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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명륜동1가, 땅이 말해주는 사람들의 삶과 서울 문화유산 발굴의 의미

최종 수정일: 4월 19일

105필지짜리 작은 동네에 사찰 부지가 8,978㎡ — 1912년 명륜동1가의 반전


이씨 33필지·김씨 23필지·홍씨 16필지의 성씨 마을, 전체의 78%를 차지한 밭, 그리고 일본인 6필지의 그림자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명륜동1가의 시간


목차

1. 땅이 들려주는 1912년 명륜동1가 이야기

2. 105필지의 규모와 공간 구조

3. 58필지 대지 — 집터와 마을의 풍경

4. 사사지 8,978㎡ — 사찰이 마을에 가진 의미

5. 밭 45필지 — 생활과 생계의 중심 공간

6. 임야와 국유지 — 자연과 공공의 흔적

7. 이씨·김씨·홍씨의 성씨 공동체 구조

8. 일본인 6필지 — 시대적 배경과 그 의미

9. 문화재 조사 방법 완전 정리

10.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종로 관아와 대학로 성곽

11. 명륜동1가와 서울 문화유산 보존의 연결점

12. 마무리 — 땅 속에서 되살아나는 우리의 역사


명륜동1가. 지금 이 이름을 검색하면 성균관대 인근 조용한 주거 골목, 오래된 한옥과 작은 카페들이 나온다. 그런데 1912년 이 동네의 기록을 처음 들여다보면 예상치 못한 숫자와 마주치게 된다. 105필지라는 작은 동네인데, 사찰 부지(사사지)가 무려 8,978㎡에 달한다. 전체 면적 135,012㎡의 약 6.6%가 단 한 필지의 사찰 땅이었다. 게다가 밭은 45필지, 105,600㎡로 전체의 78%를 차지한다. 성균관 바로 옆 동네가 이렇게 농경 중심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 커다란 사찰 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미 이야기의 시작이다.

이 글은 그 이야기를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시각으로 풀어낸다. 끝까지 읽고 나면 명륜동이라는 이름이 다르게 들릴 거다.



1. 땅이 들려주는 1912년 명륜동1가 이야기

1912년은 조선이 무너지고 2년이 지난 해였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한반도 전역에서 진행되며 모든 땅이 필지 단위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이 기록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가 된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탈의 도구로 만들어진 문서가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증거가 됐다.

명륜동1가의 토지대장도 그런 문서 중 하나다. 105필지, 135,012㎡. 단순한 숫자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집과 밭, 사찰, 산, 국유지, 그리고 이씨·김씨·홍씨의 이름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일본인 6필지가 조용히 끼어 있다.

105필지

총 필지 수

135,012㎡

총 면적 (약 4만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2. 105필지의 규모와 공간 구조

명륜동1가의 105필지를 용도별로 들여다보면 이 동네의 성격이 한눈에 보인다. 무엇보다 밭의 압도적 비중이 눈에 띈다. 필지 수는 대지가 많지만, 면적으로는 밭이 전체의 78%를 차지했다. 그리고 사사지 1필지가 8,978㎡라는 놀라운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45필지

105,600㎡ — 전체의 약 78%

대지 (주거)

58필지

19,841㎡

사사지

1필지

8,978㎡

임야

1필지

591㎡

국유지

6필지

행정·공공 기능

일본인 소유

6필지

식민지 침탈의 흔적

78%

1912년 명륜동1가 전체 면적 중 밭이 차지하는 비율.


지금 이 자리에 카페와 주택이 들어서기 전, 이 땅은 농경지였다.


3. 58필지 대지 — 집터와 마을의 풍경

58필지, 19,841㎡의 대지. 필지 수로는 가장 많지만 면적은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이 말은 집들이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 촘촘하게 모여 있었다는 뜻이다. 좁은 골목을 따라 기와집과 초가집이 빽빽이 들어선 풍경, 담벼락 너머로 아이들 소리가 넘어오고 부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 일상이 19,841㎡ 안에 담겨 있다.

