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회현동2가, 땅 위에 새겨진 제국의 그림자와 사람들의 일상
- 1월 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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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필지 중 65필지가 일본인 소유 — 1912년 중구 회현동2가 문화재 지표조사로 보는 식민지 서울의 민낯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중구 지역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1912년 회현동2가 85필지·66,208㎡에 담긴 소유의 역사와 문화재 발굴조사의 의미를 풀어냅니다.
이 동네의 숫자 하나하나에는 시간이 눌어붙어 있습니다. 읽고 나면,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됩니다.
1912년, 중구 회현동2가. 지금의 서울과 도저히 겹쳐지지 않는 풍경이지만, 85필지 66,208㎡의 기록을 들춰보면 충격이 찾아옵니다. 전체 85필지 중 무려 65필지가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거기에 미국인 1필지, 덴마크인 1필지. 이미 국제적 각축장이 되어가던 서울의 한 골목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이 숫자들이 단순한 통계가 아닌 이유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눈으로 함께 읽어봅니다. 끝까지 읽게 될 겁니다.
85
총 필지 수
(전 필지 대지)
66,208
총 면적(㎡)
1912년 기준
65
일본인 소유
(전체의 76%)
2
서양인 소유
(미국·덴마크 각 1)

한 줄의 숫자에서 시작된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대개 거창한 사건 이름과 연도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그보다 훨씬 작은 단위에서 살아 숨 쉽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100년 전에는 누구 소유였는지, 이 골목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았는지가 그 진짜 역사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방법 중 가장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건설이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해당 지역의 지면 위와 아래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나 유물이 존재하는지 먼저 확인하는 기초 조사 과정입니다. 쉽게 말하면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이 어떤 역사를 품고 있는지 살피는 일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시굴조사로, 그 다음에는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며,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전 과정을 전문적으로 수행합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을 동 단위로 체계적으로 정리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데이터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중구 회현동2가는 그 기록 안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공간입니다. 85필지 전부가 대지, 면적 66,208㎡, 그리고 65필지가 일본인 소유. 이 숫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열어보겠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과거를 붙잡는 작업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도시가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1912년 회현동2가의 공간 풍경 — 남산 자락의 생활 무대
회현동2가는 남산 자락과 맞닿아 있는 동네입니다. 서울 도심과 남산을 잇는 길목에 위치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습니다. 조선 시대부터 이 일대는 남산 북쪽 기슭의 생활 구역으로 기능해 왔고, 시전 상인들과 중인 계층, 그리고 외곽에서 도심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 가던 자리였습니다.
1912년 무렵에는 이 동네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산 일대가 일제의 행정·군사 거점으로 활용되면서, 그 주변 지역인 회현동에도 일본인들이 대거 이주해 들어왔습니다. 장사꾼이 머물고, 외국인이 들어오고, 일본인이 하나씩 땅을 사들이던 자리. 1912년의 기록은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는지를 숫자로 보여줍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이런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도시의 성격이 급격히 바뀌는 전환점에 놓인 지역일수록, 지하에는 이전 시기 생활 층위와 전환 이후의 층위가 뒤섞인 복잡한 역사 구조가 남습니다. 생활유구, 건물지, 배수로 흔적이 한 땅 안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겹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통계 요약 — 1912년 중구 회현동2가
총 필지 수: 85필지 / 총 면적: 66,208㎡ / 지목 구성: 전 필지 대지
국유지: 1필지 / 일본인 소유: 65필지 (전체의 약 76%)
미국인 소유: 1필지 / 덴마크인 소유: 1필지
자료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중구 지역조사 (seoulheritage.org)

대지 85필지, 집으로 가득 찼던 동네
1912년 회현동2가는 85필지 전부가 대지였습니다. 밭도 없고, 논도 없고, 임야도 없습니다. 오로지 사람이 살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필지 수와 대지 수가 동일하다는 건, 빈 땅 없이 모두 누군가의 거처였다는 의미입니다. 아이들이 뛰어다녔고, 장작 냄새가 골목을 채웠고, 저녁이면 작은 불빛들이 이어지던 동네였을 겁니다.
같은 시기 서울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이 구성은 눈에 띕니다. 회현동3가(13필지, 전 필지 대지)가 작은 블록 단위의 완전한 주거지였다면, 회현동2가는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같은 구조를 보여줍니다. 85필지, 66,208㎡. 이건 도시화가 이미 완성에 가까운 수준으로 진행된 공간이었다는 뜻입니다. 땅의 쓰임새가 명확하고, 생활이 빼곡하게 쌓인 곳일수록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유구가 발견될 확률도 높아집니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고밀 주거지는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공간입니다. 부엌 자리, 공동 우물, 작은 담장의 기초, 버려진 생활도구들. 지표조사 단계에서도 이미 토양 색의 변화와 파편 분포로 신호를 잡을 수 있는 유형입니다. 회현동2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있던 도시'의 흔적이 지하에 집약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공간입니다.
집이 전부였던 동네. 생활이 중심이었던 공간. 그 켜켜이 쌓인 시간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국유지 1필지가 남긴 의미 — 행정이 새긴 흔적

