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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종로1가, 서울의 심장이 깨어나던 순간

  • 2025년 12월 25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1912년 종로1가에 프랑스인이 살고 있었다— 서울의 심장에서 읽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단서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종로1가, 종로구 역사

종로1가 기록을 들여다보다가


멈칫하게 만드는 숫자가 하나 있었어.


프랑스인 소유 토지, 1필지.

조선의 심장, 일제가 장악하던 서울 도심 한복판에 프랑스인의 땅이 있었어. 외교였을까, 선교였을까, 아니면 근대 문물의 최전선이었을까. 이 한 필지가 품고 있는 이야기만으로도 종로1가는 단순한 '옛 거리'가 아니야. 93필지 안에 서울의 경제, 권력, 그리고 세계가 뒤섞여 있던 공간이었어.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면, 종로1가를 걸을 때 고개가 자연스럽게 숙여질 거야.

목차

  • 1장. 하루에도 수천 명이 오가던 거리, 그 시작

  • 2장. 숫자로 보는 1912년 종로1가의 실체

  • 3장.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 4장. 성씨로 읽는 종로1가 사람들 이야기

  • 5장. 일본인과 프랑스인 토지가 말해주는 시대의 공기

  • 6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중요한 이유

  • 7장. 종로1가에서 실제로 떠올릴 수 있는 성공 사례

  • 8장. 지금 우리가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1하루에도 수천 명이 오가던 거리, 그 시작

지금은 빌딩 숲과 간판 불빛으로 가득하지만, 1912년의 종로1가는 생각보다 훨씬 치밀하게 짜인 공간이었어. 총 93필지, 13,104제곱미터. 숫자만 보면 작아 보일 수 있어. 하지만 이 안에 당대 서울의 경제와 권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

종로는 늘 변화의 한복판이었고, 종로1가는 그 변화가 가장 먼저 닿는 자리였어. 조선 후기 시전의 중심지에서 근대 상업의 진원지로 탈바꿈하는 그 첫 번째 블록이 여기였어. 그래서 문화재 발굴이나 문화재 지표조사 이야기에서 종로1가가 빠지지 않는 거야. 이 땅 아래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는지,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볼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지역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문화재 조사 기초 데이터를 쌓고 있어. 종로1가가 포함된 종로구 지역조사도 그 일환이야. 어느 블록이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우선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데이터로 판단하는 작업이지.


2숫자로 보는 1912년 종로1가의 실체

1912년 종로구 종로1가는 전체 93필지 중 무려 92필지가 대지였어. 면적은 13,090제곱미터. 도로는 단 1필지, 13제곱미터에 불과했어.

93

총 필지 수

13,104㎡

총 면적

92

대지 필지

13,090㎡

대지 면적

15

일본인 소유 필지

1

프랑스인 소유 필지

도로가 13제곱미터. 이 수치가 얼마나 극단적인지 감이 와? 방 하나 크기야. 93필지 전체에서 공공을 위한 공간이 그만큼밖에 없었어. 나머지 전부가 소유되고 활용되는 땅이었던 거야. 이미 도로보다는 사람과 상업 중심으로 꽉 찬 공간이었다는 걸 이 한 줄이 말해주고 있어.

13㎡

종로1가 전체에서 도로에 해당하는 면적. 단 1필지. 93필지 중 공공의 공간이 이 정도밖에 없었어. 나머지는 전부 누군가의 집이고, 가게이고, 삶의 자리였어.

이런 구조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돼. 땅을 파보기도 전에 "이 지역은 무언가 나올 확률이 높다"는 판단의 근거가 되거든. 대지 밀도가 높을수록 생활 흔적의 밀도도 그만큼 높아져. 종로1가는 그 원칙이 완벽하게 적용되는 케이스야.



3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92필지 대지, 13,090제곱미터. 이 수치가 의미하는 건 종로1가가 단순한 통과 공간이 아니었다는 거야. 사람이 살고, 장사하고, 물건이 오가고, 정보가 교환되던 살아 있는 공간이었어.

한 채의 집 안에서 가게가 있고, 뒷방에서 가족이 살고, 앞마당에서 물건을 거래하던 구조. 조선 후기 시전 상인들의 전형적인 생활 방식이야. 이런 구조는 유물 밀집 가능성을 엄청나게 높여. 생활 유물, 상업 관련 도구, 외래 문물이 한 자리에서 동시에 나올 수 있는 환경이거든.

그래서 종로 일대는 문화재 지표조사 단계에서도 늘 긴장감이 높아. 발굴 경험이 많은 조사단도 "여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라는 공감대가 이미 형성돼 있어. 92필지 모두가 집터였다는 건, 92개의 이야기가 아직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야.

실제로 서울 도심 발굴 성공 사례 대부분이 이런 고밀도 옛 대지 구조에서 나왔어. 우물, 배수로, 온돌 기단, 생활 도자기가 층층이 쌓인 집터는 발굴단이 가장 기다리는 현장이야.


4성씨로 읽는 종로1가 사람들 이야기

1912년 종로1가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성씨는 김씨였어. 16필지. 그다음이 이씨 11필지였어.

김씨

16필지

이씨

11필지

일본인

15필지

프랑스인

1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야. 대대로 상업과 행정에 접근성이 높았던 가문들이 종로1가에 자리 잡았다는 의미야. 김씨와 이씨가 각각 16필지, 11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건, 이 가문들이 종로1가의 특정 구역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문화재 발굴 해석 단계에서 이 성씨 분포는 아주 유용한 단서야. 동일 가문 소유지에서는 비슷한 건축 양식과 생활 유물 패턴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거든. 그 패턴을 미리 파악하면 어느 구역에 집중적으로 트렌치를 파야 하는지 예측할 수 있어. 종로1가는 확실히 힘 있는 가문들이 모이던 공간이었고, 그 흔적은 지금도 땅 아래에 있을 거야.



