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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오장동, 땅이 기억하는 시간의 흔적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이야기

목차


  1. 서문 – 땅 아래 숨은 오장동의 또 다른 얼굴

  2. 1912년 오장동의 시작: 총 217필지, 62,046㎡의 기록

  3. 대지와 삶 – 200필지의 사람 냄새 나는 공간

  4. 밭의 기억 – 17필지 15,398㎡, 생명의 근원

  5. 성씨가 남긴 흔적 – 김씨와 이씨, 그리고 그들의 터전

  6. 일본인 소유 75필지, 격변의 시대가 남긴 상처

  7. 오늘의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의 의미

  8.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원들의 하루

  9. 서울 도심 속 유물발굴작업, 성공사례로 보는 변화

  10. 마무리 – 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이어간다



서문 – 땅 아래 숨은 오장동의 또 다른 얼굴

서울 중구 오장동을 걷다 보면, 오래된 간판과 신식 빌딩이 묘하게 공존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평범한 도심 한가운데, 100년도 넘은 땅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2년, 조선의 시간이 식민의 그림자 속으로 넘어가던 그때. 오장동의 땅은 여전히 사람의 숨결로 따뜻했고, 삶과 생업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지금 우리가 문화재발굴이나 유물발굴, 유적발굴 현장에서 만나는 흔적들은, 바로 이 시기의 오장동이 품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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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오장동의 시작 – 총 217필지, 62,046㎡의 기록

당시 오장동은 총 217필지로 이루어졌으며 면적은 62,046㎡에 달했다. 지금처럼 고층 건물이 즐비한 도심이 아니라, 소규모 가옥과 밭이 혼재된 생활 중심지였다. 조선의 전통이 남아 있으면서도 근대화의 물결이 스며들던, 일종의 ‘도시 변곡점’이었다.




대지와 삶 – 200필지의 사람 냄새 나는 공간

1912년 오장동에는 200필지, 총 46,648㎡의 대지가 있었다. 대부분이 사람이 살거나 장사를 하던 생활 기반지였다. 좁은 골목 사이에는 기와지붕이 이어지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겨울의 하늘을 흐리게 만들었다.


이 대지들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었다. 바로 ‘삶의 현장’이었다. 집터 아래 묻혀 있는 토기 조각이나 생활 유물들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증언한다. 이렇듯 문화재발굴과정에서 드러나는 유물 하나하나는,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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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의 기억 – 17필지 15,398㎡, 생명의 근원

17필지의 밭, 총 15,398㎡의 면적은 당시 오장동 주민들에게 생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도시 한복판에서도 농작이 이루어졌던 흔적은 놀랍다.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도시화의 과도기, ‘밭이 있는 도시’는 그만큼 생존의 상징이었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로 드러난 토양의 층위를 보면, 인공적으로 다져진 경작층 아래로 조선시대 토기편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는 ‘밭이 단순한 농지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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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가 남긴 흔적 – 김씨와 이씨, 그리고 그들의 터전

기록에 따르면 1912년 오장동에는 김씨가 37필지, 이씨가 29필지의 토지를 소유했다. 토지조사사업 당시 작성된 명부를 보면, 이들의 이름 옆에는 ‘본관’이 표기되어 있다. 김해김씨, 전주이씨, 청송심씨 등, 이름만으로도 조선의 뿌리 깊은 혈통이 엿보인다.


이 성씨들은 오장동뿐 아니라 인근의 을지로, 충무로 일대에도 다수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흔적은 현재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발견되는 생활유적과 맞닿아 있으며, 서울의 도심 형성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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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소유 75필지 – 격변의 시대가 남긴 상처

그러나 1912년 오장동의 기록에는 아픈 흔적도 남아 있다. 일본인 명의로 된 75필지의 토지가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 토지조사사업은 조선의 전통적 토지 소유 구조를 해체하고, 일본 자본이 도시 한복판으로 침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유적발굴 결과를 보면 일본식 건축자재나 생활용품이 출토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단순한 거주 흔적이 아니라, 시대의 권력 구조를 반영한 물질적 증거로 읽힌다.




오늘의 문화재발굴과 유적발굴의 의미

지금 서울 도심에서 진행되는 문화재발굴이나 유물발굴작업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을 찾는 일이 아니다. 땅 속에서 발견되는 유적 하나하나가 도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단서가 된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이제는 미세한 토양층까지도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조선시대의 주거지와 일제강점기의 건축 흔적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합 유적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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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 유물발굴작업, 성공사례로 보는 변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센터에서는 최근 오장동 인근의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생활유적을 성공적으로 확인했다. 조그만 도기 조각과 금속 생활용품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도시화 이전의 생활 패턴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한 조사팀의 발굴조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유적발굴의 현장은 늘 감동적이에요. 우리가 파내는 건 흙이 아니라,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처럼, 오장동의 땅은 여전히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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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 땅은 기억한다, 우리가 이어간다

서울 한복판, 수많은 건물과 도로 아래에는 여전히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1912년 오장동의 땅은 잊히지 않았다.

그곳은 김씨와 이씨의 터전이었고, 일본인들의 권력이 스며든 자리였으며, 무엇보다 ‘삶이 쌓인 층’이었다.


문화재발굴은 단순히 흙을 파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일, 잊힌 이야기에 숨을 불어넣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어가는 사람들, 발굴조사원과 연구자들, 시민의 관심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유산의 수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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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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