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행당동의 토지 이용과 문화재 조사 가치
- 2025년 7월 6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2일
문화재발굴 · 지표조사 · 성동구 역사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그 길 아래1912년 행당동이 묻혀 있다
성동구 행당동 344필지 토지대장으로 읽는 문화재 발굴의 모든 것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행당동 지표조사 심층 리포트
목 차
01한 장의 지도로 본 1912년 성동구 행당동의 풍경
02밭과 논, 그리고 무덤까지 —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03철도용지 93,240㎡의 비밀 — 수탈의 흔적이 남긴 것
04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으로 본 당시의 생활상
05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 —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
06행당동의 문화유산, 왜 지금 주목해야 할까
07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로 제대로 알기
08성공 사례 — 조선시대 가옥터가 아파트 공사장에서 나온 날
09마무리 — 과거를 잊지 않는 도시, 서울
성동구 행당동. 지하철을 갈아타고,편의점에서 커피를 사고, 버스를 기다리는 그 골목.그 아래 110년 전, 누군가는 논밭을 일구고조상의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그 기억이 아직 거기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행당동"이 어떤 이미지로 떠오르나요? 한양대학교, 왕십리 역세권, 고층 아파트, 복잡한 간선도로. 맞습니다. 2025년의 행당동은 전형적인 서울 도심입니다. 그런데 딱 110년 전, 이 땅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논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의 집이 띄엄띄엄 자리했으며, 무덤이 조용히 언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912년 행당동의 토지대장은 그 모든 이야기를 숫자로 품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숫자를 하나씩 꺼내 읽으면서, 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 땅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지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끝까지 읽으면 행당동이라는 이름이 달리 들릴 거예요.
01
한 장의 지도로 본 1912년 성동구 행당동의 풍경
1912년의 행당동 토지대장을 펼치면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오는 숫자가 있습니다. 344필지, 88,906㎡. 이것이 당시 행당동의 공식 기록상 면적입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실제 토지 이용 내역을 보면 이야기가 훨씬 풍부해집니다. 행당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밭과 논이 펼쳐진 농경 지대이면서,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정책이 가장 직접적으로 관철되던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철도용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총 필지
344
필지
총 대장 면적
88,906
㎡
밭
421,644
㎡ (174필지)
논
131,418
㎡
분묘지
67,190
㎡ (6필지)
철도용지
93,240
㎡
산지(임야)
142,856
㎡
집터(대지)
32,562
㎡ (118필지)
밭 421,644㎡에 논 131,418㎡를 더하면 농경지만 55만㎡가 넘습니다. 산지 142,856㎡에 분묘지 67,190㎡까지 합치면, 자연과 조상의 흔적이 전체 면적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람들이 실제로 살던 집터는 118필지 32,562㎡에 불과했어요. 지금의 행당동 주거 밀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딴 세상입니다.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이 분석한 행당동 기록은 이 지역이 농업·자연·식민지 수탈이라는 세 가지 층위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는 걸 보여줍니다. 이 복합성이 문화재 발굴 조사의 잠재 가치를 높이는 핵심 요인입니다.

02
밭과 논, 그리고 무덤까지 —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174필지에 달하는 421,644㎡의 밭. 이 숫자가 그냥 농지 면적이 아니라는 걸 느끼려면, 지금 행당동 거리를 걸으면서 상상해 봐야 합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인도가 110년 전엔 고구마 밭이었을 수 있습니다. 저 편의점 자리가 밭두렁이었을 수 있어요.
논도 131,418㎡나 됐습니다. 행당동이 한강 지류와 가까운 저지대를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리 조건이 비교적 좋았을 것이고, 덕분에 논농사도 가능했을 겁니다.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농부들의 낫질이 리드미컬하게 들판을 채웠겠죠.
하지만 가장 강렬하게 남는 숫자는 분묘지입니다. 6필지, 67,190㎡. 대지 전체보다 두 배가 넘는 면적입니다. 사람들이 살던 집터보다 무덤이 차지한 땅이 더 넓었다는 거예요. 이건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이 마을이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세대가 이어져 내려온 공간인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무덤은 죽음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억의 공간입니다. 67,190㎡의 분묘지 속에는 행당동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수많은 가족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에서 분묘지 인근 지역은 특별히 신중하게 다뤄집니다. 부장품, 비석, 의례용 도기, 관재 흔적 등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고, 이 유물들은 당시 가족 구조와 사회 계층, 제례 문화를 읽는 핵심 자료가 됩니다. 현대 도시의 개발이 이루어질 때 이런 정보가 선제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귀중한 역사 기록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03
철도용지 93,240㎡의 비밀 — 수탈의 흔적이 남긴 것
1912년 행당동 토지 기록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항목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철도용지 93,240㎡입니다.