85필지 중 단 1필지가 국유지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이 1필지는 절대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국유지는 일반적으로 도로, 공공시설, 행정 목적의 공간으로 관리됩니다. 회현동2가의 이 1필지가 정확히 어떤 목적이었는지는 추가적인 문헌 검토가 필요하지만, 이 동네가 이미 국가 행정 체계 안에서 일정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의 입장에서 국유지 기록은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행정 목적으로 사용된 공간은 그 아래에 이전 시기의 관아 관련 구조물이나 공공 시설의 기초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남산과 가까운 회현동 일대는 조선 시대 여러 관청과 군사 시설이 산재했던 지역입니다. 이 1필지의 국유지가 그 흔적 위에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꼼꼼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공간입니다.
실제로 서울 도심의 국유지 주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건물 터가 발견된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작은 1필지가 예상치 못한 역사의 문을 열어젖힌 경우가 있었습니다. 회현동2가의 그 1필지도 마찬가지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일본인 소유 65필지가 말해주는 시대의 공기
이 글에서 가장 충격적인 숫자를 꼽으라면 단연 이것입니다. 전체 85필지 중 65필지가 일본인 소유. 비율로 따지면 약 76%입니다. 회현동3가(92%)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네 필지 중 세 필지가 이미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1912년 회현동2가 토지 소유 구조 (85필지 기준)
일본인 65필지 (76%)
조선인 등
국유·서양
일본인 소유 (65필지)
조선인 외 소유 (14필지)
국유·서양인 (3필지)
이건 단순한 토지 소유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의 주인이 바뀌고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일본인 소유 필지가 이렇게 높은 비율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는 1910년대 초 토지조사사업이 있습니다. 신고주의 원칙을 내세운 이 제도는, 근대적 법률 개념에 낯설었던 조선인들의 관습적 소유권을 합법적 외양을 띤 채 밀어냈습니다. 회현동2가의 65필지는 그 과정이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숫자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관점에서 일본인 소유 필지가 많은 지역은 독특한 역사 층위를 가집니다. 소유자가 바뀌면 건물의 방식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전통 한옥 구조 위에 일본식 기초가 올라가고, 그 옆에 근대적 벽돌 구조물이 생겨납니다. 발굴 과정에서 기와 아래에 시멘트 기초가, 한옥 담장 옆에 서양식 벽돌이 나오는 이질적인 층위가 확인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이 한 땅 위에서 충돌한 결과가 그대로 땅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65필지. 76%. 이 숫자는 냉정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 땅 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서서히 주인 자리를 잃어가던 과정의 기록입니다.

미국인과 덴마크인, 낯선 이름의 흔적 — 국제 도시 서울의 초상
65필지의 일본인 소유에 이어, 또 하나의 놀라운 기록이 있습니다. 회현동2가에는 미국인 소유 토지 1필지와 덴마크인 소유 토지 1필지가 있었습니다. 숫자는 각각 1필지에 불과하지만, 이 두 필지가 가지는 의미는 숫자를 훨씬 넘어섭니다.
1912년의 서울에 미국인과 덴마크인이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공간이 이미 단순한 조선인 거주지를 넘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공존하던 국제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인 소유지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조선에 진출한 미국 선교사들은 서울 도심 곳곳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웠습니다. 덴마크인 소유지는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무역상이나 외교관 관련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의 입장에서 이런 외국인 소유지는 흥미로운 발굴 대상입니다. 문화권이 다른 소유자는 그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건축 구조, 사용하는 재료, 생활용품의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중에는 외국인 소유지로 추정되는 공간에서 서양식 도자기, 유리병, 금속 생활도구 등이 대거 출토된 경우도 있습니다. 회현동2가의 미국인·덴마크인 소유 필지 역시 그런 독특한 유물 출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공간입니다.
회현동2가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이유

