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서소문동 토지 소유와 문화재 조사, 서울 도심 속 숨은 이야기
- 서울 HI
- 10월 4일
- 3분 분량
목차
서소문동, 1912년의 풍경
주거지와 토지 규모, 당시의 생활상
도로와 국유지, 공간의 활용 방식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과 사회 구조
외국인의 토지 소유와 다문화적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땅, 수탈의 시작
일본·중국·독일·미국인의 소유지 비교
서소문동이 보여준 근대 서울의 축소판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의 필요성
성공 사례와 오늘날의 교훈
기록에서 현재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서울 도심 속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1912년, 서울 중구 서소문동은 134필지 104,380㎡의 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의 서소문동을 떠올리면 고층 빌딩과 복잡한 도로망, 그리고 수많은 직장인들이 붐비는 도심의 이미지를 먼저 그리게 됩니다. 하지만 100여 년 전, 1912년의 서소문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은 토지 소유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고, 동시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독일인, 미국인까지 함께 터전을 잡고 살았던, 작은 국제 도시와도 같은 풍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서소문동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땅과 집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권력 구조, 국제 관계, 그리고 서울의 도시 발전사를 모두 함께 읽어낼 수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나 지표 조사가 단순한 발굴 작업이 아니라, 과거의 사회와 삶을 되살리는 중요한 행위라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1. 서소문동, 1912년의 풍경
서소문동에는 132필지, 104,122㎡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가며 일상의 터전을 만들어갔습니다. 도로는 2필지, 257㎡, 국유지는 6필지가 있었는데, 이는 행정과 교통의 기본적인 인프라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점은 이 공간에 살았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김씨가 16필지, 이씨가 10필지를 소유하며 비교적 넓은 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외국인들의 이름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2. 외국인의 토지 소유와 다문화적 흔적
1912년 서소문동에는 독일인 8필지, 미국인 3필지, 일본인 15필지, 중국인 37필지의 소유지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인의 토지 소유가 가장 많았다는 점은 당시 서울의 상업 활동과 교류가 중국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일본인의 소유지는 단순한 주거 목적을 넘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깊이 관련이 있었습니다. 반면, 독일인과 미국인의 소유지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외국인의 활동 반경이 서소문동까지 확장되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 동양척식주식회사, 서소문동에 발을 들이다
1912년 기록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소유의 땅이 1필지 존재합니다. 동척은 일제강점기 토지 수탈을 제도적으로 실행한 대표적인 기관이었습니다. 이 작은 1필지의 존재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서소문동마저 제국주의적 침탈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동척의 활동은 단순히 토지를 차지하는 것을 넘어서, 조선 사회의 토지 구조를 재편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도구로 작동했습니다. 따라서 서소문동의 사례는 일제강점기 토지 문제를 연구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4. 서소문동이 보여준 근대 서울의 축소판
이 작은 동네에 다양한 국적과 계층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은 곧 서소문동이 근대 서울의 축소판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국인 소유자와 외국인 소유자, 그리고 국유지와 동척의 땅이 얽혀 있는 모습은 단순히 한 지역의 특수성이 아니라, 그 시대 서울 전체가 겪고 있던 격동을 상징합니다.
서소문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한 토지 장부가 아니라, 다문화와 제국주의, 그리고 근대 도시의 형성이 동시에 얽힌 복잡한 이야기의 증거입니다.
5.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의 필요성
오늘날 서울 도심 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입니다.
지표 조사는 해당 지역의 문화재 존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기초 조사 단계이고, 발굴 조사는 실제로 땅을 파서 과거의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서소문동의 사례처럼 기록으로만 남은 역사를 확인하려면, 이러한 조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진행된 시굴 조사에서는 조선 후기의 도로 흔적이나 주거지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우리가 매일 걷는 길과 건물 아래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숨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6. 성공 사례와 오늘날의 교훈
대표적인 사례로 종로 일대의 발굴 조사를 들 수 있습니다. 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유적이 지표 조사와 발굴을 통해 드러났고, 이는 서울 도심이 단순한 현대 도시가 아니라 조선 시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습니다.
서소문동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1912년 기록을 토대로 한 연구와 발굴 조사가 이어진다면, 그 속에서 조선 후기와 근대 초 서울의 생활상과 교류 양상이 생생히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7. 기록에서 현재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
서소문동의 1912년 기록은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자료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문화재는 단순히 옛 건물이나 유적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 사회 구조, 경제적 관계를 담아낸 거대한 이야기입니다. 서소문동의 땅 주인 명단 하나에도, 김씨와 이씨 가문의 삶, 중국 상인의 활동, 일본 제국주의의 발자취, 미국과 독일인의 근대적 흔적까지 모두 녹아 있습니다.
따라서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 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확인하고 미래 세대에게 전해줄 소중한 작업이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8. 서울 도심 속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오늘날 서울의 도심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고 기록을 통해, 발굴을 통해 다시 불러내야 합니다.
서소문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장부가 아니라, 현재의 서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문화재 조사와 발굴 조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여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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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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