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재동 토지조사, 조용한 골목 아래 숨 쉬던 도시의 심장
- 2025년 12월 23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재동 112필지, 예외 없이 전부 집터였다— 1912년 종로 재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가 만나는 지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재동, 종로구 역사
재동이라는 이름, 들어봤어?
헌법재판소 옆 그 고즈넉한 골목.
1912년 기록을 보면 뭔가 이상하게 깔끔해.
112필지. 전부 대지야. 예외가 하나도 없어. 밭도 없고, 임야도 없고, 잡종지도 없어. 이 112개 필지 전체가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는 뜻이야. 근데 그 안에 국유지 3필지가 조용히 끼어 있었어. 그리고 일본인 소유 3필지도. 112필지 중 딱 6필지가 그 시대의 균열을 보여줘.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재동 골목을 걸을 때 발아래가 달라 보이기 시작할 거야.
목차
1장. 재동이라는 동네가 특별한 이유
2장. 1912년 재동의 면적과 필지, 숫자가 말하는 진실
3장. 집만 있던 동네, 112필지 전부가 대지였던 이유
4장. 국유지 3필지가 보여주는 공공의 흔적
5장. 김씨와 이씨, 성씨 분포로 읽는 재동의 사회 구조
6장. 일본인 소유 토지 3필지가 남긴 시대의 균열
7장.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재동의 잠재력
8장. 발굴조사가 도시의 가치를 바꾼 실제 사례
9장. 재동을 기억하는 일이 지금 더 중요한 이유

1재동이라는 동네가 특별한 이유
재동은 지금 헌법재판소가 자리한 종로 한복판의 조용한 동네야. 창덕궁 남쪽, 북촌 한옥마을과 경계를 맞대고 있어. 관광객이 지나다니지만 정작 그 골목 안쪽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해. 오래된 담장, 낮은 지붕, 그리고 어딘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분위기. 그게 재동이야.
1912년의 재동은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전형적인 도심 주거지였어. 논도 없고, 밭도 거의 없고, 산도 없는 동네. 그 말은 곧 이곳이 생산의 공간이 아니라 생활의 공간이었다는 뜻이야. 사람들이 모여 살고, 정보가 오가고, 정치와 문화의 공기가 자연스럽게 스며들던 곳. 경복궁, 창덕궁이 지척이고 조선 조정의 핵심 관료들이 오가던 동네였으니, 재동이 얼마나 도시적으로 밀도 높은 공간이었는지 짐작이 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면서, 종로구 재동도 중요한 케이스로 기록되고 있어. 특히 112필지 전체가 대지라는 구조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고밀도 순수 주거지 사례야.
21912년 재동의 면적과 필지, 숫자가 말하는 진실
1912년 종로구 재동의 전체 면적은 48,410제곱미터. 필지 수는 112필지였어.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전체 필지 수와 대지 필지 수가 완전히 같다는 점이야. 112필지, 전부 대지. 예외가 없어.
112
총 필지 수
48,410㎡
총 면적
112
대지 필지 (전부)
3
국유지 필지
20
김씨 소유 필지
3
일본인 소유 필지
필지당 평균 면적은 432제곱미터. 중림동(329제곱미터)보다 크고, 충무로1가(947제곱미터)보다 작아. 적당한 크기의 필지들이 촘촘하게 배열된 구조였어. 이미 이 시점에서 재동은 완전히 도시화된 공간이었지. 농경지가 하나도 없다는 게 그 증거야.
3집만 있던 동네, 112필지 전부가 대지였던 이유
112필지 전부가 대지였어. 중림동(92.6%), 적선동(100%)에 이어 재동도 100퍼센트 대지 구조야. 근데 재동이 특별한 건 면적이 48,410제곱미터로 상당히 넓으면서도 예외 없이 전부 집터라는 거야.
100%
112필지 중 112필지가 대지. 밭, 임야, 잡종지 제로. 재동 전체가 담장과 담장이 맞닿고, 배수로가 골목 아래로 흐르고, 우물과 부엌이 이어지는 밀집 주거 공간이었어. 경복궁·창덕궁 인근 도심 가운데에서도 이런 순수 주거 밀집 구조는 이례적이야.
이런 공간은 문화재 지표조사 대상지로 늘 긴장감을 주는 동네야. 생활 유적이 연속적으로 남아 있을 확률이 아주 높거든. 담장 기초, 배수로, 우물, 온돌 흔적, 생활 도자기. 112개 집터 아래에 층층이 쌓인 이야기들이 아직 발굴을 기다리고 있어.
실제로 서울 도심 재개발 구간에서 이런 밀집 주거지를 발굴했을 때 조사 성과가 높은 편이야. 작은 필지들이 촘촘히 배열돼 있다는 건, 그만큼 생활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다는 뜻이거든.

