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종로3가, 숫자 속에 숨겨진 도시의 기억과 토지의 진실
- 2025년 12월 27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지하철 종로3가역, 그 아래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1912년 종로3가 토지조사로 읽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출발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종로3가, 종로구 역사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를 스쳐 지나간 게 몇 번인지 기억나?
근데 그 역 바로 아래에 113년 전 사람들의 집이 있었다는 건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
높은 빌딩도, 네온사인도 없던 시절. 그런데 종로3가는 이미 숨이 막힐 정도로 꽉 찬 동네였어. 180필지, 24,129제곱미터. 이 숫자 안에는 도시의 욕망과 사람의 생존이 겹겹이 쌓여 있어.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 문화재 발굴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왜 필요한지와 정확히 연결돼.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종로3가를 걷는 발걸음이 달라질 거야. 확실하게.
목차
1장. 1912년 종로3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출발선
2장. 종로3가는 이미 꽉 찬 주거지였다
3장. 단 한 필지의 국유지가 말해주는 것
4장. 김씨·이씨·최씨, 성씨로 읽는 종로의 주인들
5장. 일본인과 중국인 토지 소유, 숫자 너머의 현실
6장. 종로3가 토지 구조가 오늘날까지 남긴 흔적
7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중요한 이유
8장. 성공 사례로 보는 문화재 조사와 도시의 공존
9장. 숫자를 알면 도시가 움직인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

11912년 종로3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출발선
지금 우리가 아는 종로3가는 낡은 극장 간판, 좁은 골목, 포장마차, 그리고 끊임없이 오가는 사람들로 채워진 곳이야. 근데 113년 전, 그 시작점은 지금이랑 완전히 달랐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이 그 시작점 위에 덧씌워진 거야.
1912년 종로구 종로3가는 총 180필지, 24,129제곱미터였어. 이 숫자가 담담하게 들릴 수 있어. 근데 이 숫자를 하나씩 뜯어보는 순간, 도시 하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가 보이기 시작해. 180개의 필지는 180개의 이해관계야. 180개의 생활 단위이고, 180개의 이야기야. 문화재 발굴이나 문화재 지표조사를 이야기할 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 이건 도시의 DNA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전역 25개 구의 지역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면서, 어느 지역이 어떤 문화재 조사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판단하는 기초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어. 종로3가는 그 데이터 안에서도 특히 복잡하고 흥미로운 구조를 가진 지역이야.
180
총 필지 수
24,129㎡
총 면적
180
대지(집터) 필지
1
국유지 필지
11
일본인 소유 필지
13
중국인 소유 필지
2종로3가는 이미 꽉 찬 주거지였다
180필지 전체가 대지였어.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빈 공터도 없었어. 면적 24,129제곱미터 전부가 사람이 살거나 장사를 하던 땅이었다는 뜻이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밀도인지 감이 잘 안 올 수 있어. 쉽게 말하면, 한 평도 낭비하지 않은 거야.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종로의 상업적 성격이 1912년에도 그대로 살아 있었고, 오히려 더 촘촘해졌어. 사람이 몰렸고, 땅은 쪼개졌고, 골목은 더 복잡해졌어. 이런 고밀도 주거 상업 복합 지역은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최고 수준의 주의 구역이야.
땅 전체가 대지였다는 건, 조금만 파도 이전 시대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야. 종로 일대 재개발 현장에서 조선시대 유구, 생활 유물, 도로 흔적이 연이어 발견된 건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인 필연이야.
실제로 종로 일대에서는 재개발이나 지하 굴착 공사 과정에서 조선시대 도로층, 기단 유구, 생활 도자기 파편이 확인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어. 그때마다 공사는 멈추고, 문화재 지표조사나 시굴조사가 진행됐어. 180필지 전체가 대지였던 종로3가는 그런 의미에서 발굴 잠재력이 가장 높은 동네 중 하나야.

