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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종로구 누하동, 땅 위에 새겨진 이름들 – 서울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읽는 사람과 공간의 이야기

최종 수정일: 4월 21일

경복궁 담장 옆, 284필지에 7개 성씨가 살던 동네 — 1912년 누하동의 민낯


김씨 55필지·이씨 42필지·박씨 29필지… 조씨·고씨·최씨·한씨까지. 지금은 조용한 골목길이 된 이 땅에 100년 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였는지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누하동의 시간


목차

1. 서울의 골목에서 시작되는 역사 탐험

2. 1912년 누하동, 284필지의 기록

3. 7개 성씨가 지켜온 마을의 지층

4. 국유지·법인 토지·일본인 소유지의 의미

5.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6.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밥그릇 하나가 말해주는 것

7. 오늘 우리가 누하동에서 배워야 할 것

8. 마무리 — 당신은 지금 어떤 땅 위에 서 있나


경복궁 서쪽 담장과 맞닿은 골목. 지금은 카페와 주택이 조용히 공존하는 누하동이지만, 1912년 이 동네의 기록을 펼쳐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빽빽한 삶의 층위가 드러난다. 284필지. 김씨·이씨·박씨·조씨·고씨·최씨·한씨, 일곱 개의 성씨가 이 좁은 땅을 나눠 살던 마을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당주동에 프랑스인이 있었다면, 누하동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충격적이다. 외국인보다 조선인이 더 촘촘하게, 더 다양하게, 더 깊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 뿌리 위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를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낸다.



1. 서울의 골목에서 시작되는 역사 탐험

문화재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떠올리면 삽과 붓을 들고 땅을 파내는 장면을 상상하기 쉽다. 그런데 진짜 발굴은 땅 위에서 시작된다. 지금 우리가 걸어 다니는 길, 모퉁이에 서 있는 집, 오래된 담벼락 하나에도 역사적 단서가 숨어 있다.

누하동은 그런 곳이다. 경복궁 서쪽 담장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동네의 역사적 무게를 말해준다.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이 땅은 궁궐의 옆에서 숨 쉬어 왔다. 그 500년 넘는 시간의 켜가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2. 1912년 누하동, 284필지의 기록

1912년 당시 누하동에는 총 284필지, 49,391㎡의 토지가 기록되어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약 14,940평 규모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 중 가장 많은 필지 수다. 필지 수가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촘촘하게 모여 살았다는 뜻이다.

284필지

총 필지 수

49,391㎡

총 면적 (약 1만 5천 평)

1912년

토지조사사업 기준

284필지. 이 숫자가 의미하는 건 단순히 284개의 땅덩이가 아니다. 284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이 동네 안에 공존했다는 뜻이다. 조선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밀집 주거 공간이었던 누하동은, 경복궁이라는 국가 권력의 상징 바로 옆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살아있던 공간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284필지는 조선 후기 주거 밀집 지역의 생활 유구가 가장 풍부하게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3. 7개 성씨가 지켜온 마을의 지층

누하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성씨의 다양성이다. 다른 동네들이 대체로 이씨와 김씨 두 성씨가 전체의 30~40%를 차지하는 구조였다면, 누하동은 무려 일곱 개의 성씨가 의미 있는 비중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김씨

55필지

이씨

42필지

박씨

29필지

조씨

13필지

고씨

10필지

최씨

10필지

한씨

10필지

김씨 55필지, 이씨 42필지. 두 성씨 합산 97필지로 전체 284필지의 약 34%다. 그런데 박씨가 29필지로 강력한 3위를 차지하고, 조씨·고씨·최씨·한씨가 각각 10~13필지를 보유하고 있다. 이 분산된 성씨 분포는 누하동이 특정 가문의 독점 없이 다양한 가문들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던 개방적인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조씨 13필지와 고씨 10필지가 눈에 띈다.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에서 조씨나 고씨가 상위권에 오른 사례는 드물었다. 누하동만의 독특한 인구 구성이다. 문화재 발굴에서 이 두 성씨의 거주 구역에서는 다른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4. 국유지·법인 토지·일본인 소유지의 의미

개인 소유지 외에 특수한 필지들도 존재했다. 국유지 2필지, 법인 소유지 1필지, 그리고 일본인 소유지 3필지다.