철도. 지금은 편리한 교통수단으로만 인식되지만, 일제강점기의 철도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선 전역에 깔린 철도망은 쌀과 자원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고, 군대와 물자를 이동시키기 위한 식민지 수탈의 핵심 인프라였습니다. 행당동에 93,240㎡에 달하는 철도용지가 있었다는 건, 이 지역이 그 수탈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음을 의미합니다.
철도용지가 주는 문화재 발굴 단서
일제강점기 철도 부지 주변에서는 당시 건축된 역사(驛舍) 구조물, 저장 창고 기단, 수탈 관련 시설의 흔적이 발견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행당동의 93,240㎡ 철도용지 인근 역시 시굴조사 시 이런 근대 문화재가 확인될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철도용지의 존재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철도가 놓이는 과정에서 원래 그곳에 있던 농지, 집터, 심지어 무덤까지 강제로 철거되거나 이전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황급히 이전된 분묘의 흔적, 살던 집을 포기하고 떠난 사람들이 남긴 생활 도구 같은 것들이 땅속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어요. 역사의 상처가 유물이 되는 순간입니다.

04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으로 본 당시의 생활상
1912년 행당동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토지대장의 성씨별 소유 현황을 보면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성씨 | 보유 필지 수 | 순위 및 특기 |
김씨(金氏) | 40 필지 | 1위 · 마을 핵심 가문 |
이씨(李氏) | 37 필지 | 2위 |
박씨(朴氏) | 31 필지 | 3위 |
최씨(崔氏) | 22 필지 | 4위 |
국유지 | 70 필지 | 전체의 약 20% |
동양척식주식회사 | 34 필지 | 식민지 수탈 기관 |
기타 성씨·공동소유 | 나머지 | 복합 공동체 |
개인 소유 중에서는 김씨 40필지, 이씨 37필지, 박씨 31필지, 최씨 22필지 순입니다. 이 네 성씨만 합쳐도 130필지가 넘습니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어느 한 가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땅을 독점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상위 4개 성씨가 비교적 균형 있게 필지를 나누고 있었다는 건, 행당동이 단일 씨족 집성촌이 아닌 여러 가문이 어울려 살던 복합 공동체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복합 공동체 구조는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단일 가문이 장기간 거주한 집성촌은 특정 양식의 유물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복합 공동체에서는 훨씬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유물이 공존할 수 있거든요. 다양한 제례 방식, 다른 건축 양식, 각 가문의 고유한 생활 도구가 같은 층위 안에서 발견된다는 건 역사 연구의 관점에서 보물과 같습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최씨의 존재입니다. 22필지로 4위를 기록한 최씨는 실제로 지금도 성동구 일대에 세거해 온 가문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110년 전 기록과 현재 지역 역사가 이어지는 접점이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발굴 조사가 단순한 유물 수집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 복원이 되는 이유입니다.

05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국유지 —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
1912년 행당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두 숫자. 국유지 70필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34필지입니다.
국유지 70필지는 전체 344필지의 약 20%에 해당합니다. 이 땅들은 조선 왕조의 국유지를 일제가 접수한 경우가 많습니다. 원래 왕실 소유였거나 공공 목적으로 관리되던 토지가 강제 병합 이후 일본 정부 소유로 전환된 것이죠. 행당동에서도 그 과정이 그대로 진행됐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34필지는 더 직접적인 수탈의 증거입니다. 이 기관은 조선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거나 강탈해 일본인 이주민에게 재분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행당동의 34필지도 그렇게 조선인의 손에서 떠나간 땅들이었을 거예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문화재 조사 시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수탈 과정에서 급하게 떠난 조선인 가족들이 남긴 물건, 의도적으로 숨겨둔 가보, 또는 강제 이주로 방치된 생활 유적이 이 토지 아래에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발굴 조사 전문가들은 토지 소유 이력을 반드시 확인합니다. 동척 소유지였다는 기록 하나가 조사 방향을 바꾸고, 주목해야 할 층위를 달리 설정하게 만들 수 있거든요. 역사 문서와 발굴 조사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06
행당동의 문화유산, 왜 지금 주목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성동구 행당동 어딘가에서는 공사가 진행 중일 수 있습니다. 재건축, 신축, 도로 확장, 지하 시설 공사. 서울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공사의 삽날이 1912년의 분묘지 위를 지나갈 때, 우리는 과연 충분히 조심하고 있을까요?
행당동의 복합적인 토지 이용 역사는 이 지역이 문화재 발굴의 잠재지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걸 보여줍니다. 밭과 논이 공존했던 농경 지역, 67,190㎡의 광대한 분묘지, 철도용지로 인해 강제 이전됐을 가족들의 흔적,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 이력까지. 이 모든 역사적 층위가 현재의 개발 예정지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엔 농경지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도시화된 지역일수록 예상치 못한 문화재가 발굴될 확률이 높다는 건 전문가들 사이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도시화 과정에서 지표면은 극적으로 바뀌었지만, 일정 깊이 아래의 원래 지층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행당동처럼 과거 농경·분묘·철도용지가 복합적으로 존재했던 지역에서 개발 사업을 진행할 때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소홀히 하는 건 역사적 손실이자 법적 위험입니다. 문화재보호법 위반 시 공사 즉시 중단 명령과 함께 법적 책임을 지게 됩니다.
