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중구 남창동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서울 HI
- 7월 11일
- 3분 분량
목차
그 시절, 남창동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12년, 서울 중구 남창동의 정확한 땅 크기
남창동 집들은 얼마나 있었을까?
도로는 있었을까? 도시의 틀을 잡아가던 서울
어떤 사람들이 살았나? 땅을 가진 성씨들
나라의 땅, 국유지의 흔적
일본인의 대규모 토지 소유, 조선의 땅을 일본이?
잊지 말아야 할 공간, 다시 보는 남창동
지금의 문화유산 발굴로 연결되는 이야기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지표조사의 중요성
실제 성공사례로 보는 문화재 조사 의뢰의 필요성
마무리하며: 우리가 지켜야 할 서울의 땅
1912년, 중구 남창동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울 한복판, 그 중에서도 지금은 번화한 남대문시장 인근인 중구 남창동.
지금이야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는 상업 중심지이지만,
110여 년 전인 1912년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생각보다 놀랍고, 또 안타깝기도 하다.
그때 남창동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동네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과,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의 가치가 함께 보인다.
서울 중구 남창동, 133,265㎡의 기억
1912년 당시, 남창동의 전체 면적은 133,265㎡.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약 4만 평이 넘는 꽤 넓은 공간이다.
이중 대부분은 집이 지어진 ‘대지’였고, 일부는 도로, 또 극히 일부는 국유지였다.
283개의 필지, 그 안의 삶
전체 286필지 중, 무려 283필지가 주거지로 사용됐다.
즉, 당시 남창동은 거의 대부분이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하나의 필지마다 작게는 단층집, 크게는 한옥이나 상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이웃집 마당 너머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담을 타고 넘어오는
그런 생기 넘치는 골목골목이 펼쳐졌을 것이다.
도로는 겨우 3필지, 39㎡
놀라운 점은 286필지 중 도로로 쓰인 땅이 고작 3필지,
면적으로는 39㎡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당시 남창동은 도로 인프라가 극히 부족했던 곳이었다.
마차가 아니라 사람의 발로 걷던 시절,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남창동의 주요 도로였다는 뜻이다.
땅을 가진 성씨들, 김씨가 압도적
1912년 토지대장에 따르면 김씨가 소유한 필지는 무려 38필지.
그 뒤를 이씨 19필지, 박씨 17필지가 이었다.
대대로 이 지역에 뿌리 내린 이들이 있었고,
그 가족과 후손들이 지금도 어쩌면 이 땅 어딘가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지역의 토지 소유 구조를 보면
당시의 사회적 구조, 부의 분포, 그리고 가족 단위의 삶까지 엿볼 수 있다.
국유지는 단 7필지
나라의 땅, 즉 국유지는 고작 7필지였다.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체제하에서 정부가 소유한 땅이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국가는 땅의 주인이기보다는, 감시자이자 통제자였을 뿐이었다.
충격적인 사실, 일본인이 127필지를 소유했다
가장 충격적인 기록은 일본인의 토지 소유량이었다.
전체 286필지 중, 무려 127필지가 일본인의 소유였다.
즉, 전체의 약 44%에 달하는 토지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초기, 조선인들의 땅은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수탈 속에서 빠르게 일본인 손으로 넘어갔다.
남창동은 그런 비극이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 중 하나였다.
지금의 발굴, 그 뿌리는 과거의 기록이다
오늘날 우리가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호하고, 다시 바라보는 일은
결국 이런 기록과 역사 속에서 출발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은
바로 이런 오래된 지역과 땅의 기억을 되살려
지금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과거를 눈앞에 펼쳐주는 일을 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의 필요성
문화재 지표조사란 땅 위에 존재하는 문화재의 흔적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는 단순히 건축 허가를 위한 사전 작업이 아니라
그 땅 위에 얽힌 수천 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중요한 열쇠다.
시굴조사는 더 나아가 땅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눈에 보이지 않던 역사적 유물을 찾아낸다.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 가옥터, 조선 후기 우물터 등이 발견되며
그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재정의하게 된다.
성공사례: 서울 강서구 발굴에서 드러난 고려시대 마을 터
실제로 서울 강서구의 한 건축 예정지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고려시대 마을 유적이 발견된 바 있다.
그 덕분에 해당 지역은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고,
개발 대신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되며
주민과 학생들에게 살아있는 역사 현장이 되었다.
서울에서 문화재 조사를 의뢰해야 한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라도
서울 중구, 혹은 인근에서 개발 예정지나 건축을 준비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필수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지자체 승인 절차부터 실제 현장 조사까지
전문가가 전 과정을 함께 진행해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제공해준다.
남창동의 1912년이 오늘날에 주는 메시지
110년 전, 남창동의 땅 위에는 조선인, 일본인, 관청, 성씨 가족들이 얽혀 살았다.
그 복잡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땅 속에, 기록 속에 살아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들을 그냥 묻어버릴 수도 있고,
혹은 다시 꺼내어 미래 세대에게 전할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그 땅 위에서 무엇이 있었는지, 누구의 것이었는지,
왜 지금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답해야 한다.
서울의 문화유산, 당신의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역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당신이 오늘 밟고 지나간 골목,
그 아래에는 수백 년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 이야기를 발굴하는 첫 걸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에서 시작해보자.
글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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