4국유지 3필지가 보여주는 공공의 흔적
1912년 재동에는 국유지가 3필지 있었어. 112필지 중 2.7퍼센트.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도심 한가운데 국유지가 존재했다는 건 의미가 커.
🏛
국유지 3필지. 도로, 공공시설, 혹은 행정 목적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재동은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있어. 조선 후기 내내 왕실과 관련된 시설이나 관료들의 거주지가 이 일대에 분포했어. 그 공적 기능의 흔적이 국유지 3필지로 남아 있는 거야.
이런 국유지 주변에서는 관청 관련 유구나 공공시설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일반 주거지와는 다른 건축 양식, 더 정교한 배수 시설, 규격화된 기단 구조가 나올 수 있어.
재동은 단순한 민가 밀집지가 아니라, 공적 기능을 함께 담당하던 동네였다는 이야기야. 국유지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된다면, 그 주변부를 우선 발굴 대상으로 설정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 있어.
5김씨와 이씨, 성씨 분포로 읽는 재동의 사회 구조
재동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씨는 김씨와 이씨였어. 각각 20필지씩을 소유하고 있었지. 두 성씨가 정확히 같은 필지 수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도 흥미로워.
김씨
20필지
이씨
20필지
국유지
3필지
일본인
3필지
김씨 20필지, 이씨 20필지. 이건 단순한 소유 비율이 아니야. 재동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던 두 중심 가문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야. 한 가문이 여러 필지를 소유했다는 건, 대가족 형태의 주거 구조 혹은 세대를 이어온 터전일 가능성이 커.
적선동(김씨 53필지 독주)과 달리 재동은 김씨와 이씨가 정확히 같은 비율로 공존하는 구조야. 두 가문이 재동을 어떻게 나눠 가졌는지, 어느 쪽에 집중돼 있었는지를 지도 위에 올려놓으면 그 공간 권력의 배치가 보여. 그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 발굴 단계에서 담장 흔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거야.

6일본인 소유 토지 3필지가 남긴 시대의 균열
1912년 재동에는 일본인이 소유한 토지가 3필지 있었어. 전체 112필지의 2.7퍼센트야. 충무로2가(98%), 충무로1가(81%), 초동(72.5%)과 비교하면 극히 낮은 수치야. 그런데 이 3필지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줘.
재동은 김씨·이씨 가문이 단단하게 지키고 있던 조선 도심 주거지였어. 그 안에 일본인 소유 3필지가 조용히 끼어든 것은 아직 초기 침투 단계였다는 뜻이야. 하지만 이 3필지는 이후 재동의 토지 구조가 어떻게 바뀔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어.
이 시기는 토지조사사업이 막 완료된 직후야. 3필지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었어. 실제로 일본인 소유 토지 인근에서는 건축 양식 변화, 기존 주거지 해체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아. 발굴조사 현장에서 이 경계는 굉장히 중요해. 조선의 시간과 식민지 시기의 시간이 겹쳐 나타나거든. 재동의 3필지가 어디에 위치했는지가 파악된다면, 그 주변부를 중심으로 두 층위가 교차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어.
7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본 재동의 잠재력
재동은 문화재 발굴 기관 입장에서 보면 교과서 같은 동네야. 주거 밀집도 높고, 국유지 존재하고, 성씨 분포가 뚜렷하고, 외국인 소유 토지까지 확인돼.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이 공간이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지 먼저 묻는 과정이야. 재동의 경우 48,410제곱미터라는 면적이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 이상)을 넘어. 재동 전체에 걸쳐 지표조사를 진행하면, 생활 유물 산포 지점과 지형 변화만으로도 상당한 정보가 확인될 거야.
특히 국유지 3필지와 일본인 소유 3필지가 각각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파악하면, 발굴 트렌치 위치를 훨씬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어. 두 종류의 필지가 만나는 경계 지점에서 두 시대의 건축 층위가 겹쳐 나타날 가능성이 높거든.
재동은 종로·충무로 시리즈를 통틀어 일본인 소유 비율이 가장 낮은 동네야. 이건 역설적으로 조선 후기 생활 유구가 가장 온전하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외부 교란이 적었던 만큼, 층위가 더 깨끗하게 보존됐을 수 있어.

8발굴조사가 도시의 가치를 바꾼 실제 사례
종로 일대 다른 동네에서는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조선 후기 생활 유적이 대거 확인된 사례가 있어.
한 재개발 현장에서 처음엔 공사 지연을 걱정했어. 그런데 발굴 결과 담장 경계, 공동 우물, 온돌 흔적이 연속층으로 확인되면서 그 동네의 역사성이 처음으로 입증됐어. 결과적으로는 지역의 역사성을 살린 개발로 이어졌고, 발굴 성과가 지역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돼 상권과 이미지가 오히려 살아났어.
재동도 충분히 같은 길을 갈 수 있어. 과거를 숨기는 대신, 과거를 이야기로 만드는 선택. 헌법재판소 옆 그 조용한 골목이 사실 600년 역사를 품은 공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발굴이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세상에 꺼낼 수 있어.
9재동을 기억하는 일이 지금 더 중요한 이유
1912년 재동의 숫자들은 말이 없어 보여. 하지만 하나씩 풀어보면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 여기에는 사람이 살았고, 국가가 개입했고, 시대의 균열이 시작됐다고.
112필지 전부 대지. 국유지 3필지. 김씨·이씨 각 20필지. 일본인 3필지. 이 숫자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재동 골목을 만들었어. 충무로의 그것과는 달리, 재동은 조선인의 땅이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아 있었어. 그 말은 조선 후기 생활의 흔적이 더 두껍게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야.
문화재 발굴과 문화재 지표조사는 과거를 붙잡는 일이 아니야. 지금의 도시를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일이야. 재동은 아직도 그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어.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112필지 전부가 집터였던 그 골목.
김씨와 이씨가 각각 20필지를 지키고 있던 그 동네.
그리고 조용히 3필지가 다른 이름이 되기 시작하던 그 시간.
재동은 그 모든 걸 아직 기억하고 있어.

그 기억을 꺼내려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이 골목은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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