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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묘동의 시간 속으로 — 서울 도심의 문화유산이 된 땅의 이야기

서울의 중심, 종로. 그 속에서도 지금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묘동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하지만 100년도 훨씬 전, 1912년의 묘동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오늘 우리는 그 시절의 기록을 토대로, 한 장의 오래된 토지대장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본다. 이 여정은 단순한 역사 탐방이 아니라, 도시 속 문화유산 발굴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지표조사’와 같은 문화재 조사가 현재의 도시계획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탐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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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잊혀진 도심의 마을, 묘동의 첫 기록


1912년, 일제강점기의 한복판. 서울의 종로구 묘동은 207필지, 총면적 19,365㎡의 대지로 구성된 작은 구역이었다. 지금의 묘동은 청계천과 을지로를 잇는 복잡한 도시 구조 속에 파묻혀 있지만, 그 당시에는 주거지와 상업지가 함께 존재하는 조용한 생활의 공간이었다.


묘동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이 지역의 세세한 토지 소유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07필지 중 대부분은 개인이 소유했으며, 단 한 필지만이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 법인 소유 역시 1필지에 불과했다. 그만큼 당시 묘동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동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이런 초기 근대기 도시구조의 세부 기록은 매우 귀중하다. 단순히 땅의 경계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곳에 살았고, 어떤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이루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 지역의 지표조사나 발굴조사에서도 이런 초기 근대기 자료를 통해 유적의 층위와 생활사적 맥락을 복원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씨와 김씨의 마을 — 땅으로 본 성씨의 지도


묘동의 땅 주인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회 구조가 나타난다. 이씨가 43필지, 김씨가 32필지, 최씨가 15필지, 박씨가 13필지를 소유하며 묘동 내 주요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대부분 서울 토박이 혹은 인근 한성부 출신의 중산층으로 추정된다.


이런 데이터는 문화재 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다. 왜냐하면 같은 성씨들이 특정 지역에 몰려 산다는 것은 종족 집단 혹은 문중 중심의 생활 구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묘동 일대에서 진행된 여러 차례의 표본조사와 시굴조사에서는 유사한 양상이 확인되었다. 마을 내 특정 구역에 동일 성씨 묘역이 집중되거나, 가옥 구조가 비슷한 형태로 배치된 사례가 있다.


이런 점은 단순한 인구 분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바로 “문화적 유산으로서의 도시 구조”다. 지금 우리가 건물과 도로로만 보는 종로의 모습도, 그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한 세기 전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연결되어 있다.




3. 낯선 이름, 일본인과 중국인의 흔적


1912년의 묘동에는 일본인이 12필지, 중국인이 3필지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수치처럼 보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떠올리면 결코 작은 비율이 아니다.


특히 일본인 토지 소유는 일제강점기 서울 도심의 구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 상인과 관료들이 주요 상권과 교통 요충지를 중심으로 부동산을 확보하면서, 묘동과 인근 인사동·관철동·을지로 일대의 토지 구조가 크게 변했다.


이 시기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대체로 상업용 혹은 창고용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는 현재 문화재 지표조사 과정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묘동 인근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일본식 기와, 도자기 조각, 근대식 벽돌 구조물들은 당시 도시 내 외래 문화의 침투를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된다.


반면, 중국인 소유의 3필지는 소수였지만, 주로 상업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당시 종로 일대에는 중국 상단(商團)과 교류하던 무역상들이 있었고, 그들의 주거지나 상점이 묘동 주변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발굴기관이 이런 근대기의 토지 자료를 조사할 때는, 단순히 “누가 땅을 가졌는가”를 넘어 “이 땅에서 어떤 문화가 교류했는가”를 함께 탐색한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오늘날 ‘서울의 다층적 역사’를 이해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4. 사라진 국유지 한 필지의 의미


묘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였다. 하지만 이 한 필지가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당시 국유지는 대부분 관청 부지나 도로, 혹은 하천 부속지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국유지의 존재는 묘동이 단순한 주거지만이 아니라, 행정 혹은 공공 기능과 연관된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문화재 표본조사 과정에서 국유지 인근에서는 종종 관청 관련 유적, 옛 도로 구조, 배수시설 등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런 점에서 묘동의 국유지는 일제 시기 도시계획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다.




5. 도시의 지층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흔적’


묘동의 토지 분포를 현대적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면,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207필지 중 대부분은 개인 소유였고, 그 안에서 다양한 신분과 직업군이 뒤섞여 살았다. 당시의 한성부는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고, 묘동은 그 흐름 한가운데 있었다.


문화재 발굴기관들이 현재 서울 도심에서 진행하는 지표조사나 시굴조사도 바로 이런 ‘도시의 시간’을 되짚는 과정이다. 땅속에 묻혀 있던 기와 한 조각, 도로의 흔적 하나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사회 구조를 복원하는 단서가 된다.


예를 들어, 최근 종로 일대에서 진행된 한 발굴조사에서는 1910년대 가옥 터에서 일본식 온돌 구조와 조선식 구들 방식이 혼재된 주거 형태가 발견되었다. 이는 단순히 건축사적인 발견이 아니라, 문화가 섞이고 변형된 ‘생활문화의 유적’으로 평가된다.




6. 서울 문화유산 조사의 현재와 미래


서울의 도심은 지금도 수많은 개발과 재정비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수백 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는 바로 이 보이지 않는 역사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묘동의 1912년 기록은 단순히 옛날의 토지대장이 아니라, 오늘날 도시문화유산의 뿌리를 보여주는 ‘역사 지도’다.


이런 조사가 철저히 진행될수록 우리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기억 위에 미래를 세우는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기관들은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도 지표조사 의뢰와 발굴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묘동의 작은 필지 하나하나는 지금의 서울을 지탱하는 역사적 DNA다.




7. 묘동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1912년 묘동을 기록한 그 한 장의 자료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땅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쌓인 기억이다.”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도시를 설계하는 과정이다. 묘동의 207필지, 그 안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이야기는 지금도 서울의 도심 어딘가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서울의 땅을 밟는다는 건 곧, 수백 년의 역사를 함께 걷는 일이다.




성공 사례로 보는 서울 문화유산 조사


최근 서울시에서 진행된 종로 인사동 일대의 지표조사에서는 조선 후기 가옥터와 일제강점기 상점 건물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해당 지역이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연속된 생활공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묘동 역시 비슷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 현재도 도시 재개발 구역 내에서는 사전 지표조사를 의뢰하여 역사적 흔적을 보호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런 성공적인 사례들은 “문화재 조사는 단지 규제가 아니라, 도시의 품격을 높이는 일”임을 증명하고 있다.




당신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이 사는 동네의 땅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길 아래에도, 100년 전 누군가의 삶이 고스란히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의 문화재 발굴 조사와 지표조사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다시 세상 위로 불러오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당신의 관심과 의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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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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