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 서울 HI
- 6월 25일
- 3분 분량
목차
서울 도심 속 시간여행, 하왕십리 1912
논과 밭, 그리고 무덤까지…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하왕십리 사람들의 삶: 집과 성씨 이야기
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나? 국유지와 동척의 흔적
100년 전 서울, 우리가 알지 못한 풍경
마무리하며: 잊힌 시간을 발굴하는 이유
1912년,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지금은 빌딩 숲과 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도시의 한가운데지만,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 아래, 예전에 누군가의 논밭이 있었고, 무덤이 있었으며, 이름조차 낯선 누군가의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땅의 이야기를 알고 나면, 하왕십리를 걷는 발걸음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자,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1912년, 그때의 하왕십리로.

서울 도심 속 시간여행, 하왕십리 1912
1912년 당시, 성동구 하왕십리의 전체 면적은 약 850필지, 무려 50만 8,332㎡에 달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하나의 소도시 규모에 가까운 땅이다. 하지만 그 시절 이곳은 고요한 농촌이었다. 골목골목을 따라 흙길이 나 있었고, 사람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던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커피 한 잔에 오천 원을 쓰는 시대가 아니라, 한 평의 땅이 곧 생존을 의미하던 시절. 그래서 이 땅을 어떻게 나누고, 누가 가지고 있었는지는 그 시대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된다.
논과 밭, 그리고 무덤까지…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하왕십리는 그 당시 논이 28필지, 약 7만 4,671㎡ 있었다.
이 논들은 지금의 고층 아파트 아래 묻혀 있다. 이곳에서 자라던 벼들은 누군가의 식탁을 채웠고, 그 수확은 그 가족의 생계를 지탱했다.
밭은 더 많았다. 156필지, 16만 6,939㎡.
지금의 도심지에 이런 밭이 있었다니 상상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이 땅은 사람들이 직접 곡식을 키우며 살아가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그 땅에서는 누군가가 김을 매고, 여름날 땀을 흘리며 옥수수를 땄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도 있었다. 37필지, 총 면적은 3만 981㎡. 그곳은 하왕십리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돌아가던 곳이었다. 무덤이라는 존재는 생의 끝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곳에 누가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적 증거다.
하왕십리 사람들의 삶: 집과 성씨 이야기
이제 사람들의 삶으로 눈을 돌려보자.
1912년 하왕십리에는 집이 무려 619필지 있었다. 총 11만 8,919㎡의 대지가 ‘집’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지금처럼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이 아니라, 흙과 나무로 만든 작은 집들이었을 것이다.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기록에 따르면, 김씨가 가장 많았다. 무려 82필지. 그 다음이 이씨(35필지), 최씨(30필지), 박씨(29필지), 홍씨(16필지), 장씨와 정씨(각 13필지), 조씨(12필지) 순이었다. 지금도 흔한 성씨들이지만, 이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정착했는지 생각해보면 수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들은 농사를 지었을까? 장사를 했을까? 아니면, 그냥 서울 근교의 고요한 삶을 택했던 걸까?
그 땅은 누구의 것이었나? 국유지와 동척의 흔적
하지만 이 모든 개인 소유 땅보다 더 많은 필지를 차지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국유지’. 무려 485필지나 됐다. 지금처럼 공공기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많은 땅이 국가 소유였을까? 당시 조선은 이미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일본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하왕십리에도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이른바 ‘동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본의 국책회사.
하왕십리에는 동척 소유의 땅이 18필지나 있었다. 이 숫자가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동척이 손댄 곳마다 조선의 자원과 인력이 빨려 들어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가 다르다.
100년 전 서울, 우리가 알지 못한 풍경
지금의 서울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다. 매일 수많은 차가 지나가고, 빌딩과 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 있다. 그러나 1912년의 서울, 특히 하왕십리는 고요하고 느리며, 자연과 함께 호흡하던 삶의 공간이었다.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없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토지대장에 기록된 필지 수, 면적, 성씨들은 그들이 이 땅 위에 분명히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예의다.
마무리하며: 잊힌 시간을 발굴하는 이유
서울의 문화유산은 단지 오래된 건물이나 유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땅 속에 묻힌 삶, 기록된 땅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그 공간에도 문화유산은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를 통해 그 잊힌 시간들을 다시 꺼내어 본다.
1912년 하왕십리는, 바로 그런 이유로 다시 봐야 하는 땅이다.
글 출처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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