국유지

2필지

행정·공공 기능

법인 소유지

1필지

종교·기관 추정

일본인 소유지

3필지

식민지 침탈 흔적

국유지 2필지는 경복궁 인근이라는 지역 특성과 연결해서 읽을 수 있다. 궁궐 바로 옆에 위치한 동네인 만큼 왕실이나 국가 행정과 관련된 부속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법인 소유지 1필지는 종교 단체나 상업 기관이었을 수 있다.

일본인 소유지 3필지는 강제 병합 2년차의 기록이다. 경복궁 바로 옆, 조선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이 공간에 일본인이 이미 땅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거주가 아닌 식민지 지배 거점 구축의 초기 단계를 보여준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 숫자가 어떻게 변해갔는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 발굴 시 일본인 소유지 3필지 구역에서는 일본식 기와, 근대식 건축 구조물, 일본산 생활 도기가 조선식 유물과 같은 지층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경복궁 인근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 구역의 발굴 가치는 더욱 높다.


5. 문화유산 지표조사로 다시 살아나는 마을 이야기

오늘날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단순히 유적을 발굴하는 작업이 아니다.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284필지에 살던 일곱 성씨 가문들의 생활 도구, 주거 형태, 사회 구조가 지표조사를 통해 복원될 수 있다.

지표조사표본조사시굴조사정밀발굴조사보고서 작성

누하동처럼 경복궁 인근의 조선 시대 주거 밀집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한다면, 단순한 건축 잔해뿐 아니라 생활 도구, 의례 관련 유물, 왕실과 연결된 특수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경복궁 담장 바로 옆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이 동네의 발굴 잠재력을 끌어올린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역의 토지 데이터를 아카이브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발굴 전략 수립을 위해서다.


6. 서울 발굴 성공 사례 — 밥그릇 하나가 말해주는 것

서울 종로 일대에서는 이미 수많은 발굴 성과가 나왔다. 단순한 기와 조각이나 토기 파편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던 밥그릇, 숟가락, 벽돌 하나하나가 발견되며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이 유물들이 의미하는 건 단순히 "이 물건이 있었다"가 아니다. "이 물건을 쓰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공평동 지하 박물관처럼, 발굴 성과가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는 역사 공간이 됐을 때 그 가치는 폭발적으로 높아진다. 누하동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284필지에서 일곱 성씨 가문들이 나눠 쓰던 생활 도구들이 세상에 나온다면, 그것은 조선 후기 서울 주거 문화를 복원하는 가장 풍부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종로 일대 발굴 사례처럼 생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주거 밀집 지역 발굴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생생하게 복원한다. 284필지라는 누하동의 밀집도는 그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



7. 오늘 우리가 누하동에서 배워야 할 것

1912년 누하동의 기록은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땅 위에서 살고 있는가?" 아파트와 빌라와 카페로 채워진 이 동네 아래에 조상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의식하고 있을까.

문화재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는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김씨 가문과 이씨 가문이 나란히 담을 맞대고 살던 누하동, 조씨와 고씨가 같은 골목을 공유하던 누하동. 그 공동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8. 마무리 — 당신은 지금 어떤 땅 위에 서 있나

오늘 누하동 골목을 걷게 된다면, 잠깐 멈춰서 경복궁 서쪽 담장을 한 번 바라봐 줬으면 한다. 그 담장 너머 궁궐이 있고, 이쪽 골목에는 284필지에 뿌리를 내린 일곱 성씨 가문의 집들이 있었다. 왕의 공간과 백성의 공간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숨결을 나누던 그 시간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284필지, 49,391㎡.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백 명의 하루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경복궁 담장 위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그 사람들. 그들의 삶이 지금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가장 조용하고 진지한 약속이다.



"도시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땅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

경복궁 담장 옆, 일곱 성씨가 공유하던 골목

284필지, 49,391㎡. 김씨·이씨·박씨·조씨·고씨·최씨·한씨가 함께 살던 누하동. 경복궁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왕의 공간과 백성의 공간이 숨결을 나누던 그 시간이 지금도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누하동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지표조사 의뢰 방법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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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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