회현동2가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서 얼마나 중요한 공간인지는, 지금까지 살펴본 기록들이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 필지 대지라는 구성은 이 동네가 오랜 기간 고밀 주거지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만큼 지하에는 두꺼운 생활 역사층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기에 76%에 달하는 일본인 소유 비율은 이 공간이 식민지 도시 변화의 핵심 지점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외국인 소유지의 존재는 다국적 문화 층위가 혼재할 가능성을 더합니다. 그리고 국유지 1필지는 행정·공공 목적의 공간이 가지는 또 다른 역사 층위를 예고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한 동네 안에 집약되어 있다는 것은,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거의 교과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들이 이런 지역을 가장 먼저 주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조사 없이 공사가 진행될 경우, 공사 도중 유구가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되는 리스크가 매우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지하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 발굴조사를 선행하는 것이 사업자와 역사 모두를 위해 훨씬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문화재 조사가 필요한 지역의 주요 조건
전 필지 대지 구성 → 고밀 생활 역사층 존재 가능성 높음
식민지 소유 구조 전환 지역 → 시대별 건축 층위 혼재 가능성
외국인 소유 혼재 → 다국적 유물 출토 가능성
국유지·관청 인접 지역 → 공공 시설 기초 구조물 발견 가능성
조선 시대 주요 지형 인접 지역(남산·경복궁 등) → 장기 역사층 보존 가능성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이 남긴 실제 성공 사례
회현동2가와 유사한 조건의 서울 도심 주거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서울 중구 일대의 한 재개발 사업 현장이었습니다. 처음 현장 관계자들은 "이미 오래된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라 별다른 게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 시대 생활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확인되었고 시굴조사로 이어졌습니다.
시굴조사에서 부엌 자리로 추정되는 소토(불에 탄 흙) 층과 배수로 흔적이 확인되었고, 이에 따라 정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발굴 결과, 조선 후기 민가의 기초 구조물과 생활도구 일괄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습니다. 이 성과는 단순히 유물 확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발굴 기록을 바탕으로 해당 지역의 역사 전시 콘텐츠가 제작되었고,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이 공간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재탄생했습니다.
회현동2가 역시 그런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습니다. 85필지, 66,208㎡에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들이 올바른 조사 과정을 거칠 때, 우리가 몰랐던 서울의 한 페이지가 새롭게 쓰일 수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과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이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문화재 조사 단계별 흐름
1단계 지표조사 → 문헌·현장 기초 조사, 유적 가능성 평가
2단계 시굴(표본)조사 → 트렌치 굴착, 지하 유구·유물 존재 확인
3단계 정밀 발굴조사 → 전면 굴착, 유구 실측 기록 및 유물 수습
4단계 보고서 발간 → 학술 기록 정리, 문화재 지정·활용 검토
주요 기관: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한국문화유산협회, 중부지역 문화재 조사기관협회
지금 우리가 이 땅을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
도시는 계속 바뀝니다.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서고, 골목이 사라지고, 길이 새로 생겨납니다. 하지만 땅은 기억합니다. 그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 그 공간을 지배했던 구조,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도 이어갔던 삶의 방식들이 땅 아래에 층층이 남습니다.
회현동2가의 1912년 기록은 오래된 통계가 아닙니다. 지금의 서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자료입니다. 65필지를 빼앗긴 사람들의 이야기, 그 공간에서 여전히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동네 안으로 들어오던 이야기가 모두 이 기록 안에 담겨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이 기억들을 꺼내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이지 않더라도, 묵묵히 땅을 읽는 이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도시의 뿌리를 잃어버립니다. 회현동2가를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기억 위에 도시가 다시 서는 순간

회현동2가를 들여다보는 일은 서울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땅 위에 남은 흔적을 존중할 때, 도시는 더 단단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살펴보는 순간,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걷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 살아납니다.
85필지 중 65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던 그 동네. 미국인과 덴마크인의 이름이 토지 기록에 나란히 적혀 있던 그 공간. 국유지 1필지 위에 어떤 건물이 서 있었는지 아직 모르는 그 필지. 이 모든 이야기가 회현동2가 땅 아래에 아직 잠들어 있습니다.
그 땅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도시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주함이, 더 좋은 도시를 만들어가는 힘이 됩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힘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서울 25개 구 전역의 1912년 토지 기록과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 자료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공식 사이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중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서 회현동2가 외에도 다양한 동네의 소유 구조와 역사 기록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공식 사이트: www.seoulheritage.org
오늘 이 글을 읽으셨다면,다음에 남산 아래 골목을 지나칠 때잠깐, 딱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 주세요.이 아스팔트 아래에 누군가의 부엌이 있었고,누군가의 담장이 있었으며,누군가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던 집이 있었습니다.그 사람들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이 도시는 조금 더 따뜻해집니다.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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