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장사동, 251필지에 담긴 조선 말 서울의 생활 지도
- 서울 HI
- 2025년 12월 22일
- 2분 분량
목차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장사동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밭이 남아 있었다는 뜻
성씨 분포로 본 장사동의 사회 구조
국유지 단 한 필지가 말해주는 것
일본인과 중국인 토지가 던지는 질문
장사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1장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장사동
1912년 장사동은 251필지, 45,821㎡.
이 숫자만 보면 그냥 행정자료 같다.
하지만 이건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들어진 토지조사부 한 장이고,
그 한 장은
수백 가구의 삶을 통째로 봉인한 기록이다.
장사동은
지금도 ‘상업’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1912년에도 이미
사람이 밀집해 살던 전형적인 도심 주거지였다.
이 시기의 종로는
논밭보다
집이 먼저 들어찬 공간이었다.

2장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1912년 장사동의 핵심은
압도적인 대지 비율이다.
246필지
43,325㎡
전체 면적의 대부분이
이미 ‘집터’였다.
이 말은 곧
장사동이
농촌에서 도시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도시였다는 뜻이다.
마당이 좁은 집
골목을 사이에 둔 집
상점과 주거가 섞인 공간
사람들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살던 구조다.
이런 지역은
지표조사 단계에서도
생활유적이 나올 확률이 높다.
우물
배수로
기단석
기와 조각
그래서
장사동 같은 동네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항상 주의 깊게 보는 구역이다.

3장 밭이 남아 있었다는 뜻
밭은
5필지
2,495㎡
적어 보이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단서다.
완전히 개발된 도심이라면
밭은 사라진다.
그런데 남아 있었다는 건
장사동 어딘가에
텃밭
빈터
혹은 완충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밭은
후대에
건물이 올라가며
지하에 생활층을 남긴다.
그래서 실제 발굴 현장에서는
밭이 있던 구간에서
의외의 유물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표조사에서
‘밭’ 표시는
절대 가볍게 보면 안 된다.

4장 성씨 분포로 본 장사동의 사회 구조
장사동은
특정 가문이 독점한 동네가 아니었다.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
박씨 20필지
정씨 18필지
최씨 11필지
여러 성씨가
고르게 섞여 있다.
이건
상업과 주거가 결합된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양반 단독 거주지였다면
한 성씨가 압도했을 것이다.
장사동은
상인
장인
중간계층이
함께 살던 공간이었다.
그래서 골목은 촘촘했고
집은 빽빽했다.
이 구조가
지금까지도
종로 골목의 DNA로 남아 있다.

5장 국유지 단 한 필지가 말해주는 것
국유지
1필지
이 한 줄은
조용하지만 무겁다.
관청
도로
공공시설
아직 드러나지 않은
국가 기능의 흔적일 수 있다.
이런 필지는
재개발이나 공사 전에
반드시 문화재 조사가 들어가는 지점이다.
실제 사례에서도
작은 국유지 하나에서
도로 유구나 배수시설이
나온 경우가 많다.
숫자는 작아도
의미는 크다.

6장 일본인과 중국인 토지가 던지는 질문
일본인 소유
17필지
중국인 소유
1필지
1912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결코 작지 않다.
이미
외국인 소유 토지가
도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필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고
지하 구조도 다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발굴조사에서는
외국인 소유 필지가
늘 중요한 체크 포인트가 된다.
장사동은
이미 국제 도시의 문턱에 서 있었다.

7장 장사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이 기록은
과거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재개발
도시정비
지하 공사
이 모든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는
가장 먼저 펼쳐보는 자료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출발점이다.
장사동은
숫자로 보면 평범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하고 살아 있는 동네다.
그리고
이런 동네일수록
땅 아래 이야기는 더 많다.
우리가 걷는 길 아래에
누군가의 부엌이 있었고
누군가의 마당이 있었고
누군가의 하루가 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게
문화재 발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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