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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누하동, 땅 위에 새겨진 이름들 – 서울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읽는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

목차

1. 서울의 골목에서 시작되는 역사 탐험

2. 1912년 누하동, 284필지의 기록

3. 누하동을 지켜온 성씨들의 흔적

4. 국유지, 법인 토지, 일본인 소유지의 의미

5.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6. 서울에서 진행된 성공적인 발굴 사례

7. 오늘 우리가 누하동에서 배워야 할 것들

8. 마무리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우리의 역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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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땅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서울의 중심, 종로구의 작은 동네 누하동. 지금은 카페와 주택, 골목길이 뒤엉켜 있는 평범한 동네처럼 보이지만, 1912년 이곳은 이미 284필지, 49,391㎡의 토지가 사람들의 삶을 담고 있었다. 한 장의 지도에 빼곡히 기록된 필지 수와 면적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그 속에는 가족의 삶, 집안의 전통, 그리고 시대의 격랑 속에서 흔들린 개인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1. 서울의 골목에서 시작되는 역사 탐험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떠올리면, 삽과 붓을 들고 땅을 파내는 장면을 상상한다. 그러나 진짜 발굴은 땅 위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 모퉁이에 서 있는 집, 오래된 담벼락 하나에도 역사적 단서가 숨어 있다.


서울 종로의 누하동은 그런 곳이다. 현재는 경복궁 서쪽 담장과 맞닿아 있는 조용한 주거지이지만,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2년의 기록을 펼쳐보면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채워진 커다란 역사 지도였다.


2. 1912년 누하동, 284필지의 기록


당시 누하동에는 총 284필지가 존재했고, 면적은 49,391㎡에 달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행정 기록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 땅 위에 몇 가구가 살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소중한 단서다. 필지 하나하나에는 가옥이 세워졌거나, 집터가 준비되어 있었고, 그 위에서 누군가는 웃고, 또 누군가는 울며 살아갔다.


이 작은 동네에 이렇게 많은 필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곧 누하동이 조선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밀집 주거지였음을 알려준다.


3. 누하동을 지켜온 성씨들의 흔적


1912년 누하동의 토지 소유 구조를 들여다보면 한 마을의 사회 구조가 그대로 드러난다.

• 김씨가 55필지

• 이씨가 42필지

• 박씨가 29필지

• 조씨가 13필지

• 고씨가 10필지

• 최씨가 10필지

• 한씨가 10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분포가 아니다. 김씨와 이씨, 박씨는 당시 누하동의 핵심 세력이었으며, 여러 세대가 같은 터전에서 삶을 이어온 흔적이었다. 특히 필지 수가 많은 성씨는 누하동에서 오랜 기간 기반을 다져온 토착 세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걷는 좁은 골목길 어디엔가 그 후손들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4. 국유지, 법인 토지, 일본인 소유지의 의미


흥미로운 것은 개인 소유 외에도 특수한 토지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 국유지 2필지

• 법인 소유지 1필지

• 일본인 소유지 3필지


국유지는 당시 행정과 공공 기능을 위한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인 소유지는 특정 종교 단체나 회사의 소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인 소유의 토지다. 일제강점기 초반에 이미 일본인들이 종로구 누하동에 땅을 확보했다는 것은 단순한 소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는 이후 점차 심화되는 토지 수탈과 맞물려 한국 사회가 겪게 될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5.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오늘날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히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지표조사는 공사나 개발이 시작되기 전, 땅 위와 주변을 살펴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누하동 같은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한다면, 단순한 건축 잔해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생활 도구, 주거 형태, 심지어 당시의 사회 구조까지도 복원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지금은 골목길로만 남은 누하동이, 100년 전 어떤 사람들의 터전이었는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6. 서울에서 진행된 성공적인 발굴 사례


서울은 이미 수많은 발굴 성과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종로 일대에서는 조선시대 주거지와 생활유적이 다수 발굴되었다. 단순한 기와 조각이나 토기 파편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밥그릇, 숟가락, 벽돌 하나하나가 발견되며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이런 성과는 곧 누하동 같은 마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땅 밑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7. 오늘 우리가 누하동에서 배워야 할 것들


1912년 누하동의 기록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땅 위에서 살고 있는가?”


우리는 아파트, 빌라, 오피스텔에 살지만, 그 땅 아래에는 조상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현재의 삶조차 공중에 떠버린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그래서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회적 실천이 된다.


8. 마무리 –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와 우리의 역할


종로구 누하동의 284필지는 단순히 집터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름표였다. 김씨, 이씨, 박씨가 지켜온 마을, 그리고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지가 드러내는 시대의 그림자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서울은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중심에서, 우리는 반드시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문화유산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바로 그 기억을 지켜내는 일이며, 우리가 미래 세대에 남겨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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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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