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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송월동, 근대의 문턱 위에 서 있던 서울의 조용한 언덕 마을

목차


  1. 서문: ‘시간의 토지’를 걷다

  2. 송월동의 면적과 풍경 – 165필지의 이야기

  3. 대지 위의 삶 – 136필지의 집들이 남긴 흔적

  4. 임야와 밭, 땅의 기억이 남은 자리

  5. 송월동의 성씨 지도 – 이씨와 김씨의 마을

  6. 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의 등장 – 근대 서울의 변곡점

  7. 미국인과 영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발자국

  8. 문화재발굴로 다시 읽는 송월동의 시간

  9. 오늘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와 그 의미

  10. 결론: 땅이 말하는 시간의 언어



서문: ‘시간의 토지’를 걷다


커다란 서류철을 펼쳐보면 오래된 종이에서 묘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는 단순히 오래된 기록의 향이 아니라, 한 시대의 숨결이다.


1912년의 종로구 송월동, 지금의 서울 한복판이지만 당시엔 언덕과 골목이 맞물린 작은 마을이었다.

그 시절 이곳의 대지는 165필지, 총면적 52,803㎡.

이 땅의 면적은 숫자로만 보면 평범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들의 꿈과 불안, 변화와 저항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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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월동의 면적과 풍경 – 165필지의 이야기


1912년이라는 시점은 일제강점기의 초입부, 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송월동은 경복궁 서쪽, 지금의 서촌 인근과 맞닿은 지역으로, 그 지형은 남향 언덕에 비스듬히 서 있던 전통 가옥들이 즐비했다.


당시 송월동에는 165필지, 총 52,803㎡의 토지가 존재했다.

이 중 대부분이 대지였고, 일부는 밭과 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을은 조선 후기 양반가의 종택과 상민의 집들이 섞여 있던 ‘혼합형 마을 구조’로, 그 다양성이 오늘날의 도시적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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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위의 삶 – 136필지의 집들이 남긴 흔적


1912년 송월동의 대지는 136필지, 22,886㎡에 달했다.

즉, 전체의 절반 이상이 주거지로 사용되었다는 의미다.

그 집들 안에서는 다다미 위에 앉은 일본인 관리의 발소리와, 흙벽에 기대앉아 된장을 빚던 조선 여인의 손길이 교차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당시의 기와, 청자 파편, 그리고 도기 조각들이 발견되며, 송월동은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공간이었음이 드러났다.

그곳은 근대와 전통이 동시에 머물던, 이중적 시간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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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와 밭, 땅의 기억이 남은 자리


송월동에는 2필지의 임야(11,054㎡)와 6필지의 밭(4,971㎡)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건물로 덮여 있지만, 발굴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유물의 흔적은 이 땅이 농경과 생활의 경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밭에서는 토기 파편과 생활용기들이 발견되었고, 임야에서는 석축의 흔적과 돌무더기가 확인되었다.

이는 일제 시기 이전 송월동이 단순한 주거지뿐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가진 ‘생활 복합지대’였다는 걸 보여준다.



송월동의 성씨 지도 – 이씨와 김씨의 마을


1912년 당시 송월동에서는 이씨가 30필지, 김씨가 28필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존재는 곧 이 마을의 기반을 형성한 토착 세력의 흔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성씨의 토지 비중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며, 송월동이 ‘이씨·김씨 중심 마을’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의 조사에 따르면, 송월동 일대의 도로 구조와 필지 배치는 당시 문중의 사유지 경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이는 지금도 골목의 방향이나 담장 흔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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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지와 외국인 소유지의 등장 – 근대 서울의 변곡점


1912년 송월동에는 국유지가 2필지 존재했다.

이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된 이후, 총독부 재산으로 편입된 구 궁방(宮房) 토지였다.

이 국유지들은 이후 일본인과 서양인에게 임대되거나 매각되며, 서울 도심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기점이 된다.


이 시기는 곧 문화재발굴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지표조사에서 당시 건물지 하단에서 근대식 벽돌조 건물 흔적과 함께 일본제 도자기 조각이 다수 발견되어, 식민 초기의 도시 재편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미국인과 영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발자국


당시 송월동에는 미국인이 3필지, 영국인이 1필지, 일본인이 3필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근처 외국인 선교단체, 영사관, 혹은 학교 관련 인물들이었다.

특히 미국인 소유의 토지에는 당시 배재학당 관련 인물이 머물렀던 흔적이 있으며, 영국인 소유지에서는 19세기 말 서양식 건물 기초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는 서울의 근대적 도시 구조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후 그 자리는 일본인 상인과 기업가에게 넘어갔고, 현재는 관공서와 학교, 주거지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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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발굴로 다시 읽는 송월동의 시간


오늘날 송월동의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이 땅의 시간을 되살리는 열쇠다.

유적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유물발굴자료들은 단순한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서울이 어떻게 지금의 서울이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증거다.


발굴조사원들은 매일같이 도심 속 도로 밑, 공사장 한쪽에서 이런 유적발굴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재발굴조사장비를 통해 층위를 기록하고, 유물발굴의 맥락을 해석하며, 문화재발굴과정 전반을 데이터화한다.

이 과정이 바로 도시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을 동시에 실현하는 서울의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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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와 그 의미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서도 발굴조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 등은 건축이나 개발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화재 관리의 첫 관문이다.

이는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한 ‘시간의 방어선’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센터에서는 송월동뿐 아니라, 을지로, 종로, 청계천 일대의 과거 지층을 분석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서울이 어떻게 확장되고,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를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결론: 땅이 말하는 시간의 언어


1912년 송월동의 165필지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 숫자 속엔, 삶과 기억이 깃들어 있다.

지금의 건물 아래에는 아직도 그들의 이야기가 묻혀 있고, 발굴조사원들의 손끝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깨어난다.


우리가 문화재를 발굴한다는 것은, 단순히 돌을 캐내는 일이 아니다.

그건 ‘시간을 되살리는 행위’이며, 그 속에 나와 당신의 미래가 함께 놓여 있다.

송월동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한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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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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