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장사동, 251필지에 담긴 조선 말 서울의 생활 지도
- 2025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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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30일
문화재 발굴 · 종로구 역사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 아무도 독점하지 않은 동네— 1912년 종로 장사동 토지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의 연결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문화재발굴, 지표조사, 장사동, 종로구 역사
장사동 기록에서 처음 눈에 띈 건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였어.
정확히 같아. 아무도 이기지 않은 구조.
주자동(93.9% 일본인)과 재동(일본인 2.7%), 이 시리즈에서 봐왔던 두 극단 사이에 장사동이 있어. 일본인 17필지, 중국인 1필지. 외국인이 들어왔지만 아직 조선인 가문이 동네를 지키고 있었어. 그리고 여기엔 밭도 있었어. 5필지, 2,495제곱미터. 도심인데 아직 밭이 남아 있었다는 게 장사동의 복잡한 위치를 말해줘.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왜 이 동네가 문화재 발굴에서 주목받는지 자연스럽게 이해될 거야.
목차
1장. 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장사동
2장. 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3장. 밭이 남아 있었다는 뜻
4장. 성씨 분포로 본 장사동의 사회 구조
5장. 국유지 단 한 필지가 말해주는 것
6장. 일본인과 중국인 토지가 던지는 질문
7장. 장사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1숫자로 시작하지만 사람으로 끝나는 장사동
1912년 장사동은 251필지, 45,821제곱미터. 이 숫자만 보면 그냥 행정자료 같아. 하지만 이건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들어진 토지조사부 한 장이고, 그 한 장은 수백 가구의 삶을 통째로 봉인한 기록이야.
장사동은 지금도 상업의 이미지가 강해. 종로 인쇄 골목, 작은 가게들, 오래된 상점 거리. 그런데 1912년에도 이미 사람이 밀집해 살던 전형적인 도심 주거지였어. 논밭보다 집이 먼저 들어찬 공간. 상인과 장인, 중간계층이 함께 살던 골목 동네가 1912년의 장사동이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체 토지 기록을 분석하면서, 장사동은 성씨 분포의 균형감과 밭·대지 혼재 구조 덕분에 이 시리즈에서 독특한 위치를 갖는 케이스야. 어느 한쪽이 압도하지 않는 구조가 오히려 더 복잡한 발굴 가능성을 품고 있어.
251
총 필지 수
45,821㎡
총 면적
246
대지 필지
5
밭(전) 필지
41
김씨·이씨 각 소유
17
일본인 소유 필지
2집이 거의 전부였던 동네의 정체
1912년 장사동의 핵심은 압도적인 대지 비율이야. 246필지, 43,325제곱미터. 전체 251필지 중 98퍼센트가 집터였어. 이 말은 곧 장사동이 농촌에서 도시로 변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도시였다는 뜻이야.
마당이 좁은 집, 골목을 사이에 둔 집, 상점과 주거가 섞인 공간. 사람들이 서로의 숨결을 느끼며 살던 구조야. 이런 지역은 지표조사 단계에서도 생활유적이 나올 확률이 높아. 우물, 배수로, 기단석, 기와 조각. 그래서 장사동 같은 동네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항상 주의 깊게 보는 구역이야.
246필지 대지. 이 숫자는 단순한 토지 분류가 아니야. 246개의 생활 단위가 층층이 쌓여 있다는 뜻이야. 각 집터마다 우물 하나, 배수로 하나, 기단석 하나씩이 지금도 땅속에 남아 있을 수 있어.

3밭이 남아 있었다는 뜻
장사동에는 밭이 있었어. 5필지, 2,495제곱미터. 적어 보이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단서야.
🌿
밭 5필지, 2,495제곱미터. 완전히 개발된 도심이라면 밭은 사라져. 그런데 남아 있었다는 건 장사동 어딘가에 텃밭, 빈터, 혹은 완충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야. 도심 한가운데 아직 흙을 일구는 사람이 있었던 거야.
이 밭은 후대에 건물이 올라가면서 지하에 생활층을 남겼을 거야. 그래서 실제 발굴 현장에서는 밭이 있던 구간에서 의외의 유물이 나오기도 해. 농경 흔적과 생활 유적이 경계를 맞대고 나타나는 복합 층위. 중림동에서 봤던 그 패턴이 장사동의 작은 밭 5필지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있어.
지표조사에서 밭 표시는 절대 가볍게 보면 안 돼. 완전한 도시화 이전의 마지막 흔적이거든. 그 경계 지점이 어디인지를 파악하는 게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돼.
4성씨 분포로 본 장사동의 사회 구조
장사동은 특정 가문이 독점한 동네가 아니었어. 이게 이 시리즈에서 장사동이 독특한 이유 중 하나야.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
박씨
20필지
정씨
18필지
최씨
11필지
일본인
17필지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 정확히 같아. 박씨 20필지, 정씨 18필지, 최씨 11필지까지. 여러 성씨가 고르게 섞여 있어. 이건 상업과 주거가 결합된 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이야. 양반 단독 거주지였다면 한 성씨가 압도했을 거야.
장사동은 상인, 장인, 중간계층이 함께 살던 공간이었어. 그래서 골목은 촘촘했고 집은 빽빽했어. 이 구조가 지금까지도 종로 골목의 DNA로 남아 있는 거야. 문화재 발굴 해석 단계에서 이 균형 잡힌 성씨 분포는 중요한 단서야. 특정 가문의 흔적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이 섞인 생활 유물군이 나올 가능성이 높거든.

