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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사간동, 그 시절 땅과 사람의 이야기 – 서울 문화유산 속 숨은 시간 여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기와 한 조각 아래, 누군가의 숨결이 있다 — 1912년 사간동 이야기


김씨 35필지, 이씨 22필지, 법인 1필지, 일본인 4필지. 126필지 작은 동네 안에 담긴 전통·근대·식민지의 세 가지 시간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사간동의 진짜 얼굴


목차

1. 사간동의 첫인상 — 1912년의 서울로 들어가다

2. 126필지의 마을,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

3. 사간동의 주인들 — 김씨와 이씨의 터전

4. 법인 소유 1필지 — 변화의 신호

5. 일본인 4필지 — 식민지기의 그림자

6. 세 겹의 시간이 겹쳐진 공간

7. 문화재 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옛 마을

8. 발굴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9. 성공 사례 — 북촌 한옥마을 발굴이 바꾼 것

10. 기억을 지키는 사람들


사간동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고급 한옥과 갤러리, 조용한 골목길을 떠올린다. 틀리지 않다. 그런데 그 조용함 아래에 훨씬 더 복잡하고 생생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12년의 사간동은 단 126필지, 24,380㎡짜리 작은 동네였다. 그런데 그 안에 조선 양반 가문의 한옥, 근대적 법인의 부지, 그리고 일본인의 손이 뻗어온 4필지가 함께 존재했다. 세 개의 다른 시간이 한 동네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은 그 충돌의 흔적을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이야기다. 끝까지 읽고 나면 사간동 골목을 걷는 방식이 달라질 거라고 장담한다.



1. 사간동의 첫인상 — 1912년의 서울로 들어가다

1912년 종로구 사간동. 전체 면적 24,380㎡, 126필지. 지금의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7,375평 규모다. 넓지 않다. 오히려 작다. 그런데 이 작은 동네가 1912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전통과 근대, 그리고 식민지 현실이 맞부딪히는 가장 선명한 무대 중 하나였다.

126필지

총 필지 수

24,380㎡

총 면적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좁은 골목마다 기와지붕이 이어지고, 나무 울타리 너머로 사람들의 일상이 느릿하게 흐르던 시절. 아침이면 장사꾼의 외침이 골목을 깨우고, 저녁이면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던 그 풍경이 이 숫자들 뒤에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의 층위를 가장 정밀하게 읽어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2. 126필지의 마을,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

126필지 대부분은 대지였다. 사람들이 실제로 집을 짓고 살던 주거 공간이 이 동네의 핵심이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사간동이 고즈넉한 한옥과 현대 건물이 공존하는 공간인 것처럼, 1912년에도 이 126필지 안에는 저마다 다른 규모와 형태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

조선인 개인 소유

121필지

양반·중인·서민 혼재

법인 소유

1필지

관청·종교·근대 기업 추정

일본인 소유

4필지

식민지 토지 침탈의 흔적

총 규모

24,380㎡

약 7,375평

이 구성이 특별한 이유는 세 가지 다른 소유 형태가 하나의 작은 동네 안에 공존한다는 점 때문이다. 전통적인 개인 소유(조선 양반 가문), 근대적 법인 소유, 그리고 외래 세력의 침투(일본인 소유). 이 세 요소가 1912년 사간동 126필지 안에서 동시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이 동네를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만든다.

126필지 대지 전역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건축 기단, 온돌 유구, 기와 파편, 근대기 생활 유물이 혼재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복합 조사 구역이다. 세 가지 소유 형태가 공존한 만큼 유물의 시대적 스펙트럼도 폭넓게 나타날 수 있다.


3. 사간동의 주인들 — 김씨와 이씨의 터전

1912년 사간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김씨로 35필지였다. 이씨가 22필지로 뒤를 이었다. 이 두 성씨만 합쳐도 57필지로 전체의 약 45%에 달한다. 사간동이 두 가문 중심의 마을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정도 수준의 집중이라면 다른 성씨들도 상당히 고르게 분포했다는 뜻이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율

1위

김씨

35필지


2위

이씨

22필지


합산 57필지 — 전체의 약 45%

김씨와 이씨가 사간동에서 가장 큰 토지 기반을 가졌다는 사실은 이들이 마을에서 발언권이 있었던 가문이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사간동은 조선 시대부터 종로 중심부의 생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두 성씨의 대지에는 중간 규모 이상의 한옥이 들어서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부는 상가 겸 주택 형태로 운영되며 인근 상권과 연결됐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성씨별 토지 분포 데이터는 발굴 구역별 예상 유물의 성격을 예측하는 데 핵심 자료로 활용된다. 김씨·이씨 집중 구역에서는 두 가문의 건축 방식과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4. 법인 소유 1필지 — 변화의 신호

126필지 중 단 1필지. 하지만 이 한 필지가 가진 의미가 크다. 법인 소유 토지는 1912년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형태였다. 관청, 종교 단체, 혹은 막 생겨나기 시작한 근대적 회사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이 아닌 '조직'이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변화의 신호였다.

