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종로구 명륜동1가, 땅이 말해주는 사람들의 삶과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
- 서울 HI
- 9월 17일
- 4분 분량
목차
1. 서두 – 땅이 들려주는 1912년 명륜동1가 이야기
2. 집터와 마을의 풍경
3. 사사지, 종교적 터전의 의미
4. 산과 임야가 전해주는 자연의 흔적
5. 밭, 생활과 생계의 중심 공간
6. 국유지가 담아낸 공적 영역
7.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에서 읽는 공동체 구조
8.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적 배경
9. 문화재 조사 방법 – 지표 조사, 시굴 조사, 발굴 조사란 무엇인가
10. 서울에서 진행된 발굴 성공 사례와 교훈
11. 명륜동1가와 현재 서울 문화유산 보존의 연결점
12.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1912년의 기록
13. 결론 – 땅 속에서 되살아나는 우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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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기억한다. 1912년 종로구 명륜동1가의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시대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낸 역사적 증언이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카페, 그리고 대학가의 활기찬 풍경 뒤에는 과거의 또 다른 명륜동이 존재했다. 1912년의 토지 대장과 조사 기록을 통해 본 명륜동1가는 105필지, 총 135,012㎡라는 수치로 남아 있지만, 그 안에는 집과 밭, 사사지를 오가며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층층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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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와 마을의 풍경
1912년 명륜동1가에는 58필지, 약 19,841㎡의 대지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주거 공간을 의미하는 것 이상이었다. 집터는 곧 가족의 삶과 공동체의 중심이었고, 마을의 울타리를 형성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한옥들이 늘어서 있었을 것이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이 공간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와 일상이 얽힌 복합적 무대였다. 오늘날 문화재 발굴에서 발견되는 기와 조각, 생활 도구들은 당시 이 마을의 생활상을 더욱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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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지, 종교적 터전의 의미
명륜동1가의 기록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1필지, 8,978㎡ 규모의 사사지다. 사사지란 사찰에 속한 토지를 말한다. 당시 불교 사찰은 단순히 종교 시설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사사지는 제의와 기도의 공간이자, 학문과 휴식의 공간이었다. 발굴 조사에서 발견되는 불상 파편, 기와, 석탑 조각은 당시 종교적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이 한 필지의 기록은 명륜동 사람들에게 사찰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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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임야가 전해주는 자연의 흔적
명륜동1가에는 작은 규모지만 1필지, 591㎡의 임야가 존재했다. 이는 나무와 땔감을 제공하는 생활 자원일 뿐 아니라,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계절 변화를 가장 가까이서 체감할 수 있는 자연의 공간이었다.
문화재 지표 조사에서 산과 임야 주변은 종종 토기 조각이나 제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이는 사람들이 단순히 생활 자원으로만 산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신성한 장소로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명륜동의 작은 임야 역시 그런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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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 생활과 생계의 중심 공간
무려 45필지, 105,600㎡에 달하는 밭은 명륜동1가의 생활 기반을 설명해준다. 밭은 곧 식량 자급의 원천이었고, 지역 경제의 뿌리였다. 밭에서 길러진 곡식과 채소는 가족의 밥상이 되었고, 남는 것은 장터에서 팔려 또 다른 생활 자원이 되었다.
오늘날 발굴 조사에서 농경 흔적은 토양 성분 분석, 곡물 탄화물, 농기구 조각 등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땅의 면적을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작물을 길렀는지, 그들의 경제 구조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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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유지가 담아낸 공적 영역
명륜동1가에는 6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이는 단순히 국가 소유의 땅이라는 의미를 넘어, 공공 공간이자 행정적 필요에 의해 관리된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 관청, 혹은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서울 지역의 문화재 발굴 사례에서도 국유지는 흔히 공공 건물 터, 행정 시설 터로 확인된다. 이는 지역 공동체와 국가 권력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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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에서 읽는 공동체 구조
1912년 명륜동1가의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흥미로운 사회 구조가 드러난다.
• 이씨: 33필지
• 김씨: 23필지
• 홍씨: 16필지
이는 곧 성씨 중심의 촌락 구조가 명륜동에서도 강하게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사회에서는 같은 성씨끼리 모여 살며 결속을 다지는 경우가 많았다. 발굴 조사에서도 특정 성씨 가문의 족보, 비석, 묘지가 발견되면서 그들의 영향력을 증명해 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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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적 배경
1912년은 이미 한일병합 이후로, 일본인의 토지 소유가 점차 늘어가던 시기였다. 명륜동1가에도 일본인들이 6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소유를 넘어, 식민지 시대 서울의 공간 구조와 사회 관계가 변화해가는 중요한 증거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는 주거지뿐 아니라 상업지, 공공지로 확장되며, 이후 서울의 도시 계획과 발전 양상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문화재 발굴에서 일본식 건축 양식이나 생활 도구가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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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조사 방법 – 지표 조사, 시굴 조사, 발굴 조사란 무엇인가
명륜동의 기록을 이해하려면, 오늘날 우리가 문화재를 조사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 지표 조사: 땅 위의 흔적을 조사하는 기초 단계로, 표면에서 확인 가능한 유물이나 지형적 특징을 파악한다.
• 시굴 조사: 일부 구역을 시험적으로 파서 문화층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단계다.
• 발굴 조사: 실제로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를 위해 땅을 파헤치고 유적을 기록하는 단계다.
명륜동의 1912년 기록 역시 당시의 토지 대장과 지적 조사가 결합된 결과물로, 오늘날의 문화재 지표 조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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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진행된 발굴 성공 사례와 교훈
서울 곳곳에서는 다양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어 성공적인 사례를 남겼다. 예를 들어, 종로 일대의 발굴에서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 터가 발견되어 당시 행정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대학로 인근 발굴에서 한양도성의 흔적이 드러나, 오늘날 시민들에게 새로운 역사 교육의 장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굴은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도시 계획과 문화유산 보존 정책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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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동1가와 현재 서울 문화유산 보존의 연결점
1912년 명륜동1가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 서울의 문화유산 보존, 발굴, 조사 활동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서울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땅속에는 여전히 과거의 흔적이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통해 우리는 그 흔적을 다시 꺼내고, 미래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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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주목해야 하는 1912년의 기록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1912년의 기록은 다소 낯설고 먼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뿌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
명륜동의 작은 임야, 넓은 밭, 그리고 성씨별로 나뉜 집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한 기반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의 토지 소유 기록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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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 땅 속에서 되살아나는 우리의 역사
1912년 종로구 명륜동1가는 단순히 105필지의 땅으로만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곧 사람들의 삶, 종교, 경제, 공동체,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그림자를 모두 담아낸 살아 있는 역사다.
서울의 문화유산 발굴과 조사 활동은 바로 이 땅 속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땅은 결코 잊지 않는다. 우리가 귀 기울일 때, 땅은 그 모든 이야기를 다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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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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