5일본인과 프랑스인 토지가 말해주는 시대의 공기

1912년 종로1가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15필지 있었어. 전체 93필지 중 16퍼센트야. 충무로2가의 98퍼센트에 비하면 낮은 수치지만, 종로1가에서 일본인 15필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져. 종로는 조선인의 상업 중심지였어. 그 상징적인 거리에 이미 일본인 상업 거점이 15개나 형성돼 있었다는 건, 식민지 경제 침투가 종로의 심장부까지 도달했다는 신호야.

🇫🇷

그리고 여기서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한 필지가 나와. 프랑스인 소유 토지 1필지.

1912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 프랑스인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어. 외교관이었을까, 선교사였을까, 아니면 근대 문물을 들여온 상인이었을까. 이 한 필지가 어디에 위치했고 어떻게 쓰였는지는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야 실마리가 풀려.

실제 발굴조사에서 서양식 건축 자재나 수입 유물이 나오는 경우, 이런 외국인 소유 기록이 결정적인 해석 단서가 돼. 특정 도자기의 원산지, 특이한 건축 양식, 이국적인 생활용품 하나가 갑자기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거야. 종로1가의 프랑스인 1필지는 그런 단서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조선인, 일본인, 프랑스인이 한 골목에 땅을 나눠 가지던 공간. 1912년 종로1가는 단순한 조선 거리가 아니라 이미 국제적인 교차점이었어. 그 다층적인 역사가 땅속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6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중요한 이유

종로1가 같은 지역은 공사 전에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해. 기록만 봐도 이유는 명확해.

첫째, 밀집 주거지야. 92필지 대지, 도로 단 13제곱미터. 생활 유구가 촘촘히 쌓여 있을 가능성이 극히 높아. 둘째, 외국인 토지가 있었어. 일본인 15필지, 프랑스인 1필지. 다른 문화권의 흔적이 조선식 유물과 겹쳐서 나올 수 있는 환경이야. 셋째, 상업 중심지였어. 종로 시전의 핵심 구역으로서 상업 관련 유구와 외래 유물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

이 세 가지가 동시에 겹치는 곳이 종로1가야. 문화재 지표조사를 제대로 마쳤다면 국가유산청에 보고하고, 심의를 거쳐 시굴조사나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어. 사업 면적 3만 제곱미터 이상이면 법적 의무야. 그리고 이런 역사 밀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그 의무가 단순한 규정이 아니라, 영영 사라질 수 있는 기억을 마지막으로 지키는 기회야.

"설마 여기서 나오겠어?" 했던 곳에서 핵심 유물이 나오는 경우가 종로 일대에서는 실제로 반복돼 왔어. 조사 하나로 공사 일정이 바뀌고, 도시의 이야기가 복원돼.



7종로1가에서 실제로 떠올릴 수 있는 성공 사례

종로 인근 발굴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야.

한 재개발 구역에서 1910년대 토지조사 기록을 바탕으로 문화재 지표조사를 먼저 진행했어. 주거 밀집 기록과 다국적 소유 이력을 분석한 조사단은 시굴 위치를 사전에 좁혔고, 결과적으로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근대 상업 유물이 같은 층에서 확인됐어. 문헌에만 존재하던 상업 공간의 실체가 구조물로 눈앞에 나타난 거야. 이 성과는 단순한 보존을 넘어서, 지역 스토리텔링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관광 동선까지 새롭게 생겼어.

또 다른 사례. 소규모 건축 현장에서 사전 시굴 중 조선 후기 도자기와 수입 유물이 함께 출토된 경우가 있었어. 수입 유물의 존재는 그 구역에 외국인 소유지가 있었다는 기록과 맞아떨어졌어. 기록이 발굴을 예측했고, 발굴이 기록을 입증한 거야. 이후 공사는 정상적으로 진행됐어. 발굴이 개발을 막은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개발에 역사적 무게를 더해준 거야.

종로1가도 충분히 이런 성공 사례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어. 프랑스인 1필지, 일본인 15필지, 김씨·이씨 가문의 집터들. 이 조건들이 겹치는 발굴 현장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아직 아무도 몰라.



8지금 우리가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1912년 종로1가는 이미 완성형 도시였어. 93필지 안에 김씨 가문의 집, 이씨 가문의 가게, 일본인의 상업 거점, 그리고 프랑스인의 땅이 공존하던 공간이었어. 그 시절 이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돈을 쓰고, 다른 꿈을 꾸며 같은 좁은 골목에서 스쳐 지나갔을 거야.

이 기록을 읽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삶과 선택을 보고 있는 거야. 지금 종로1가에서 개발이나 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면,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봐. 법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겹쳐 있는 이 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기도 해.

언젠가 종로를 걸을 때, "여기 아래에 어떤 시간이 묻혀 있을까" 한 번쯤 떠올려봐. 그 순간, 도시는 그냥 길이 아니라 이야기가 돼.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1912년의 종로1가엔 프랑스 사람도 있었고,

일본 상인도 있었고, 조선 가문의 집도 있었어.

그 모든 사람이 같은 좁은 골목을 걸었어.

지금 네가 걷는 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이 도시는 조금 더 깊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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