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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견지동 국유지 9,847㎡의 진실

  • 3시간 전
  • 7분 분량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전문 리포트

조계사 바로 그 땅 —


1912년 종로구 견지동 국유지 9,847㎡의 진실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 2필지 9,847㎡ · 대지 100% · 시굴조사·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분석

단 2필지. 그런데 그 안에 한국 불교 100년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도림동 18필지, 동자동 4필지, 구산동 21필지 — 그 어느 곳보다 필지 수가 적다. 단 2필지, 9,847㎡. 그러나 이 작은 숫자가 품고 있는 역사적 무게는 그 어느 곳과도 비교가 안 된다. 1912년, 이 땅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가 막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 바로 옆 — 조선 500년 왕조의 중심부에서 억불 정책에 맞서 불교가 다시 서울 도심으로 돌아온 바로 그 자리가 견지동 국유지다.

목차

11912년 견지동 국유지 — 숫자가 말하는 충격적 단순함

2대지 2필지 100% — 이 땅이 특별한 이유

3견지동의 역사 — 조계사 탄생 전야의 땅

4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 해설

5종로 도심 발굴 성공 사례 — 땅속 역사를 꺼낸 순간들

6견지동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것



1

1912년 견지동 국유지 — 숫자가 말하는 충격적 단순함

2필지. 이 시리즈를 통해 다룬 여러 지역 중 가장 적은 필지 수다. 하지만 단순히 숫자만 보고 "작은 사례"라고 넘기면 안 된다. 오히려 단 2필지로 구성된 국유지라는 사실이, 이 땅이 얼마나 명확하게 특정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단서다.


2

단 2필지, 9,847㎡ — 전체가 대지(垈地)

1필지당 평균 면적은 약 4,924㎡. 이는 도림동(11,602㎡/필지), 동자동(2,964㎡/필지), 구산동(948㎡/필지)과 비교할 때 압도적으로 집중도가 높은 대형 필지 구조다. 두 필지가 맞닿아 약 9,847㎡의 단일 블록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견지동(堅志洞). 이름 자체가 흥미롭다. '굳건한 뜻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이름은, 일제강점기 전에는 한성부 중부(中部) 수진방(壽進坊)에 속해 있었다. 수진방 — 오래 살며 나아간다는 뜻의 이 방명(坊名)은, 경복궁 동쪽, 종로 인근의 핵심 도심부가 얼마나 의미 있는 땅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조선 최고의 권위가 집중된 이 구역에서 국유 대지 2필지가 무려 9,847㎡나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 —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다.

총 필지 수

2필지

시리즈 최소 필지

총 면적

9,847㎡

약 2,979평

지목 종류

1종

대지 100%

행정 위치

종로구 견지동

한성부 중부 수진방

역사적 맥락

불교 총본산 인근

조계사 창건 시기와 일치

지목 특성

대지 100%

건물 밀집 구역

주변 유산

경복궁·창덕궁

조계사·인사동 인접


2

대지 2필지 100% — 이 땅이 특별한 이유

구산동 국유지는 대지와 밭이 섞여 있었다. 도림동은 논·밭·임야·잡종지·철도용지·분묘지까지 다양했다. 동자동에는 대지·사사지·임야가 있었다. 그런데 견지동 국유지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단 하나의 지목, 대지(垈地). 그것도 전체 9,847㎡ 100%가 대지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비율

대지 (垈地)

2필지

9,847㎡

100%

합계

2필지

9,847㎡

100%

대지 100%가 의미하는 것

지목이 오직 대지 하나라는 것은, 이 땅 전체에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는 뜻이다. 논도 밭도 임야도 없다. 완전히 건물로 채워진 9,847㎡. 이 규모의 국유 대지가 종로 한복판에 존재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은 한성부의 핵심 행정·종교·상업 지구였다. 국유 대지라면 관아, 교육 시설, 종교 건물, 군사 관련 시설 중 하나 이상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12년이라는 시점이다. 바로 그해, 조계사의 전신인 각황사(覺皇寺)가 인근 수송동에 막 창건되었다. 견지동의 국유 대지는 각황사 창건의 배경이 된 조선 불교 재건 운동의 지리적 중심 구역 안에 위치해 있었다. 이 시대적 맥락이 견지동 국유지를 단순한 행정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현장으로 만든다.

국유 대지에서 이루어지는 발굴조사는 민간 대지보다 훨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다. 관아 관련 유구, 종교 건물의 기단석, 우물, 배수로, 그리고 당시 사용된 도자기·금속류·목재 유물까지 — 지층마다 다른 시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조선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의 문화층이 중첩된 종로 도심 대지는, 발굴의 밀도가 서울 어느 지역보다 높다.

2필지가 왜 붙어 있을까

단 2필지가 국유 대지로 기록된 것도 흥미롭다. 이 두 필지는 서로 인접하거나 한 블록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시대 관아나 주요 건물들은 한 필지에 모든 것을 짓지 않았다. 주건물과 부속건물, 마당과 담장을 각각의 필지로 나누어 관리했다. 즉, 견지동의 2필지는 서로 기능적으로 연결된 단일 시설의 두 구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두 필지를 함께 조사하는 것이 역사 복원에 훨씬 효과적이다.