이 법인 소유지 1필지는 사간동이 단순한 전통 주거지가 아니라, 근대화의 바람이 이미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법인 소유지 구역은 근대식 건축 구조물, 업무용 도구, 혹은 종교 관련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는 특수 조사 구역으로 분류된다.



5. 일본인 4필지 — 식민지기의 그림자

1912년 사간동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4필지 확인된다. 한일병합(1910) 직후, 강제 병합 2년차의 기록이다. 숫자 자체는 4필지로 작아 보이지만, 이 4필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면 결코 가볍지 않다.

일본인 소유

4필지

상업·거류지 기반 추정

시점

강제병합 2년차

토지조사사업 본격화 시기

이 시기 일본인들은 서울 도심 주요 지역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고 있었다. 경제적 불균형을 이용한 헐값 매입, 행정적 압박을 통한 소유권 이전. 사간동의 4필지도 그 흐름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4필지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숫자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는 역사가 기억하고 있다.

일본인 소유 필지에서는 문화재 발굴 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사간동의 4필지 구역에서도 조선식 유물과 일본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어, 문화 충돌의 물질적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 발굴 대상 구역이다.


6. 세 겹의 시간이 겹쳐진 공간

김씨·이씨의 전통 한옥(조선의 시간), 법인 소유지(근대화의 시간), 일본인 4필지(식민지의 시간). 이 세 가지 시간이 126필지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동시에 존재했다. 이게 사간동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실제로 최근 사간동 인근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는 조선 후기 관료 저택의 기단석과 함께 일본식 목재 구조물이 같은 지점에서 발견됐다. 한글과 한자가 함께 새겨진 도기, 조선식 기와와 일본식 생활용품이 한 층 안에서 섞여 나왔다. 이 발굴 결과는 당시 서울이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얼마나 복잡하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물질로 증명한다.

"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인 흔적은 당시 서울 사람들의 복잡한 정체성과 시대의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7. 문화재 지표조사로 되살아나는 옛 마을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속에 숨은 시간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단순히 유물을 찾는 게 아니라 그 유물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사람들의 삶과 함께 존재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이다. 사간동처럼 전통·근대·식민지의 세 층위가 한데 겹쳐 있는 지역은 지표조사에서 특히 풍부한 정보가 나올 수 있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토지 기록 분석, 항공 사진 판독, 현장 답사, 지표 유물 수습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에 따라 시굴조사·표본조사·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조사가 진행된다. 이 과정이 철저할수록 개발과 보존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역의 역사 토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구축하며, 이 데이터를 지표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사간동의 1912년 토지 기록이 이 아카이브 안에서 발굴 전략의 출발점이 될 때, 조선 양반 가문의 기와집과 일본인의 흔적이 함께 잠든 그 층위가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다.


8. 발굴 현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발굴 현장에서 일하는 조사관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말을 한다. 땅을 파는 게 아니라 기억을 꺼내는 일이라고.

"사간동의 한 필지를 조사할 때마다 그 아래에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오래된 기와 하나, 벽돌 하나에도 그 시대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죠."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현장 조사관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 발굴 현장에서 유물을 꺼내는 순간은 그런 감각이 온다고 한다. 100년 전 누군가가 밥을 담았던 도기, 지붕 위에 올렸던 기와, 담벼락에 썼던 낙서. 이것들이 다시 햇빛을 받는 순간, 그 사람들의 하루가 잠깐 살아 돌아온다.



9. 성공 사례 — 북촌 한옥마을 발굴이 바꾼 것

사간동 인근의 북촌 한옥마을 발굴 조사는 문화재 발굴이 한 동네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지표조사와 표본조사를 통해 1920년대 서울의 주거 구조, 생활용품, 도로 배치가 복원됐고, 그 결과 북촌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발굴이 개발의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동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사간동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세 겹의 시간이 쌓인 126필지 안에서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사간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이야기를 가진 공간이 될 수 있다.

북촌 한옥마을처럼 발굴조사를 통해 역사적 층위가 밝혀진 지역은 문화재 보호 지정을 받고, 그 결과 관광·문화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높아진다. 발굴은 규제가 아니라 가치 발굴이다.


10. 기억을 지키는 사람들

오늘 사간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내려다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기와집 마당이었던 자리일 수도 있고, 법인 소유 부지에 서 있던 근대식 건물의 터였을 수도 있다. 혹은 1912년 일본인이 처음 발을 들여놓은 4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126필지, 24,380㎡.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밥을 짓고, 장사를 하고, 이웃과 마주치고, 시대의 변화에 불안을 느끼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가장 조용하고 진지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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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한 조각 아래, 누군가의 숨결이 있다

126필지, 24,380㎡. 김씨와 이씨의 한옥, 법인의 근대 건물, 일본인의 4필지. 세 겹의 시간이 한 동네 안에서 충돌하던 1912년 사간동의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언제나 지표조사다.



사간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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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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