성균관 인근이라는 지역 특성상 이 대지에는 학자 가문과 유생 관련 가문이 상당수 거주했을 것이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구역은 조선 후기 건축 기단, 온돌 유구, 생활 도기, 문방구류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핵심 조사 대상이다.


4. 사사지 8,978㎡ — 사찰이 마을에 가진 의미

이게 이 글에서 가장 흥미로운 숫자다. 단 1필지인데 8,978㎡. 105필지 전체에서 밭 다음으로 큰 면적을 단 한 필지의 사찰 부지가 차지하고 있었다. 58필지에 달하는 주거 대지 전체 면적 19,841㎡와 비교해도, 사사지 1필지가 그 절반에 가까운 면적이다.

사사지 8,978㎡는 사찰 본당, 부속 건물, 마당, 정원, 제의 공간이 모두 포함된 규모다.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불교 사찰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문화적 구심점이었다. 제의와 기도의 공간이자 학문과 휴식의 장소였다. 성균관이라는 유교 교육 기관 바로 옆에 이토록 큰 사찰 부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명륜동1가가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던 복합적인 문화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사사지 구역은 불상 파편, 기와, 석탑 조각, 제기류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은 최우선 조사 구역이다. 8,978㎡라는 면적 안에서 수백 년의 불교 의례 흔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5. 밭 45필지 — 생활과 생계의 중심 공간

45필지, 105,600㎡. 전체 면적의 78%. 명륜동1가의 땅 대부분이 밭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주택과 카페가 들어서기 전, 누군가가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수확을 기다리던 땅이었다. 가족의 밥상에 오를 채소와 곡식이 이 105,600㎡에서 자라났다.

45필지

밭 필지 수

105,600㎡

농경지 총면적

약 78%

전체 면적 비율

오늘날 발굴조사에서 농경 흔적은 토양 성분 분석, 탄화된 곡물, 농기구 조각 등으로 확인된다. 명륜동1가의 105,600㎡ 밭에서 어떤 작물이 자랐는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는지는 발굴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지금 이 땅 아래 어딘가에 그 흔적이 잠들어 있다.

"전체의 78%가 밭이었던 명륜동1가. 성균관의 학문과 농부의 손이 같은 땅 위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6. 임야와 국유지 — 자연과 공공의 흔적

임야 1필지, 591㎡. 작은 규모지만 이 산자락이 마을 사람들에게 가진 의미는 컸다. 땔감을 마련하고, 약초를 캐고,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느끼던 공간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임야 인근은 종종 토기 조각이나 소규모 제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이기도 하다.

국유지 6필지는 행정, 군사, 또는 공공 시설 목적으로 관리된 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균관 인근이라는 특성상 국가 교육 기관과 관련된 부속 시설이 이 국유지에 있었을 수도 있다. 발굴 시 관청 관련 유구나 도로 구조가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주목 구역이다.


7. 이씨·김씨·홍씨의 성씨 공동체 구조

1912년 명륜동1가의 토지를 성씨별로 정리하면 이 동네의 사회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순위

성씨

필지 수

비율

1위

이씨

33필지


2위

김씨

23필지


3위

홍씨

16필지


이씨 33필지, 김씨 23필지, 홍씨 16필지. 이 세 성씨가 합쳐서 72필지로 전체 105필지의 약 69%를 차지했다. 성씨 중심의 촌락 구조가 명륜동1가에서도 강하게 작동했다는 뜻이다. 같은 성씨끼리 인접한 필지를 소유하고, 대소사를 함께하며 마을을 이끄는 구조였을 것이다.

특히 홍씨 16필지가 눈에 띈다. 앞서 살펴본 명륜동2가에서도 홍씨가 상위권에 있었는데, 명륜동 일대 전체에서 홍씨 가문이 상당한 토지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패턴은 문화재 발굴에서 해당 성씨 가문의 문화적 특성이 담긴 유물을 예측하는 데 활용된다.