3

견지동의 역사 — 조계사 탄생 전야의 땅

견지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울 도심의 역사, 특히 불교와 종로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조선시대의 억불 정책으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그 상징적인 정책 중 하나가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였다. 스님들은 한양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이 정책은 무려 500년 넘게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1895년, 고종 32년에 해제되었다. 일본 일련종 승려의 요청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쨌든 이 해금(解禁) 이후 조선 불교는 서울 도심 진출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1895년

승려 도성 출입 금지 해제

고종이 500년 억불 정책의 핵심 조치를 철폐. 한국 불교의 서울 도심 복귀가 시작되다.

1910년

각황사(覺皇寺) 창건 — 조계사의 전신

종로구 수송동에 4대문 안 최초의 사찰 창건. 조선불교의 민족 자주화와 근대 포교의 거점이 되다.

1912년

견지동 국유지 기록 — 이 기초조사의 시점

일제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견지동 국유 대지 2필지 9,847㎡가 기록됨. 각황사 창건 직후, 불교 재건 운동이 종로 도심에서 타오르던 시점.

1937~38년

태고사 건립 — 현 조계사 터 확정

각황사 옆 부지에 태고사 신축. 전북 정읍의 보천교 십일전을 해체 이전해 대웅전 건립. 견지동이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 완성되다.

1962년

조계사(曹溪寺)로 개칭

대한불교조계종 출범과 함께 현재의 이름으로 확정.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가 한국 불교 총본산의 공식 주소가 되다.

1912년, 이 땅에는 무엇이 있었나

1912년 견지동의 국유 대지가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직접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 조선시대 이 지역은 한성부 중부 수진방(壽進坊)의 핵심 지역이었다. 수진방은 종로 근처의 중요 방(坊)으로, 관아나 양반가, 주요 공공 시설이 집중된 구역이었다. 국유 대지라는 특성상 관아 부속 시설이나 군사 관련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910년 각황사 창건과의 시간적 근접성도 주목해야 한다. 불교계는 총본산 건립을 위해 인근 부지를 지속적으로 물색하고 있었다. 1935년 조선불교 본산주지회의에서 '총본산 건축'을 결의할 당시, 위치로 선정된 것이 각황사 옆의 '중앙교무원 사무소 부지'였다. 견지동의 국유 대지가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정밀한 문헌 조사와 발굴조사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현재 조계사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이다. 즉, 1912년 기록된 견지동 국유 대지는 지금 조계사가 자리한 바로 그 주소권 안에 있다. 이 땅의 지층 아래에는 조계사 이전 시대의 건물 흔적과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 해설

종로 도심, 그것도 조계사 인근의 국유 대지를 조사한다는 것은 여느 지역과는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건물이 중첩되어 세워진 곳은 문화층이 복잡하게 교란되어 있고, 각 시대의 유구가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현장에서 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1

지표조사 — 1912년 토지조사부가 첫 번째 단서

문헌 조사 단계에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은 핵심 자료다. 국유 대지라는 사실, 2필지 구성, 인근 각황사(현 조계사) 창건 시점과의 시간적 연관성을 종합 분석해야 한다. 현지 답사에서는 현재 지표면에서 관찰되는 건물 기단, 석재, 도자기 편 등의 유물 산포 여부를 기록한다.

2

표본조사 — 복층 문화층 확인의 첫 삽

종로 도심 대지에서는 표본조사 단계부터 층위 분석에 집중해야 한다.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 → 해방 이후까지 여러 시대의 건물이 같은 자리에 세워지고 허물어진 경우, 각 지층에 서로 다른 시대의 유물이 혼재한다. 2% 이내의 좁은 면적에서도 층위별 유물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다.

3

시굴조사 — 건물 기단과 우물의 위치 파악

국유 대지 조사에서 시굴 트렌치 배치는 건물 기단선을 따라 설계되어야 한다. 우물, 배수로, 온돌 구조, 담장 기초 등의 건축 관련 유구가 발견되면 즉시 확장 조사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조계사 인근 대지라면 불교 관련 건물 유구의 가능성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4

정밀발굴조사 — 종로 역사의 전면 복원

확인된 유구 전체를 정밀 발굴. 종로 도심 대지에서는 고려~조선~근대 복층 유적이 나올 수 있다. 중요 유구 발견 시 사적 지정 가능성이 높다. 불교 관련 유물은 국가유산청의 별도 심의를 거쳐 문화재 등록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종로 도심 대지 조사 시 핵심 주의사항

종로 도심은 지하 개발이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된 구역이다. 지하철 1·3·5호선이 통과하고, 다수의 건물 지하층이 깊이 파여 있다. 이런 환경에서 문화재 조사의 가장 큰 도전은 '아직 교란되지 않은 구역'을 찾아내는 것이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기존 건물 기초의 깊이와 범위를 먼저 파악하고, 그 사이에 남아 있는 원지형(原地形) 구역을 선별하는 작업이 전체 조사의 효율을 결정한다.

