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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묘동의 시간 속으로 — 서울 도심의 문화유산이 된 땅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이 땅에 한때 일본인과 중국인이 함께 살았다 — 1912년 묘동의 진짜 얼굴

207필지 속에 숨겨진 이씨와 김씨의 마을, 식민지의 그림자, 그리고 지금도 땅속에 잠들어 있는 이야기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서울의 또 다른 역사

목차

1. 잊혀진 도심의 마을, 묘동의 첫 기록

2. 이씨와 김씨의 마을 — 땅으로 본 성씨의 지도

3. 낯선 이름들, 일본인과 중국인의 흔적

4. 사라진 국유지 한 필지의 의미

5. 도시의 지층 속 사람들의 흔적

6. 서울 문화유산 조사의 현재와 미래

7. 성공 사례 — 인사동 지표조사가 밝혀낸 것들

8. 묘동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

지금 종로를 걷다 보면 청계천이 흐르고, 을지로 골목에 힙한 카페들이 들어서 있고, 인근 상가에는 인쇄소와 공구 가게가 뒤섞여 있다. 익숙한 서울 중심부 풍경이다. 그런데 딱 그 자리, 1912년의 종로구 묘동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씨와 김씨가 나눠 가진 땅, 일본인이 파고든 필지들, 그리고 중국 상인의 흔적까지. 한 장의 오래된 토지대장이 꺼내주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생생하다.

이 글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왜 지금 이 시대에도 중요한지를, 100년 전 묘동 데이터를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탐험이다. 끝까지 읽으면 서울의 땅을 걷는 방식이 달라질 거다.



1. 잊혀진 도심의 마을, 묘동의 첫 기록

1912년 종로구 묘동은 207필지, 총 면적 19,365㎡로 이루어진 작은 구역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5,900평 남짓. 지금의 묘동이 청계천과 을지로 사이 복잡한 도시 구조에 파묻혀 있는 것과 달리, 그 당시에는 주거와 상업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조용한 생활 공간이었다.

207필지

총 필지 수

19,365㎡

총 면적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207필지 중 대부분은 개인 소유였고, 국유지는 단 1필지, 법인 소유도 1필지에 그쳤다. 이 숫자가 말해주는 건 분명하다. 묘동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동네'였다는 것이다. 국가나 기관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필지를 갖고, 집을 짓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던 공간이었다.

개인 소유

205필지

전체의 약 99%

국유지

1필지

행정·공공 기능

법인 소유

1필지

상업·기관 용도

외국인 소유

15필지

일본 12 + 중국 3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이런 초기 근대기 토지 기록은 단순히 경계를 확인하는 자료가 아니다. 누가 어디에 살았는지, 어떤 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하는 핵심 단서가 된다. 유적의 층위와 생활사적 맥락을 복원하는 데 있어 이런 토지대장 자료가 실제 발굴조사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2. 이씨와 김씨의 마을 — 땅으로 본 성씨의 지도

묘동의 땅 주인들을 성씨별로 들여다보면 이 동네의 권력 지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1912년 묘동의 최다 토지 소유 성씨는 이씨로 43필지를 보유했고, 김씨가 32필지, 최씨 15필지, 박씨 13필지 순이었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율

1위

이씨

43필지


2위

김씨

32필지


3위

최씨

15필지


4위

박씨

13필지


특정 성씨가 한 동네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는 건 단순한 인구 분포 통계가 아니다. 이건 종족 집단이나 문중 중심의 생활 구조를 의미한다. 같은 성씨끼리 인접한 필지를 소유하고, 대소사를 함께하고, 혼인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씨와 김씨가 75필지를 합쳐 전체의 약 36%를 장악했다는 사실이 이 동네에서 두 성씨가 가졌던 영향력의 크기를 말해준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별 토지 집중 현황은 발굴 구역별 예상 유물의 성격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같은 성씨가 집중된 구역에서는 가문 공동의 생활 패턴을 보여주는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표본조사와 시굴조사에서 동일 성씨 거주 밀집 구역을 확인하면, 유사한 형태의 가옥 구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거나 공동 묘역이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는 패턴이 관찰된다. 묘동 역시 이 같은 문화재 조사적 맥락에서 풍부한 발굴 가능성을 품고 있다.


3. 낯선 이름들, 일본인과 중국인의 흔적

여기서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묘동의 토지 기록에는 조선인 성씨들 사이에 낯선 이름들이 끼어 있다. 일본인이 12필지, 중국인이 3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2년, 강제 병합으로부터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숫자가 다르게 읽힌다.

