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의 골목 하나가 지금의 서울을 만들었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적선동이다.
- 2025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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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214필지 전부가 집터였다— 1912년 종로 적선동 토지조사로 읽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단서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적선동, 종로구 역사
적선동 기록을 보는 순간,
이상하리만큼 깔끔한 숫자가 눈에 들어왔어.
214필지. 전부 대지. 예외 없이 집터.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빈 땅도 없었어. 이 214필지 전체가 사람이 살거나 생활하던 자리였어. 충무로 시리즈에서 봐왔던 일본인 소유 압도 구조와는 달리, 적선동에는 김씨 53필지, 이씨 27필지, 박씨 17필지. 조선의 가문들이 아직 많은 땅을 쥐고 있었어. 그게 오히려 더 무거운 이야기야. 지키고 있었는데도 17필지는 이미 넘어가 있었거든.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적선동 골목이 왜 이렇게 오래되고 촘촘한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거야.
목차
1장. 적선동이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
2장. 1912년 토지조사가 보여주는 적선동의 하루
3장. 집과 땅으로 읽는 적선동의 풍경
4장. 성씨로 보는 적선동의 토지 권력 지도
5장. 일본인 소유 토지가 의미하는 것
6장. 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적선동
7장. 적선동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적선동이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
적선동은 지금의 종로 한복판이야. 경복궁 동쪽 담장 가까이, 광화문과 인왕산 사이. 지금은 오래된 건물과 골목이 섞인 동네로 남아 있어. 이 동네 이름에 담긴 '적선'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야. 오래된 생활의 결을 품고 있어.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 적선동은 관청과 민가, 상업과 주거가 겹쳐 있던 전형적인 도심형 마을이었어. 종로라는 거대한 축 바로 옆에 있었지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속도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공간이었어. 그 시절의 적선동을 이해하려면 기록보다 토지를 봐야 해. 왜냐하면 땅 위에 사람이 살았고, 그 사람이 역사를 만들었으니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체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면서, 종로구 지역조사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어. 적선동은 그 안에서 조선인 가문의 소유 비중이 비교적 높게 남아 있는, 종로구 안에서도 독특한 성격을 가진 케이스야.
21912년 토지조사가 보여주는 적선동의 하루
1912년 종로구 적선동은 총 214필지, 면적은 35,577제곱미터였어.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이 안에 당시 서울 사람들의 일상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지.
214
총 필지 수
35,577㎡
총 면적
214
대지 필지 (전부)
53
김씨 소유 필지
17
일본인 소유 필지
27
이씨 소유 필지
특이한 점은 전체 필지 전부가 대지였다는 거야.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잡종지도 없었어. 이 말은 곧 적선동이 완전히 도시화된 생활 공간이었다는 뜻이야. 아침에 문을 열면 골목이었고, 저녁에 문을 닫아도 이웃의 숨소리가 들리던 곳. 그게 바로 1912년의 적선동이야.
3집과 땅으로 읽는 적선동의 풍경
214필지 전부가 주거용 대지였어. 이건 굉장히 특별한 구조야. 종로구의 다른 동네들과 비교해도 적선동처럼 전체 필지가 예외 없이 대지인 경우는 흔하지 않아.
100%
214필지 중 214필지가 대지. 밭, 임야, 잡종지 제로. 적선동 전체가 사람이 살거나 생활하던 공간이었어. 이 하나의 숫자가 적선동이 얼마나 완전한 도시 생활 공간이었는지를 말해줘.
적선동은 관청이나 시설 위주의 동네가 아니라, 사람이 실제로 살고 움직이던 생활 중심지였어. 이런 지역은 문화재 발굴이나 문화재 지표조사를 할 때 항상 주목받아. 땅 아래에 생활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극히 높기 때문이야. 우물, 배수로, 담장 기초, 생활 토기. 이것들이 214개의 집터 아래에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어.
실제로 서울 도심 재개발 구간에서 진행된 여러 문화재 발굴조사에서도 이런 밀집 주거지는 조사 성과가 좋은 편이야. 작은 필지들이 촘촘히 모여 있다는 건, 그만큼 생활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뜻이거든. 214필지, 214개의 이야기가 적선동 땅속에 아직 기다리고 있어.