종로 도심 대지에서는 굴착 장비 사용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층이 복잡하게 교란된 환경에서 무분별한 굴착은 유구를 단번에 파괴할 수 있다. 반드시 수작업 노출 → 정밀 기록 → 단계별 확장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5

종로 도심 발굴 성공 사례 — 땅속 역사를 꺼낸 순간들

서울 종로구는 대한민국에서 문화재 발굴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다. 경복궁, 창덕궁, 종묘 — 조선 500년의 핵심 유산이 몰려 있는 이 지역에서, 작은 공사 하나가 예상치 못한 역사를 꺼내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견지동 국유지 기초조사가 왜 중요한지, 세 가지 사례가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례 1 · 종로구 수송동

수송동 재개발 부지 — 조선 전기 중앙관아 유구 발굴

견지동 바로 인접한 수송동 재개발 과정에서 조선 전기 중앙관아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대거 출토되었다. 이 지역이 조선시대 행정의 중심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견지동 국유 대지에서도 유사한 관아급 건물 유구가 확인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 사례는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지표조사와 시굴조사의 충실한 이행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사례 2 · 종로구 인사동 인근

인사동 문화지구 지하 공사 — 조선 후기 기와 건물 유구 확인

견지동과 맞닿아 있는 인사동 일대 지하 공사 현장에서 조선 후기 기와 건물의 기단과 온돌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특히 이 구역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파편들은 조선 후기 도심 생활 문화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도심 한복판에서도 충분한 두께의 문화층이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례였다.

사례 3 · 종로구 견지동 인근

조계사 경내 불교 유물 조사 — 목불좌상과 근대 불교 유물 현황

조계사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6호인 목불좌상을 보유하고 있다. 조계사 경내에서 이루어진 각종 정비 공사 과정에서 1930년대 이전 사찰 건축의 흔적들이 확인된 사례들이 있다. 이는 견지동 일대의 국유지에도 1912년 이전 시대의 불교·관아 관련 건물 유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조계사 및 불교중앙박물관의 자료와 연계 연구가 필요하다.



세 사례 모두 견지동에서 반경 500미터 이내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밀도 높은 역사의 지층 안에 견지동 국유 대지 9,847㎡가 자리하고 있다. 단 2필지지만, 바로 그 2필지가 이 역사적 층위의 핵심 블록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 — 이것이 이 기초조사가 가지는 진정한 무게다.


6

견지동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것

2필지 9,847㎡. 숫자는 작지만 이 땅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거대하다. 조선 500년 억불의 역사가 끝나고, 불교가 다시 서울 도심으로 돌아오던 바로 그 시절의 땅. 한국 불교 총본산 조계사의 탄생을 지켜본 바로 그 주소권의 땅. 경복궁과 창덕궁, 인사동, 청계천이 모두 걸어서 닿는 서울 역사의 중심부.

이 땅에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무엇이 나올 것인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땅은 분명히 무언가를 품고 있다. 조선시대의 관아 흔적일 수도 있고, 근대 초기 불교 재건 운동의 기억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이름조차 잊혀진 누군가의 생활 터일 수도 있다.

"가장 작은 필지 수, 가장 단순한 지목 구성. 그러나 견지동 2필지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무거운 역사적 무게를 지고 있다. 조선의 심장부에서 100년을 기다려온 땅이다."

당신이 지금 해야 할 것

종로구 견지동 또는 인근에서 건설 공사나 개발 계획이 있다면, 반드시 사전에 문화재 전문 기관에 지표조사를 의뢰해야 한다. 비록 전체 면적이 3만㎡에 미치지 않아 법적 의무 조사 기준에는 해당되지 않더라도, 종로 도심이라는 역사적 입지와 국유 대지라는 토지 특성을 고려할 때 자발적 지표조사는 단순한 선택이 아닌 역사적 책무에 가깝다. 발굴 비용보다 훨씬 큰 역사적 가치가 그 아래 잠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seoulheritage.org의 종로구 지역조사 카테고리에는 견지동 외에도 훈정동, 수송동 등 종로구 내 여러 지역의 1912년 국유지 기초조사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함께 펼쳐보면, 조선 왕도 한양의 토지가 어떤 방식으로 분류되고 관리되었는지, 그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 2필지가 품은 이야기 —


그것은 한국 불교 100년의 무게와 같다.

1912년 견지동. 2필지 9,847㎡의 대지. 억불의 시대가 끝나고 불교가 다시 서울 도심으로 돌아오던 그 격동의 순간, 이 땅은 조용히 그 역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표조사는 그 목격자에게 말을 걸어보는 일이다. 발굴조사는 그 증언을 기록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록을 진지하게 읽을 때, 비로소 견지동은 단순한 주소에서 살아 있는 역사의 좌표가 된다. 이 땅에 관심을 가진 당신이, 그 역사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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