5국유지 단 한 필지가 말해주는 것
국유지 1필지. 이 한 줄은 조용하지만 무거워. 주자동(3필지), 재동(3필지), 중림동에 비해 더 적어. 251필지 중 1필지. 0.4퍼센트야.
하지만 이 한 필지가 관청, 도로, 공공시설 중 어느 것이었는지에 따라 발굴 방향이 달라져. 국유지 인접 구역에서는 도로 유구나 배수시설이 나온 경우가 많거든. 그리고 공공 기능을 위해 지어진 건물은 일반 주거지보다 규격화된 기초 구조를 갖는 경우가 많아. 숫자는 작아도 의미는 커.
재개발이나 공사 전에 문화재 조사가 들어가야 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국유지 인접 구역이야. 작은 국유지 하나에서 도로 유구나 배수시설이 나온 사례가 실제로 있어. 단 1필지라도 가볍게 보면 안 돼.
6일본인과 중국인 토지가 던지는 질문
일본인 소유 17필지, 중국인 소유 1필지. 1912년이라는 시점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결코 작지 않아. 이미 외국인 소유 토지가 도심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는 뜻이거든.
🇯🇵
17필지
일본인 소유 · 6.8%
🇨🇳
1필지
중국인 소유 · 0.4%
주자동(93.9%)처럼 전면 점령은 아니야. 장사동은 조선인 가문이 여전히 동네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어. 김씨·이씨 각 41필지 대 일본인 17필지. 아직 경쟁 중이었던 거야. 그 경계가 어디에 있었는지가 발굴의 핵심 질문이 될 수 있어.
이런 필지는 건축 양식도 다르고 지하 구조도 다른 경우가 많아. 조선인 가문 소유지에서는 조선식 기와와 온돌 흔적이, 일본인 소유지에서는 일본식 기초 방식과 배수 구조가 나올 수 있어. 두 양식이 경계를 맞대고 나타나는 그 지점을 찾아내는 게 장사동 발굴의 가장 흥미로운 순간이 될 거야. 중국인 소유 1필지에서는 종로2가에서 봤던 것처럼 화교 상권 흔적이 나올 가능성도 있어.

7장사동 토지조사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이 기록은 과거 이야기로 끝나지 않아. 재개발, 도시정비, 지하 공사. 이 모든 과정에서 1912년 토지조사는 가장 먼저 펼쳐보는 자료야.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출발점이거든.
장사동은 숫자로 보면 평범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주 복잡하고 살아 있는 동네야. 김씨·이씨 균형 구조, 밭 5필지, 일본인 17필지, 국유지 1필지. 이 네 가지가 한 동네 안에 공존하고 있었어. 그 복잡함이 발굴 현장에서 그대로 나타날 거야.
45,821제곱미터로 법적 지표조사 의무 기준(3만 제곱미터 이상)을 넘어. 장사동에서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문화재 지표조사는 법적 의무이자, 이 동네가 품고 있는 복층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낼 기회야.
우리가 걷는 길 아래에
누군가의 부엌이 있었고,
누군가의 마당이 있었고,
누군가의 하루가 있었다.
그걸 기억하는 게 문화재 발굴의 시작이야.

끝까지 읽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
김씨 41필지, 이씨 41필지.
아무도 이기지 않은 채로 서로 골목을 맞대고 살던 동네.
그 골목 아래에 부엌이 있었고, 마당이 있었고, 밭이 있었어.
장사동은 그 모든 걸 품고 아직 거기 있어.

그 기억을 꺼내려는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날수록,이 골목은 조금 더 오래, 더 단단하게 남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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