3단 한 필지의 국유지가 말해주는 것
180필지 중 국유지는 딱 1필지였어. 작아 보이지? 근데 이 숫자가 오히려 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국유지가 거의 없다는 건, 이 지역이 이미 완전히 민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야. 국가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땅에서 상업과 주거가 자연스럽게 결합했고, 그 결과 종로3가는 서울의 심장부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했어.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시전 상업의 전통이 이 민간 소유 구조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건 오늘날 문화재 조사 절차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공공의 땅이 적다는 건, 개인 재산권과 문화재 보호가 더 자주 충돌하는 구조라는 뜻이거든. 공사 전 문화재 지표조사 의뢰가 더 중요해지는 이유야. 사전에 조사하고 협의하지 않으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나중에 훨씬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국유지 1필지, 민간 소유 179필지. 이 구조는 종로3가가 얼마나 민간 생활 중심의 공간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줘. 발굴 단계에서 소유주 협의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4김씨·이씨·최씨, 성씨로 읽는 종로의 주인들
1912년 종로3가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보유한 성씨는 김씨였어. 36필지. 그다음이 이씨 27필지, 최씨 11필지였어. 상위 세 성씨가 전체 필지의 약 41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어.
이게 왜 중요하냐면, 특정 가문이 절대적으로 독점하지 않은 구조였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야. 다수의 소유자가 얽히고설킨, 진짜 의미의 도시 골목 구조였어. 각 가문이 인접한 땅을 나눠 가지면서 혈연과 경제 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었을 거야.
문화재 발굴 해석 단계에서 성씨 데이터는 생각보다 훨씬 쓸모가 많아. 동일 가문 소유지에서는 비슷한 생활 양식의 유물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거든. 같은 도공에게서 나온 도자기, 비슷한 기단 구조, 동일한 방향의 건물 배치. 이게 겹쳐 보이기 시작하면, 발굴단은 그 지역 전체의 생활 문화를 훨씬 더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어.
그리고 소유자가 많을수록 조사 동의와 협의 절차가 복잡해지는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종로 같은 지역을 다루는 문화재 발굴 기관들은 사전 소통과 설명을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

5일본인과 중국인 토지 소유, 숫자 너머의 현실
1912년 종로3가에서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는 11필지, 중국인 소유는 13필지였어. 합치면 24필지로, 전체의 13퍼센트를 넘어.
이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아. 종로3가가 단순히 조선의 동네만이 아니었다는 뜻이야. 이미 국제적인 상업 공간의 성격을 띠고 있었어. 중국 상인들은 조선 후기부터 종로 일대에 자리 잡아 온 긴 역사가 있었고, 일본인들은 경술국치 이후 빠른 속도로 서울 도심 핵심 지역에 진입하고 있었어.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이 한 골목 안에 뒤섞여 땅을 소유하던 공간. 1912년 종로3가는 그런 의미에서 이미 다층적인 역사 공간이었어. 이 다층성은 발굴 조사에서 서로 다른 문화층이 겹쳐 나올 가능성을 높여.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이런 다국적 소유 이력을 가진 지역은 독특한 층위를 보여줘. 조선식 생활 유구 위에 근대 일본식 건축 흔적이 덧씌워진 패턴, 중국식 도자기 파편이 섞인 생활층, 각기 다른 건축 재료와 배치 방식이 한 트렌치 안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거든. 이 복잡함이 발굴을 어렵게 만들지만, 동시에 훨씬 풍부한 역사 이야기를 품고 있어. 그래서 종로 일대는 문화재 지표조사 검색 시 항상 핵심 대상 지역으로 분류돼.
6종로3가 토지 구조가 오늘날까지 남긴 흔적
지금 종로3가를 걷다 보면 이상한 게 있어. 골목은 좁고, 건물들은 어깨를 맞대고 있고, 블록 구조가 불규칙해. 현대식 도시 재편이 됐다면 진작에 정리됐어야 할 것 같은데, 여전히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어.
그 이유가 1912년 토지조사에 있어. 180개의 작은 필지들이 촘촘하게 얽힌 구조는 도시 재편이 매우 어려운 형태야. 한 필지를 정리하려면 이웃한 여러 소유주의 동의가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면 개발은 멈춰. 그래서 지금도 종로 일대의 개발은 늘 조심스럽고 느려.
그리고 또 하나. 조금만 무리하면 문화재 훼손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종로는 땅 아래 유적 밀도가 서울에서도 손꼽힐 만큼 높은 지역이거든. 그래서 지표조사 없이 공사를 강행하는 건, 단순한 규정 위반이 아니라 역사를 영영 지워버리는 일이야.

