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예장동, 그 땅 아래 잠든 시간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로 깨어나다
- 서울 HI
- 11월 2일
- 3분 분량
목차
첫 장면 – 사라진 예장동의 시간
땅이 말하다 – 1912년, 8필지의 기록
국유지의 의미 – 나라가 지킨 터전의 흔적
발굴이 시작되다 – 문화재발굴의 현장
유적발굴단의 하루 – 흙 속에서 만난 역사
문화재발굴과정의 숨은 노력들
예장동이 남긴 교훈 –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를 보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가치와 성공사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시민의 연결
마무리 – 기억을 지키는 일, 미래를 세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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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면 – 사라진 예장동의 시간
“이 땅이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줄, 아무도 몰랐다.”
서울 한복판, 지금은 남산과 명동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와 빌딩들이 빽빽한 그곳.
그러나 1912년의 중구 예장동은 단 8필지, 64,354㎡의 대지로 구성된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때의 땅은 오늘날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인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한 장의 토지대장 속에 남은 숫자들이 바로 그 시대의 숨결이었다.
이 문장 하나로 시작된 문화재발굴조사.
그리고 지금, 발굴조사원들의 손끝 아래에서 잊혔던 예장동의 시간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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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말하다 – 1912년, 8필지의 기록
1912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였다.
서울의 거의 모든 지역이 조사 대상이었고, 예장동 역시 그 대상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예장동은 8필지 64,354㎡의 대지로 구성되었다.
이 중 모든 필지가 국유지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즉, 개인의 집터나 사사로운 소유보다는 공공시설 혹은 행정용 건물의 흔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땅의 의미를 풀어내기 위해 지금의 문화재 지표조사는 시작되었다.
땅 속 1cm를 걷어낼 때마다, 100년의 시간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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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지의 의미 – 나라가 지킨 터전의 흔적
예장동이 전부 국유지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상징성을 지닌다.
국유지는 그 시대의 ‘공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학교, 관청, 병영지 혹은 공공시설의 터였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이 부분에 주목했다.
도시 재개발로 사라지는 공공부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조사 그 이상이다.
이것은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일이며, ‘국가의 시간’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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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 시작되다 – 문화재발굴의 현장
유적발굴은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니다.
문화재발굴은 “기억의 수술”과도 같다.
땅의 단면 하나하나에서 그 시대의 생활상과 구조물이 드러나며, 작은 유물 하나가 과거의 일상을 증언한다.
유물발굴작업은 정밀한 과학적 절차와 사람의 감각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현장에는 긴장과 설렘이 공존한다.
한 줌의 흙 속에서 수백 년의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발굴조사원들은 숨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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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발굴단의 하루 – 흙 속에서 만난 역사
새벽부터 시작되는 유적발굴단의 하루는 단단한 흙을 파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햇빛에 반사된 미세한 도자기 파편 하나에도 눈을 떼지 않는다.
그들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현대 건물 아래 숨어 있던 고대의 흔적을 찾아낸다.
때로는 조선시대 기와 조각이, 때로는 일제강점기 생활도구가,
그리고 때로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증언하는 철제 잔해가 발견된다.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서울의 ‘다층적 시간’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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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발굴과정의 숨은 노력들
한 유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계별 문화재발굴과정이 필수다.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본격 발굴 → 분석 → 보존 및 기록의 순서로 진행된다.
지표조사는 눈에 보이는 흔적을 확인하는 첫걸음이고,
시굴조사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탐색의 땅따먹기’이다.
이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유구와 유물을 수습하고,
과학적 분석과 복원 기록을 통해 그 땅의 의미를 해석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예장동의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정밀 측량장비, 3D 스캐닝, GIS 지도 시스템 등을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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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동이 남긴 교훈 –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를 보다
예장동의 발굴은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를 본다’는 말의 상징이 되었다.
도시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오늘날, 땅 속의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쉽다.
그러나 이 한정된 8필지의 발굴은 “작은 땅이 큰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한때 잊힌 국유지였던 이 땅이,
이제는 서울의 역사 교육과 도시유산의 중요한 자료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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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표조사의 가치와 성공사례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속의 역사를 ‘예비 진단’하는 과정이다.
건축이나 공공개발 이전에 그 지역의 문화재 존재 여부를 조사하는 필수 절차다.
서울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 수많은 성공 사례가 있었다.
남산 아래 도로 확장 공사 전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주거지 구조가 확인되었고,
광화문 일대 공공시설 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 구조가 복원되었다.
이처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서울의 기억’을 보존하는 생생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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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시민의 연결
이제 발굴은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서울시의 문화재 조사 현장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발굴조사원들의 해설을 들으며 현장을 방문하는 ‘시민 발굴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유물이 아니라 시간을 만난 것 같았어요.”
그 말은 발굴조사원들조차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문화재는 먼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고 배우는 현재의 경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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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 기억을 지키는 일, 미래를 세우는 일
예장동의 8필지, 64,354㎡는 단지 과거의 수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나라의 역사, 사람들의 발자국, 그리고 잊힌 기억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문화재발굴은 그 기억을 다시 세상 위로 올리는 일이다.
유물발굴은 손끝으로 만나는 시간의 예술이다.
그리고 유적발굴은 우리가 잊은 ‘서울의 뿌리’를 되찾는 여정이다.
오늘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삽이 아닌 ‘기억’을 들고 땅을 연다.
그들의 땀방울 속에서, 1912년 예장동의 시간은 다시 살아난다.
이 작은 땅의 이야기가
미래 세대에게 “서울은 기억 위에 세워진 도시다”라는 메시지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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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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