지 있었다. 앞서 살펴본 증산동(28필지), 오금동(38필지)에 비하면 적어 보이지만, 동척이 손댄 땅의 의미는 숫자로만 재단할 수 없다.
동척은 조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일본 자본에 넘기는 경제 수탈의 핵심 기관이었다. 하왕십리 18필지에서 일하던 조선 농민들은 소작료를 내며 자신이 경작한 땅의 결실을 고스란히 빼앗겼을 것이다. 국유지 485필지와 동척 18필지를 합치면, 하왕십리 전체 850필지 중 절반 이상의 땅이 사실상 조선 사람의 손을 떠나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아픔의 흔적도 이 땅은 기억하고 있다.
7. 100년 전 서울, 우리가 알지 못한 풍경

지금의 서울은 숨 가쁘게 돌아간다. 뚝섬역에서 쏟아지는 출퇴근 인파, 왕십리 광장의 복잡한 차량 행렬. 하지만 1912년 하왕십리는 계절이 천천히 바뀌는 것을 느끼며 살던 공간이었다. 봄이면 모내기 준비로 분주했고, 여름이면 밭에서 땀을 흘렸으며, 가을이면 수확의 기쁨이 마을을 채웠다. 그리고 겨울이면 무덤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없다. 하지만 토지조사부에 기록된 850필지의 숫자, 김씨 82필지, 분묘지 37필지, 국유지 485필지. 이 모든 숫자가 그들이 이 땅 위에 분명히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그 증명을 읽어내는 것이 역사를 마주하는 방법이다.
8. 문화재 지표조사 — 잊힌 시간을 발굴하는 이유

하왕십리처럼 분묘지가 37필지에 달하는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묘지는 그 시대 장례 문화, 가문의 역사, 심지어 당시 사람들의 질병과 생활 습관까지 담고 있는 종합적인 역사 유적이다. 단 하나의 분묘에서도 부장품, 비석 조각, 관 재료 등이 출토되면 그 시대 전체를 다시 해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하왕십리 일대에서 재개발이나 대규모 공사가 진행된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619필지 집터 아래의 생활 층위, 37필지 분묘지의 유적 가능성, 국유지 485필지에 담긴 식민지 시대 구조물 흔적. 이 모든 것이 발굴 대상이 될 수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는 성동구를 포함한 서울 전역의 조사 기록과 의뢰 절차를 안내하고 있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 발굴조사. 분묘지가 확인된 지역은 특히 면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국가유산청 협업포털(e-minwon.go.kr) 또는 seoulheritage.org를 통해 의뢰 가능. 소규모 건축은 국비 지원 신청 가능.
9. 마무리 — 이 땅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서울의 문화유산은 오래된 건물이나 유물에만 있지 않다. 땅속에 묻힌 삶, 기록된 숫자 속에 살아 숨 쉬는 이야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 공간 안에도 문화유산은 존재한다. 1912년 하왕십리의 850필지가 바로 그 증거다.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는 그 잊힌 시간들을 다시 꺼낼 수 있다. 37필지 무덤 속에 잠든 누군가의 이름을, 619필지 집터 아래 남겨진 생활의 흔적을, 485필지 국유지가 품고 있는 식민지 역사의 단면을. 이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이 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의뢰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국가유산청 협업포털 → e-minwon.go.kr
소규모 국비 지원 발굴 → 한국문화재재단 연계
성동구 관할 문화재 문의 → 성동구청 문화관광과
"1912년 하왕십리, 37개의 무덤이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이 지켜보던 그 땅 위에 지금 당신이 서 있다.땅은 죽지 않는다. 기억을 품은 채 살아 있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국가유산청 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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