7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중요한 이유
문화재 지표조사는 형식적인 서류 절차가 아니야. 땅을 파기 전,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최소한의 약속이야.
지표조사는 지표 위에 드러난 유물이나 유적 흔적, 지형적 특성, 문헌 기록을 종합해서 해당 지역에 문화재가 분포할 가능성을 판단해. 사업 면적이 3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법적으로 반드시 사전 지표조사를 해야 해. 이 결과를 국가유산청에 보고하면, 심의를 거쳐 원형 보존, 발굴조사 등 필요한 조치가 결정돼.
그 이후 단계가 시굴조사와 정밀발굴조사야. 시굴은 조사 면적의 10퍼센트 이내에서 트렌치를 파 확인하는 방식이고, 이 과정에서 중요한 유구가 나오면 정밀발굴로 넘어가. 발굴을 통해 사적이나 지방기념물로 지정되는 유적이 나오기도 하고, 출토 유물이 국보나 보물이 되기도 해.
종로3가처럼 1910년대부터 이미 밀집된 대지였던 곳은 이 모든 단계에서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생활 유구가 남아 있을 확률이 그만큼 높거든. 이걸 무시하고 개발을 강행하면 도시는 편해질지 몰라도, 역사는 영영 사라져.
지표조사는 과거를 붙잡는 절차가 아니야. 미래에 후회하지 않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확인 작업이야.
8성공 사례로 보는 문화재 조사와 도시의 공존
발굴이 개발을 막는다는 오해가 아직도 많아. 그런데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더 많아.
종로 일대의 한 재개발 구역에서는 1910년대 토지조사 기록을 바탕으로 선제적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했어. 조사단은 주거 밀집 기록과 도로 흔적을 분석해서 시굴 위치를 정했고, 그 결과 조선시대 도로 흔적과 주거지 유구가 확인됐어.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이 결과를 바탕으로 설계를 일부 조정했고, 공정 지연 없이 사업을 완료했어. 그리고 발굴 결과물은 지역 역사 전시 콘텐츠로 만들어져 그 동네 주민들이 자기 동네의 600년 역사를 처음으로 눈으로 볼 수 있게 됐어.
또 다른 사례도 있어. 서울 도심의 한 소규모 주택 신축 현장에서 사전 발굴조사 중 조선 후기 생활 도자기와 청동 유물이 출토됐어. 전문 문화재 발굴 기관이 투입돼 기록을 완료했고, 이후 건축 허가가 정상적으로 진행됐어. 발굴이 사업을 막은 게 아니라, 오히려 사업의 역사적 근거를 만들어준 거야.
이게 바로 문화재 조사와 도시 개발이 공존할 수 있다는 증거야. 과거를 덮는 개발이 아니라, 과거를 이해한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 그 시작은 언제나 제대로 된 지표조사야.

9숫자를 알면 도시가 움직인다, 그리고 우리의 선택
180필지, 24,129제곱미터. 김씨 36필지, 이씨 27필지, 최씨 11필지. 일본인 11필지, 중국인 13필지. 국유지 1필지.
이 숫자들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야. 지금 우리가 도시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야. 빠르게 짓고, 빨리 잊을 것인가. 아니면 한 번 멈추고, 확인하고, 기억할 것인가.
지금 종로3가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 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땅을 걸어온 수백 년의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야.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조사는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야. 미래를 더 단단하게 쌓는 선택이야.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지금 네가 걷는 종로3가의 바닥 아래에는,
김씨의 집이 있었고, 이씨의 마당이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저녁 연기가 피어올랐어.
그 기억을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이 도시는 조금 더 사람다워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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