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을지로2가, 근대 서울의 심장부가 태동하던 시절
- 서울 HI
- 11월 8일
- 3분 분량
목차
프롤로그 – ‘을지로’라는 이름에 깃든 시간의 향기
1912년, 서울 중심을 새기다 – 을지로2가의 지형과 규모
성씨별 토지 소유로 본 생활사 – 이름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도시 침투의 시작
중국 상인들의 흔적, 그리고 국제 교류의 단초
사라진 집터에서 피어난 도시 – 근대화의 그림자와 빛
성공적인 문화재발굴과 유적보존 사례
에필로그 – 오늘의 을지로, 그 땅 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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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을지로’라는 이름에 깃든 시간의 향기
“서울의 심장은 어디인가요?”
이 질문에 많은 이들이 명동, 청계천, 을지로를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걷는 을지로의 골목길은 단순한 상업지구가 아니다. 100여 년 전, 1912년의 을지로2가는 근대 서울의 도시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변화의 최전선이었다.
길게 늘어선 전깃줄, 벽돌로 쌓은 양옥, 그리고 조선과 일본, 중국의 사람들이 함께 뒤섞여 살던 거리.
그곳은 단지 건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피어나는 실험의 무대였다.
1. 1912년, 서울 중심을 새기다 – 을지로2가의 지형과 규모
1912년의 을지로2가는 200필지, 총면적 94,869㎡에 달하는 큰 구획이었다.
그중 대부분이 대지로 사용되며, 200필지 전체가 주거 및 상업지의 기반이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을지로 일대를 근대 도시의 중심축으로 삼고, 도로 확장과 상업용지 조성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청계천과 가까워 물류가 활발했고, 인근의 종로, 명동과 연결되며 서울의 중심 기능을 수행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을지로2가는 근대 서울의 0번지라 부를 만한 곳이었다.

2. 성씨별 토지 소유로 본 생활사 – 이름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
이곳에는 이씨가 24필지, 김씨가 15필지, 류씨가 12필지, 최씨가 12필지의 토지를 소유했다.
이 수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시대 서울 사람들의 사회적 구조와 삶의 흔적을 말해준다.
이씨와 김씨는 한양의 전통적인 양반층이자 상업계에도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반면 류씨와 최씨 등은 지방에서 상경한 신흥 중산층으로, 을지로 일대에서 상업과 제조업을 결합한 신경제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성씨별 소유는 한양 내부의 계층 이동을 반영하며, 근대 시민계급의 출현을 상징한다.

3.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 도시 침투의 시작
을지로2가의 토지 중 63필지는 일본인 소유였다.
이는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식민 도시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특히,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는 이 지역에서 1필지의 핵심 부지를 확보하며 금융과 상권의 중심을 구축했다.
그들의 건물은 단순한 상업용 건물이 아니라, 도시 지배의 상징이었다.
이 부지는 훗날 조선인들의 토지 분할과 상권 위축을 야기했지만, 동시에 이후의 도시계획 및 근대건축의 형태를 남겨, 오늘날 을지로의 거리 디자인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4. 중국 상인들의 흔적, 그리고 국제 교류의 단초
당시 을지로2가에는 4필지의 중국인 소유 토지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직물과 잡화류를 취급하는 상인으로, 남대문시장과 연결된 중국계 상업망의 거점 역할을 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중국 상권은 서울 최초의 국제 교류 공간으로 발전했다.
이 교류는 훗날 명동과 을지로의 ‘세계상권’ 형성의 씨앗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그 흔적은 골목의 오래된 한자 간판들 속에서 느낄 수 있다.

5. 사라진 집터에서 피어난 도시 – 근대화의 그림자와 빛
1912년 이후, 을지로2가는 전력·운수·은행·인쇄소가 밀집하는 근대 인프라의 허브로 변모했다.
전차 노선이 개통되며 사람과 물류가 집중되었고,
청계천 복개 이후에는 지하상가와 빌딩이 들어서며 ‘산업과 예술이 공존하는 거리’로 진화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변화의 이면에는,
토지 수용과 강제 이주로 사라진 수많은 가정의 이야기도 숨어 있다.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 작업을 통해 드러난 집터, 우물, 도자기 파편들은
“서울의 도시화는 누군가의 삶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6. 성공적인 문화재발굴과 유적보존 사례
을지로 일대에서는 최근 도심 재개발 전 문화재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센터는 이 과정에서 조선 후기 주거유적, 생활토기, 근대 건축기초부 등을 다수 확인했다.
특히, 한 재개발 현장에서는 1890년대 벽돌 건물의 기단부가 발견되어
서울시 지정 근대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러한 문화재발굴과정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서울의 뿌리를 보존하는 미래 도시의 설계도로 이어지고 있다.
7. 에필로그 – 오늘의 을지로, 그 땅 위의 역사
오늘의 을지로2가는 조명공예와 인쇄, 디자인, 소규모 제조업이 어우러진 창조의 거리로 불린다.
낡은 건물 사이사이에는 100년 전의 도시 흔적이 남아 있다.

문화재발굴조사원들은 여전히 그 땅을 발굴하며,
그 속에서 사라진 이름과 꿈, 그리고 서울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낸다.
우리가 걷는 길 위에 묻힌 시간, 그것이 곧 서울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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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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