8. 일본인 6필지 — 시대적 배경과 그 의미

이씨·김씨·홍씨의 마을 한편에 일본인 소유 6필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국유지와 같은 수인 6필지라는 사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1912년은 강제 병합 2년차. 일본인들이 서울 도심 곳곳의 요충지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던 시기였다.

일본인 소유 6필지는 단순한 부동산 거래가 아니었다. 조선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인근 땅을 일본인이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식민지 지배가 공간 구조 안에서 어떻게 실현됐는지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다. 문화재 발굴 시 이 구역에서 조선식 유물과 일본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일본인 소유지는 이후 주거지뿐 아니라 상업지, 공공지로 확장되며 서울의 도시 구조 자체를 바꿔놓았다. 명륜동1가의 6필지는 그 변화의 시작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발굴 시 일본식 기와, 벽돌 구조물, 생활 도기 파편이 출토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증언이 된다.


9. 문화재 조사 방법 완전 정리

명륜동1가 같은 역사 밀집 지역을 조사할 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알아두면 이 이야기가 훨씬 입체적으로 읽힌다. 문화재 조사는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지표조사는 땅 위의 흔적을 조사하는 기초 단계다. 문헌 분석, 항공 사진 판독, 현장 답사를 통해 유적 존재 가능성을 평가한다. 시굴조사는 일부 구역을 시험적으로 파서 문화층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유구가 확인되면 정밀발굴조사로 이어진다.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역사 기록은 지표조사 단계의 핵심 참고 자료가 된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전역의 토지 기록을 아카이브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10.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종로 관아와 대학로 성곽

문화재 발굴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명륜동1가 인근에도 있다. 종로 일대의 발굴에서는 조선 시대 관아 건물 터가 발견되어 당시 행정 시스템의 실제 구조를 복원할 수 있었다. 단순한 유물 발굴을 넘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생활했는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 성과였다.

대학로 인근에서는 한양도성의 흔적이 드러나 지금도 시민들이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발굴이 단순히 과거를 파내는 행위가 아니라, 현재 시민들의 일상 속에 역사를 되살리는 과정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사례들이 증명한다. 명륜동1가 역시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품고 있다.

종로 관아 터 발굴, 대학로 한양도성 발굴 사례처럼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진 지역은 역사 교육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발굴은 규제가 아니라 가치 창출이다.


11. 명륜동1가와 서울 문화유산 보존의 연결점

1912년 명륜동1가의 토지 기록은 지금 이 순간 서울 문화유산 보존 활동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seoulheritage.org가 이 기록을 아카이브하는 이유는 단순한 역사 보존이 아니다.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재개발과 도시 정비 사업에서 발굴조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초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명륜동1가에서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거나 기존 구조물이 철거될 때,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과정이 문화재 지표조사다. 사사지 8,978㎡가 어디에 있었는지, 이씨 가문의 집터가 정확히 어느 위치였는지를 알아야 발굴 전략이 세워진다. 그 전략의 출발점이 바로 1912년의 기록이다.


12. 마무리 — 땅 속에서 되살아나는 우리의 역사

오늘 명륜동1가 골목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이씨 가문의 좁은 마당이었던 자리일 수도 있고, 45필지 밭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8,978㎡짜리 사찰 부지의 가장자리였을 수도 있다.

105필지, 135,012㎡.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밭으로 향하고, 사찰에서 향을 피우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조선이 무너지는 시대의 불안을 가슴에 품으며 살아가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하고 진지한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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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결코 잊지 않는다 — 105필지가 기억하는 것들

사사지 8,978㎡, 밭 105,600㎡, 이씨·김씨·홍씨의 집터, 그리고 일본인 6필지. 105필지 작은 동네 안에서 조선의 신앙과 농업과 학문이 공존하고 식민지의 현실이 조용히 파고들던 1912년 명륜동1가. 그 기억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명륜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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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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