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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예장동, 그 땅 아래 잠든 시간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로 깨어나다

  • 2025년 11월 2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6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중구 지역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이 땅이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을 줄, 아무도 몰랐다 — 1912년 예장동 8필지, 전부 국유지였던 땅의 비밀

단 8필지. 면적은 64,354제곱미터. 그리고 8필지 전부가 국유지. 이 시리즈를 통해 묵동 369필지, 공릉동 704필지, 세종로 213필지를 다뤄왔어. 그런데 오늘의 예장동은 고작 8필지야. 하지만 이 작은 숫자가 오히려 가장 강렬한 질문을 던져. 남산과 명동 사이, 서울 한복판의 이 땅을 왜 나라가 통째로 소유하고 있었을까? 끝까지 읽으면 예장동이 단순한 동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목차

  • 사라진 예장동의 시간 — 프롤로그

  • 땅이 말하다 — 1912년, 8필지의 기록

  • 국유지의 의미 — 나라가 지킨 터전의 흔적

  • 발굴이 시작되다 — 문화재 발굴의 현장

  • 유적발굴단의 하루 — 흙 속에서 만난 역사

  • 문화재 발굴과정의 숨은 노력들

  • 예장동이 남긴 교훈 — 작은 땅, 큰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의 가치와 성공 사례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시민의 연결

  • 기억을 지키는 일, 미래를 세우는 일 — 에필로그


프롤로그사라진 예장동의 시간



서울 한복판, 지금은 남산과 명동 사이로 이어지는 도로와 빌딩들이 빽빽한 그곳. 그러나 1912년의 중구 예장동은 단 8필지, 64,354제곱미터의 대지로 구성된 조용한 공간이었어. 그때의 땅은 오늘날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인도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어.

이 문장 하나로 시작된 문화재 발굴조사. 그리고 지금, 발굴조사원들의 손끝 아래에서 잊혔던 예장동의 시간이 천천히 깨어나고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가 복원해낸 예장동의 1912년 기록은 이 시리즈 15편을 통해 다뤄온 어느 지역보다 강렬한 질문을 담고 있어.


1땅이 말하다 — 1912년, 8필지의 기록



1912년,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던 시기였어. 서울의 거의 모든 지역이 조사 대상이었고, 예장동 역시 그 대상이었어. 당시 기록에 따르면 예장동은 8필지 64,354제곱미터의 대지로 구성됐어.

8

총 필지 수

64,354

총 면적(제곱미터)

100%

국유지 비율

0

개인 소유 필지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사실. 이 중 모든 필지가 국유지였어. 개인의 집터나 사사로운 소유는 단 한 필지도 없었어. 이 시리즈에서 다뤄온 14개 지역 중 100% 국유지는 예장동이 처음이야.

이 시리즈 주요 지역 국유지 비율 비교

지역

총 필지

국유지

국유지 비율

예장동

8필지

8필지

100%

세종로

213필지

소수

소비율

송현동

72필지

1필지

1.4%

묵동

369필지

12필지(공유)

3.3%

8필지 전부 국유지 — 이 시리즈 유일한 사례

묵동 369필지, 공릉동 704필지, 세종로 213필지, 잠원동 142필지. 이 시리즈에서 다뤄온 모든 지역에는 개인 소유 토지가 있었어. 하지만 예장동은 달라. 8필지 전부가 국유지야. 이건 단순한 행정 기록이 아니야. 이 땅이 조선시대부터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특수 목적 공간이었다는 걸 의미해. 그 공간이 무엇이었는지가 지금 발굴조사의 핵심 질문이야.


2국유지의 의미 — 나라가 지킨 터전의 흔적

예장동이 전부 국유지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상징성을 지녀. 국유지는 그 시대의 공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어. 학교, 관청, 병영지 혹은 공공시설의 터였을 가능성이 크지.

예장동, 어떤 공간이었을까

예장동(藝場洞)이라는 이름 자체에 단서가 있어. '예장(藝場)'은 무예를 연마하던 훈련장을 뜻해. 조선시대 이 일대는 군사 훈련과 무예 시범이 이루어지던 국가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남산 아래라는 지리적 특성도 이와 맞아떨어져. 방어와 군사의 요충지였던 남산 자락에 무예 훈련장이 있었다는 건 역사적으로도 충분한 맥락을 가져. 8필지 전부 국유지라는 사실이 이 추정을 뒷받침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이 부분에 주목했어. 도시 재개발로 사라지는 공공부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단순한 조사 그 이상이야.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일이며, 국가의 시간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해.


3발굴이 시작되다 — 문화재 발굴의 현장



유적발굴은 단순히 땅을 파는 일이 아니야. 문화재 발굴은 기억의 수술과도 같아. 땅의 단면 하나하나에서 그 시대의 생활상과 구조물이 드러나며, 작은 유물 하나가 과거의 일상을 증언해.

유물발굴작업은 정밀한 과학적 절차와 사람의 감각이 동시에 필요한 일이야. 문화재 발굴조사 장비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현장에는 긴장과 설렘이 공존해. 한 줌의 흙 속에서 수백 년의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발굴조사원들은 숨을 멈춰. 예장동처럼 100% 국유지로 이루어진 특수 공간에서 나오는 유물은 더욱 그래. 군사 시설의 흔적인지, 관청의 기초인지, 훈련장의 석축인지. 그 판단 하나가 서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 될 수 있거든.


4유적발굴단의 하루 — 흙 속에서 만난 역사

새벽부터 시작되는 유적발굴단의 하루는 단단한 흙을 파내는 것에서 시작돼. 햇빛에 반사된 미세한 도자기 파편 하나에도 눈을 떼지 않아. 그들은 서울의 중심부에서, 현대 건물 아래 숨어 있던 고대의 흔적을 찾아내.

