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사간동, 그 시절 땅과 사람의 이야기 – 서울 문화유산 속 숨은 시간 여행
- 서울 HI
- 10월 15일
- 3분 분량
목차
사간동의 첫인상 – 1912년의 서울로 들어가다
126필지의 마을,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
사간동의 주인들 – 김씨와 이씨, 그리고 그들의 터전
법인 소유의 땅, 변화의 신호
일본인 소유지의 등장과 식민지기의 그림자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 1912년 사간동의 의미
문화재 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옛 마을의 흔적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속에서 배우는 현재와 미래

1912년, 종로구 사간동.
그곳은 지금의 번화한 도심이 아닌, 126필지의 대지 위에 삶의 온기가 서려 있던 작은 세상이었다.
서울의 중심 종로, 그 한가운데 자리한 사간동은 지금도 고즈넉한 한옥과 근대건축물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하지만 100여 년 전, 1912년의 사간동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이곳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변화의 길을 걸어왔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다.
1912년 당시, 종로구 사간동의 총 면적은 24,380㎡, 그리고 126필지의 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조용한 주거지와 소규모 상업지가 공존하던 형태였다. 좁은 골목마다 기와지붕이 이어졌고, 나무 울타리 너머로 사람들의 일상이 느릿하게 흐르던 시절이었다.
사간동의 주인들은 대부분 토박이 가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필지를 소유한 성씨는 김씨로, 35필지에 달했다. 이어서 이씨가 22필지를 소유하며, 두 성씨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는 당시 서울의 중심부에서도 전통적인 양반 가문이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씨와 이씨 집안의 대지는 대체로 중간 규모의 한옥이 모여 있었고, 일부는 상가 겸 주택 형태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땅이 개인의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법인 소유의 토지는 단 1필지였다. 이 소유지는 당시로서는 매우 특이한 형태로, 관청이나 종교단체, 혹은 근대적 회사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법인 소유지는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점차 늘어나며 서울의 도시 구조를 바꿔놓았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1912년 사간동에는 4필지의 일본인 소유지가 확인된다. 숫자로만 보면 많지 않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이 시기는 한일병합(1910) 직후로, 일본인들이 조선의 주요 지역, 특히 서울 중심부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던 때였다. 사간동의 4필지는 그러한 역사적 흐름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토지 분포를 살펴보면, 1912년의 사간동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예고하던 공간이었다. 전통적인 양반 가문의 대지와 근대 법인의 토지, 그리고 외국인의 부동산이 한데 섞여 있었다는 점에서 서울의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이 땅 위에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서울의 골목, 그 이름 하나하나가 과거 사람들의 삶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역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지표조사는 땅속에 숨어 있는 유적의 존재를 확인하고, 문화재 발굴의 기초 자료를 만드는 과정이다. 사간동처럼 오래된 지역에서는 이 조사가 필수적이다. 한 뼘의 땅을 파도, 그 아래에서 조선 후기의 기와, 일제강점기의 벽돌, 혹은 근대 초반의 도자기 파편이 나타나곤 한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서울의 도시계획과 문화재 보존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에서는 종로, 중구 등 역사 중심 지역의 시굴조사, 표본조사, 지표조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며, 사간동의 변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진행된 서울 중심부의 문화유산 조사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았다. 사간동 인근의 한 지점에서 조선 후기 관료의 저택 터가 발견되었고, 그 안에서 일본식 목재구조가 함께 발견되었다. 이는 1910년대 이후 서울의 공간이 얼마나 빠르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또한 발굴된 유물 중에는 한글과 한자가 함께 새겨진 도기, 일본식 생활용품, 조선식 기와가 섞여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인 흔적은, 당시 서울 사람들의 복잡한 정체성과 시대의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 서울의 도심 재개발이나 한옥 보존사업을 추진할 때, 반드시 이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선행된다. 단 한 필지의 땅이라도, 그 아래에는 백 년, 천 년의 역사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종로구 사간동처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지역은 서울시의 표본조사 및 시굴조사 대상으로 자주 선정된다. 이는 단순히 행정 절차가 아니라, 우리 도시가 과거와 대화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땅을 파는 일이 아니라, 기억을 되살리는 일인 셈이다.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한 조사관은 이렇게 말했다.
“사간동의 한 필지를 조사할 때마다, 그 아래에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오래된 기와 하나, 벽돌 하나에도 그 시대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죠.”
이처럼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과거와 현재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1912년의 사간동을 기록으로 복원하고, 그 위에서 다시 서울을 그려나가는 일은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기억을 지키는 일이다.
오늘날, 사간동은 고급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거리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땅 아래에는 여전히 김씨, 이씨,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세상에 다시 꺼내는 일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의 가치다.
성공 사례로 꼽히는 것은 바로 북촌 한옥마을 발굴 조사다. 이곳의 지표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1920년대 서울의 주거 구조, 생활용품, 도로 배치가 복원되었고, 그 결과 북촌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 있는 역사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사간동 역시 이런 방식으로, 과거의 시간 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히고 있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서울의 거리마다, 땅속에는 이야기가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사람들 — 그들이야말로 오늘의 역사가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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