일본인 소유

12필지

상업·창고 용도 추정

중국인 소유

3필지

무역·상업 활동 추정

일본인 소유 12필지는 단순히 외국인이 부동산을 구입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 상인과 관료들이 종로 상권의 요충지를 중심으로 부동산을 확보해 나가던 과정의 일부였다. 묘동과 인접한 인사동, 관철동, 을지로 일대 전체가 이 시기 급격하게 토지 소유 구조가 변해갔고, 묘동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일본인 소유 필지에서는 문화재 지표조사 과정에서 일본식 기와, 근대식 벽돌 구조물, 일본산 도자기 파편 등이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문화 교류가 아닌 문화 침투의 물질적 증거로 평가된다.

중국인 소유 3필지는 규모는 작지만 맥락이 흥미롭다. 당시 종로 일대에는 중국 상단(商團)과 연결된 무역상들이 활동했고, 그들의 거점이 묘동 인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화재 발굴에서 중국계 도자기나 생활 유물이 발견된다면 당시 서울 도심의 다국적 상업 네트워크를 복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4. 사라진 국유지 한 필지의 의미

묘동의 국유지는 단 1필지였다. 작아 보이지만 이 한 필지가 가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당시 국유지는 관청 부지나 도로, 하천 부속지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다시 말해 이 1필지의 존재는 묘동이 순수한 주거지만이 아니라 행정이나 공공 기능과 연결된 공간이었다는 증거다.

문화재 표본조사 과정에서 국유지 인근은 특별한 주목을 받는 구역이다. 관청 관련 유적, 옛 도로 구조, 배수 시설의 흔적이 발견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묘동의 이 1필지 국유지가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 알 수 있지만,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5. 도시의 지층 속 사람들의 흔적

207필지. 그 안에는 단순히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라, 다양한 신분과 직업, 민족과 언어가 뒤섞여 살아가던 복잡한 생활이 담겨 있다. 1912년의 묘동은 조선식 생활 방식이 아직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일본 식민 통치라는 외부 충격이 파고드는 전환기적 공간이었다.

문화재 발굴기관들이 서울 도심에서 진행하는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바로 이 전환기의 흔적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땅속에 묻힌 기와 한 조각, 생활 도구 하나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한다. 실제로 종로 일대 발굴에서 1910년대 가옥 터에서 조선식 구들과 일본식 온돌 구조가 함께 발견된 사례가 있다. 이건 단순한 건축사 발견이 아니라, 두 문화가 충돌하고 뒤섞이던 생생한 생활문화의 증거다.

"땅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쌓인 기억이다. 묘동의 207필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기억을 안고 있다."



6. 서울 문화유산 조사의 현재와 미래

서울 도심은 지금도 개발과 재정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재개발 구역에서 삽이 들어가기 직전,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다. 이 과정 없이 진행되는 개발은 수백 년의 기억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다.

1912년 묘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도시 문화유산의 뿌리를 보여주는 역사 지도다. 이런 기록을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할 때, 우리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기억 위에 미래를 세우는 도시를 만들 수 있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역의 역사 토지 데이터를 축적해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조사 체계는 개발과 보존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7. 성공 사례 — 인사동 지표조사가 밝혀낸 것들

묘동 인근인 인사동 일대에서 최근 진행된 지표조사는 문화재 발굴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조사에서 조선 후기 가옥 터와 일제강점기 상점 건물이 같은 지층에서 함께 발견됐다. 다른 시대의 두 건축물이 한 자리에 겹쳐 있다는 건 이 지역이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연속된 생활 공간이었다는 증거다.

이 발굴 결과는 인사동 일대의 도시 재생 계획에도 반영됐다. 유구가 발견된 구역은 개발 방향을 수정해 역사 공간으로 보존하고, 나머지 구역은 계획대로 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문화재 조사가 개발을 막는 걸림돌이 아니라 개발의 방향을 더 현명하게 안내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사례가 증명한다.



8. 묘동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말

1912년 묘동 토지대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이 있다. 이씨와 김씨의 집이 나란히 서 있고, 그 사이로 일본인 상점이 끼어들고, 중국 상인의 창고가 골목 한쪽에 자리 잡은 그 풍경. 충돌과 공존, 전통과 외래가 한 동네 안에서 뒤섞이던 그 복잡한 시간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도심 아래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그 잠든 기억을 불러오는 일이다. 유물 하나, 기와 파편 하나가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사람들을 역사 속으로 다시 부르는 매개가 된다. 그 일이 번거로운 규제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과거 세대에게 보내는 가장 진지한 경의다.

지금 당신이 사는 동네 아래에도 어쩌면 100년 전 누군가의 부엌이 있고, 누군가의 마당이 있을지 모른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문화재 지표조사는 시작할 이유가 충분하다.


🏛️

서울의 땅을 밟는다는 건 수백 년의 역사를 함께 걷는 일이다

207필지, 19,365㎡. 이씨의 기와집 옆에 일본인 상점이 있고, 골목 어딘가에 중국 상인의 흔적이 남아 있는 1912년의 묘동. 그 복잡하고 생생한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한 약속이다.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 이제 알겠지? 주변에 필요한 사람에게 이 글을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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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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