때로는 조선시대 기와 조각이, 때로는 일제강점기 생활도구가, 그리고 때로는 근현대사의 비극을 증언하는 철제 잔해가 발견돼. 이 모든 순간이 모여 서울의 다층적 시간을 완성해. 예장동에서 군사 훈련장의 석축이 나온다면, 그건 조선의 무장들이 땀 흘리던 공간이 지금 우리 발밑에 있다는 뜻이야.


5문화재 발굴과정의 숨은 노력들



한 유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계별 문화재 발굴과정이 필수야. 눈에 보이는 흔적을 확인하는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시굴조사, 본격 발굴, 분석, 보존 및 기록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야.

1

지표조사 — 눈에 보이는 흔적을 확인하는 첫걸음. 문헌·지도 검토와 현장 답사를 병행해.

2

시굴조사 — 작은 구덩이를 파서 유물 존재 가능성을 확인하는 탐색 단계.

3

본격 발굴조사 — 유구와 유물을 수습하고 층위별로 기록하는 핵심 단계.

4

과학적 분석 — 정밀 측량장비, 3D 스캐닝, GIS 지도 시스템을 활용해 데이터화.

5

보존 및 기록 — 복원 보고서 작성과 디지털 아카이빙으로 미래 세대에 전달.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예장동의 과거를 복원하기 위해 정밀 측량장비, 3D 스캐닝, GIS 지도 시스템 등을 활용하고 있어. 8필지라는 좁은 면적이지만 국유지 100%라는 특수성이 이 과정을 더욱 세밀하게 만들어.


6예장동이 남긴 교훈 — 작은 땅, 큰 이야기

예장동의 발굴은 서울의 중심에서 과거를 본다는 말의 상징이 됐어. 도시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오늘날, 땅 속의 시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쉬워. 그러나 이 한정된 8필지의 기록은 작은 땅이 큰 이야기를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8필지가 증명하는 것 — 크기가 아닌 맥락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많은 필지는 공릉동 704필지, 가장 적은 필지는 예장동 8필지야. 하지만 역사적 밀도는 필지 수에 비례하지 않아. 8필지 전부가 국유지라는 단 하나의 사실이 예장동을 이 시리즈에서 가장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 한때 잊힌 국유지였던 이 땅이 이제는 서울의 역사 교육과 도시유산의 중요한 자료로 다시 주목받고 있어.


7문화재 지표조사의 가치와 성공 사례

성공 사례 01 — 남산 아래 도로 확장 공사 현장

예장동과 인접한 남산 아래 도로 확장 공사 전 진행된 지표조사에서 조선 후기 주거지 구조가 확인됐어. 공사가 잠시 조정되었고, 그 과정에서 생활유구가 보존 처리됐어. 발굴이 개발을 막은 게 아니야. 발굴이 더 나은 개발을 만든 거야.

성공 사례 02 — 광화문 일대 공공시설 조사

광화문 일대 공공시설 조사에서는 일제강점기 건물 기초 구조가 복원됐어. 조선총독부 관련 건물의 기초부가 드러나면서 식민지 시대 건축 방식과 도시 구조 변화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게 됐어.

이처럼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야. 서울의 기억을 보존하는 생생한 작업이야. 예장동 8필지의 조사 결과가 쌓일수록 이 지역이 어떤 공간이었는지가 더 선명해질 거야.


8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시민의 연결



이제 발굴은 전문가만의 영역이 아니야. 서울시의 문화재 조사 현장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변하고 있어. 발굴조사원들의 해설을 들으며 현장을 방문하는 시민 발굴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야.

한 학생이 이런 말을 남겼어. 유물이 아니라 시간을 만난 것 같았어요. 그 말은 발굴조사원들조차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 문화재는 먼 과거의 유산이 아니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느끼고 배우는 현재의 경험이야. 예장동 8필지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학생이 언젠가 이 땅의 발굴조사원이 될 수도 있어.


에필로그기억을 지키는 일, 미래를 세우는 일



예장동의 8필지, 64,354제곱미터는 단지 과거의 수치가 아니야. 그 안에는 나라의 역사, 사람들의 발자국, 그리고 잊힌 기억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어.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다시 세상 위로 올리는 일이야. 유물발굴은 손끝으로 만나는 시간의 예술이야. 그리고 유적발굴은 우리가 잊은 서울의 뿌리를 되찾는 여정이야. 오늘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삽이 아닌 기억을 들고 땅을 열어. 그들의 땀방울 속에서 1912년 예장동의 시간은 다시 살아나.

이 작은 땅의 이야기가


미래 세대에게 남기는 메시지

8필지. 전부 국유지.개인의 이름이 단 하나도 없던 땅.그 땅에서 조선의 무장들이 땀을 흘렸고나라가 그 공간을 지켰어.발굴조사원이 처음 그 흙을 걷어낼 때수백 년의 시간이 한꺼번에 올라왔어.예장동은 묻고 있어.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억하고무엇을 후대에 남길 것인가.서울은 기억 위에 세워진 도시야.그 기억을 지키는 일이곧 미래를 세우는 일이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지역 블로그 시리즈

묵동 · 을지로3가 · 송현동 · 잠원동 · 도봉동 · 공릉동 · 망우동 · 을지로2가 · 송월동 · 을지로1가 · 소격동 · 오장동 · 세종로 · 예장동



서울 14개 지역, 1912년의 토지 기록으로 읽은 도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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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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