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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삼림동, 땅이 들려주는 역사와 사람들의 흔적

목차


  1. 삼림동의 전체 풍경 – 300필지의 기록

  2. 집과 대지 – 삶이 피어난 284필지

  3. 산과 임야 – 작지만 소중했던 1필지

  4. 밭과 농경지 – 도시 속 농업의 흔적

  5. 국유지의 의미 – 공공의 공간, 기록으로 남다

  6. 삼림동의 주요 성씨 – 이씨, 김씨, 박씨, 최씨 가문의 흔적

  7. 외국인의 토지 소유 – 일본인 35필지, 중국인 1필지

  8. 삼림동에서 본 서울의 사회상 – 계급과 권력의 반영

  9.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연결 – 땅 속 기록을 되살리다

  10. 삼림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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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 중구 삼림동은 300필지 35,748㎡라는 숫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땅은 늘 사람과 함께 살아왔고, 필지 하나하나에는 그 시대 사람들의 땀과 희망, 그리고 사회적 관계가 배어 있었습니다. 서울 한복판의 작은 동네 삼림동은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기록 속 풍경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은 사라진 삶의 흔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1.삼림동의 전체 풍경 – 300필지의 기록



삼림동은 총 300필지, 면적은 35,748㎡. 이 수치는 당시 한 동네의 규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주거·농업·임야·국유지가 어우러진 복합적인 생활 공간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오늘날 중구 삼림동을 걸어다니면 고층 빌딩과 아스팔트 도로뿐이지만, 1912년 그 땅 위에는 흙길과 초가집, 작은 밭, 그리고 주민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필지 수는 단순히 행정적 수치가 아니라, 삼림동이라는 마을의 생명력이었습니다. 300개의 필지에는 300가지의 이야기가 있었고, 각각의 땅은 누군가의 가정과 꿈을 지탱하는 기반이었죠.




2.집과 대지 – 삶이 피어난 284필지



삼림동의 대부분은 대지, 즉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터였습니다. 무려 284필지, 29,897㎡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주택은 오늘날의 아파트나 빌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출했지만, 흙벽과 기와, 마당이 있는 집은 가족의 삶이 이어지는 무대였습니다.


이 대지 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어머니는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아버지는 밭일을 다녀와 집 마당에서 땀을 식혔을 것입니다. 한 필지, 한 집마다의 풍경을 상상하면 284개의 대지가 곧 284개의 작은 세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3.산과 임야 – 작지만 소중했던 1필지



삼림동에는 단 1필지, 621㎡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크기로 보면 미미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당시 나무는 집을 지을 때 꼭 필요한 자재였고, 겨울철 난방을 위한 연료이기도 했습니다. 작은 산과 숲은 주민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중요한 자원이었던 것이죠.




4.밭과 농경지 – 도시 속 농업의 흔적



15필지, 5,229㎡의 밭은 삼림동 주민들의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중구 한복판에서 밭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1912년에는 도시 속에서도 농업이 공존했습니다. 이 밭에서는 콩, 채소, 곡식 같은 생활 필수 식품이 재배되었을 것입니다.


흙 냄새 가득한 밭에서 아이들이 거들고, 가을에는 추수의 기쁨을 나누던 풍경을 떠올리면 삼림동이 단순히 도시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국유지의 의미 – 공공의 공간, 기록으로 남다



삼림동에는 2필지의 국유지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소유한 이 땅은 공공을 위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관청이 자리했거나, 길이나 하천과 같은 공동체 기반 시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국유지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도시적 기능이 삼림동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6.삼림동의 주요 성씨 – 이씨, 김씨, 박씨, 최씨 가문의 흔적



삼림동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이씨가 62필지, 김씨가 39필지, 박씨가 29필지, 최씨가 22필지를 소유했습니다. 특정 성씨가 많은 필지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곧 그 가문이 지역 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한 토지 소유를 넘어, 당시 서울의 사회 구조와 계급 질서를 반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7.외국인의 토지 소유 – 일본인 35필지, 중국인 1필지



삼림동에는 일본인과 중국인도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무려 35필지를 소유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줍니다. 토지 소유를 통해 일본은 점점 서울의 생활 기반을 장악해 갔고, 이는 정치적·경제적 지배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반면 중국인의 소유는 단 1필지에 불과했습니다. 이 차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반영합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적극적으로 토지를 소유했다면, 중국인은 상업적 교류나 개인적 정착의 형태로만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8.삼림동에서 본 서울의 사회상 – 계급과 권력의 반영



삼림동의 토지 분포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지역의 기록이 아니라 당시 서울 사회의 축소판을 보게 됩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성씨는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졌고, 외국인의 땅은 식민지 현실을 상징했습니다.


이 기록은 곧 사회적 계급과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입니다.




9.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연결 – 땅 속 기록을 되살리다



오늘날 우리가 삼림동의 1912년 기록을 통해 배우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닙니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이런 기록들을 기반으로 진행되며, 땅 속에 남은 유구(遺構)와 문헌 기록을 연결해 과거를 재구성합니다.


예를 들어, 서울 도심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당시의 토지 구조나 생활 흔적이 발견되면, 문헌 자료와 비교해 더욱 정확한 역사상을 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울 종로 일대 발굴조사에서는 옛 우물터와 집터가 발견되어 당시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삼림동 역시 앞으로의 조사에서 땅 속에 숨겨진 역사가 드러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10.삼림동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1912년 삼림동의 300필지는 단순한 땅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가족들의 웃음소리, 계급과 권력의 구조, 그리고 외세의 그림자까지 담겨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기록을 되살려 바라보는 이유는, 도시가 가진 역사적 층위를 이해하고, 문화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함입니다.


만약 지금 삼림동 골목을 걸으며 땅 밑을 바라본다면, 백여 년 전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살던 땅을 잊지 말아 달라.”


그 메시지는 곧 우리가 문화재를 조사하고 발굴하며 기록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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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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