07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로 제대로 알기
이쯤에서 문화재 조사의 각 단계를 제대로 정리해 드릴게요. 이 흐름을 알아야 사업 일정을 제대로 잡을 수 있고,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 낭비도 막을 수 있습니다.
1
지표조사 — 역사를 먼저 읽는다
문헌 기록, 고지도, 지적도, 항공사진 등을 종합 분석해 해당 지역에 문화재가 있을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1912년 토지대장처럼 구체적인 역사 자료가 있으면 조사 방향이 훨씬 정밀해집니다. 현장 육안 조사와 탐문 조사도 함께 이루어집니다. 모든 발굴 절차의 출발점입니다.
2
표본조사 — 방향을 좁힌다
소규모 부지나 지표조사 결과를 보완하기 위한 예비 단계입니다. 본격적인 시굴 전에 조사 범위와 깊이를 결정하는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핵심 정보를 얻는 효율적인 단계입니다.
3
시굴조사 — 실제로 파서 확인한다
격자 형태로 선정된 구역을 실제 굴착해 지하 문화재 층위를 눈으로 확인합니다. 전체 부지를 굴착하지 않고 최소 범위로 최대 정보를 얻는 가장 중요한 중간 단계입니다. 행당동처럼 분묘지와 철도용지가 복합된 지역에서는 시굴 결과가 이후 사업 일정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4
발굴조사 — 역사를 세상에 꺼낸다
시굴조사에서 문화재가 확인된 구역을 전면 발굴합니다. 가장 긴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최종 단계입니다. 발굴 결과에 따라 해당 구역이 문화재로 지정·보존되거나 기록만 남기고 공사가 재개될 수 있습니다.
이 네 단계를 제대로 밟는 것이 개발 사업자에게도 유리합니다. 나중에 갑작스럽게 유물이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최악의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거든요. 사전 지표조사 비용은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08
성공 사례 — 조선시대 가옥터가 아파트 공사장에서 나온 날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성북구 길음동 재개발 구역에서 아파트 착공 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시대 가옥 터와 유물 수백 점이 확인됐습니다.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거쳐 일정 구간은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이 공간은 지금도 지역 주민들의 역사 교육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개발과 보존이 공존하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이 사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첫 단계인 지표조사를 건너뛰지 않았다는 것이죠. 사전에 해당 지역의 조선시대 토지 이용 기록을 꼼꼼히 검토했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시굴조사의 위치와 깊이를 정확하게 설정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최소한의 굴착으로 최대한의 역사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요.
행당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1912년 기록에 6필지 67,190㎡의 분묘지가 있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34필지가 있었으며, 93,240㎡의 철도용지가 있었습니다. 이 정보들은 이미 어디서 무엇을 집중적으로 조사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은 단순히 학술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발굴된 유물과 유구는 지역 주민들에게 자신이 사는 동네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고, 나아가 지역의 정체성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살아있는 역사가 됩니다. 행당동에서 조선시대 혹은 그 이전의 유물이 발굴된다면, 이 동네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지겠죠.

09
마무리 — 과거를 잊지 않는 도시, 서울
1912년의 행당동 토지대장. 344필지라는 숫자 안에 논이 있고, 밭이 있고, 무덤이 있고, 철도가 있었습니다. 김씨, 이씨, 박씨, 최씨가 이 땅 위에서 이웃으로 살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이 그 위를 짓밟았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행당동 어딘가의 흙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도시는 계속 변합니다. 개발이 멈추지 않고, 땅 위의 풍경은 10년마다 달라집니다. 하지만 땅 아래는 다릅니다. 적절한 조사 없이 파헤치지 않는 한, 역사의 층위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침묵을 깨는 건 발굴의 삽날이고, 그 삽날 앞에는 반드시 지표조사라는 이름의 준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두고 대립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를 함께 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행당동에서 시작하는 이 이야기가 그 지혜를 향한 작은 한 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을 방문하세요. 발굴조사 비용·예산 FAQ, 법적·행정 절차 안내, 공사 일정 관련 정보까지 한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논두렁을 걷던 발이 남긴 진흙 자국,
무덤 앞 돌 위에 놓였던 제사 그릇,
철도 소리에 잠 못 들던 밤의 기억.
행당동의 땅은 그 모든 것을
110년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개발이 다가올 때마다
그 기억들은 사라질 위기 앞에 섭니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그 기억들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습니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역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 행당동 거리를 걷게 된다면,잠깐 발 아래 땅을 한번 느껴보세요.그 땅이,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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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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