4성씨로 보는 적선동의 토지 권력 지도
이제 누가 이 동네를 소유하고 있었는지 볼 차례야. 1912년 적선동의 성씨 분포는 충무로 시리즈와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보여줘.
김씨
53필지
이씨
27필지
박씨
17필지
일본인
17필지
김씨 53필지, 이씨 27필지, 박씨 17필지. 상위 세 성씨가 전체 214필지의 약 45퍼센트를 조선인 가문이 보유하고 있었어. 충무로1가(일본인 81%), 충무로2가(98%), 초동(72.5%)과 비교하면 적선동은 조선인의 땅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아 있었던 동네야.
이 구조는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도심 토지 소유 패턴과 닮아 있어. 특정 성씨가 대를 이어 도심 토지를 보유하면서 주거와 임대를 동시에 운영하던 구조지. 김씨 53필지는 단순한 소유 통계가 아니야. 이 가문이 적선동의 특정 구역을 대대로 장악하면서 골목의 방향과 구조를 만들어왔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가 보는 종로의 골목 구조, 필지 형태, 재개발이 어려운 이유까지 이 성씨 분포가 설명해줘.
문화재 발굴 해석 단계에서 성씨 분포는 아주 중요한 단서야. 동일 가문 소유지에서는 비슷한 생활 양식의 유물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거든. 김씨 53필지가 어느 구역에 집중됐는지 파악하면, 발굴 트렌치 위치를 훨씬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어.

5일본인 소유 토지가 의미하는 것
1912년 적선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17필지 있었어. 전체 214필지의 7.9퍼센트야. 충무로 시리즈에서 봐왔던 압도적 비율과 비교하면 확실히 낮아. 그런데 이게 오히려 더 무서운 이야기일 수 있어.
조선인 가문이 아직 많은 땅을 지키고 있던 동네에 이미 17필지가 일본인 명의로 들어와 있었어. 경술국치 2년 만에. 이건 단순한 진출이 아니야. 조선인의 저항과 일본인의 침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던 전선의 기록이야.
1910년대 초반, 일본인은 관청 주변과 교통 요지, 그리고 임대 수익이 가능한 도심 주거지부터 집중적으로 토지를 확보했어. 적선동은 그 조건을 갖춘 곳이었고, 17필지는 그 첫 번째 침투였을 거야. 충무로가 이미 80~90퍼센트대로 넘어간 상황에서, 종로 안쪽 적선동은 아직 버티고 있었어. 그 버팀의 흔적이 김씨 53필지이고, 침투의 흔적이 일본인 17필지야.
이런 지역은 문화재 조사에서도 독특한 층위가 나와. 일본인 소유 필지에서는 일본식 건축 기법이나 근대식 배수 시설이 함께 발견되는 경우가 많거든. 즉, 적선동은 조선의 생활사와 식민지 도시 구조가 경계선을 두고 겹쳐서 남아 있는 공간이야. 그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 발굴로 확인할 수 있어.
6문화재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적선동
이런 지역은 개발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해. 지표조사는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야. 땅을 파기 전에, 이곳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 먼저 묻는 과정이야.
적선동 같은 도심 주거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도시 형성 과정이 입체적으로 드러나. 골목의 방향, 담장의 위치, 배수 흐름, 우물의 깊이까지. 이 모든 정보가 땅속에 그대로 기록돼 있어. 214필지 전체가 대지였다는 건, 그 214개의 집터 하나하나가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지표조사가 법적 의무야. 적선동 전체(35,577제곱미터)는 그 기준을 넘어. 지표조사 결과를 국가유산청에 보고하고, 심의를 거쳐 시굴조사나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어. 실제로 서울 도심 여러 구간에서 지표조사 이후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면서 역사적 가치가 재평가된 사례가 많아. 이건 개발을 막는 게 아니라, 도시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야.

종로구 내에서 적선동은 조선인 가문 소유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게 남아 있는 동네야. 그 말은 조선 후기 생활 유구가 훼손되지 않고 더 두껍게 쌓여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충무로처럼 일본식 구조물이 조선식 층위를 덮어버린 구조와는 다른, 더 온전한 조선의 생활사가 나올 수 있어.
7적선동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1912년 적선동의 숫자들은 조용히 말해줘. 도시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214필지의 집. 김씨와 이씨, 박씨의 땅. 그리고 17필지의 일본인 소유지. 이 모든 게 켜켜이 쌓여 지금의 종로 적선동 골목을 만들었어. 김씨 가문이 53필지를 지키던 자리 바로 옆에서 17필지가 조용히 다른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었어. 그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지금도 누구도 정확히 몰라. 발굴이 이루어져야 알 수 있어.
우리가 걷는 골목 아래에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래서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파헤치는 일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일이야. 다음에 종로 적선동을 지나가게 되면 잠깐 멈춰서 바닥을 한번 봐줘. 그 아래에 1912년의 시간이 숨 쉬고 있을 테니까.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김씨 가문이 53필지를 지키고 있던 그 골목에서
17필지는 이미 조용히 다른 이름이 됐어.
그 경계가 어디였는지, 아직 아무도 몰라.
하지만 땅은 알고 있어.

그 기억을 꺼내려는 노력 하나가이 골목을 조금 더 오래 살게 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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