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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청암동,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 지표조사로 밝혀낸 숨겨진 기록들

  • 2025년 9월 16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7일

1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리포트

귀후서터와 한강 수위관측소,1912년 청암동이 숨겨온 168필지의 이야기

작지만 깊다. 168필지·43,305㎡. 용산구 한강변 끝자락에 놓인 청암동에는 김씨·이씨·박씨의 삶과 무덤, 신앙의 공간, 그리고 공동체의 흔적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168

총 필지 수

43,305

총 면적(㎡)

153

집터(대지) 필지

38

김씨 소유 필지


목차 · Contents

  • 시작 타임슬립, 1912년 용산구 청암동으로 가다

  • 01 청암동에는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을까

  • 02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이 공존한 공간

  • 03 잡종지와 밭, 일상의 공간을 엿보다

  • 04 국유지와 마을 소유지, 공동체의 흔적

  • 05 성씨별 토지 소유, 뿌리의 기록

  • 06 일본인의 땅, 식민지 그림자의 시작

  • 07 청암동과 한강, 귀후서터와 역사의 층위

  • 08 지표조사로 되살아난 과거 — 왜 중요한가

  • 09 서울 문화유산 조사, 어디에 어떻게 의뢰할까

  • 마무리 땅이 기억하는 것들


지금 당신이 용산구 청암동 골목을 걷고 있다면, 그 발 아래 어딘가에는 1912년 김씨 가문 누군가의 집터가, 그 옆에는 이씨 가문의 밭이 잠들어 있다.

청암동(靑岩洞). 이름 그대로 풀면 푸른 바위의 마을이다. 용산구 서쪽 끝, 한강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이 작은 동네는 조선시대부터 역사의 굵은 선들과 맞닿아 있었다. 귀후서(歸厚署) 터가 있었고, 용호독서당 터가 있었으며, 1924년 건립된 한강 수위관측소가 지금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남아 있다.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을이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자료를 바탕으로 살펴본 1912년 청암동의 기록은 총 168필지, 43,305㎡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가장 작은 마을 중 하나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밀도는 어느 마을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제 그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시작하며 — 타임슬립, 1912년 용산구 청암동으로 가다

1912년의 청암동은 지금의 청암동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 원효로2동사무소가 행정 관할하는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한성부 성저십리의 용산방 도화동계 내동·외동에 속했던 곳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암근정(岩根町)이라 불리다가 1946년에야 청암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168필지, 43,305㎡라는 숫자는 작아 보이지만, 그 촘촘함이 남다르다. 전체 168필지 중 무려 153필지가 대지, 즉 사람이 사는 집터였다. 91%가 주거지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청암동이 순수한 주거 마을이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논도 없고 큰 임야도 없다. 한강변 작은 언덕 위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런 마을이었다.

1912년 청암동 토지 현황 — 핵심 통계

총 필지 수168필지

총 면적43,305㎡ (약 1.3만 평)

대지 전체168필지 / 43,305㎡

집 용도 대지153필지 / 38,155㎡ (91.0%)

밭 (전)8필지 / 2,968㎡

잡종지3필지 / 1,186㎡

분묘지 (무덤)2필지 / 737㎡

사사지2필지 / 257㎡

국유지4필지

마을 소유지3필지

일본인 소유2필지


01 청암동에는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을까



153필지, 38,155㎡. 전체 청암동 면적의 88%가 사람이 살던 집터였다. 이 압도적인 수치는 청암동이 얼마나 조밀한 주거 마을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용산구 서쪽 끝 한강변이라는 입지는 논농사보다 거주와 생계에 더 적합한 땅이었다. 좁은 면적 안에 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었다는 뜻이다.

각 필지에는 집이 한 채씩 있었을 것이다. 기와를 얹은 집도 있었겠지만, 서민들은 초가에서 살았다. 마당에는 장독대와 텃밭이 작게 딸려 있었고, 담장 너머로 이웃의 소식이 오갔다. 좁은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놀았고, 저녁이면 아궁이 연기가 마을 전체를 감쌌다. 한강이 가까운 지형 덕분에 여름이면 한강바람이 마을을 식혀주었을 것이다.

"153필지의 집터. 청암동이라는 작은 마을 안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문을 열고 닫으며 살아갔다. 그 문들 안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땅은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청암동 일대에서 건축이나 토목 공사가 진행된다면, 바로 이 153필지의 집터 층위에서 조선시대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생활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기와 조각, 토기 파편, 아궁이 자리, 우물 흔적이 그 시절 사람들의 일상을 증언하는 단서가 된다.


02 무덤과 사사지, 죽음과 신앙이 공존한 공간



168필지 중 분묘지 2필지 737㎡, 사사지 2필지 257㎡가 기록되어 있다. 전체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크지 않지만, 이 네 필지가 품고 있는 의미는 청암동 전체에서 가장 무겁다.

분묘지 737㎡는 마을 사람들이 조상을 모신 공간이었다. 집들이 가득한 청암동에서 무덤이 2필지나 마을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오래전부터 형성된 뿌리 깊은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새로 개발된 지역이라면 무덤이 마을 안에 공존하기 어렵다. 청암동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과 나란히 살았다. 명절마다 마을 안에서 절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사사지 2필지 257㎡는 절이나 기도처, 혹은 마을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던 공간이었다. 청암동이 역사적으로 귀후서 터와 독서당 터 같은 조선시대 관아·교육 시설과 연결된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사지에도 오랜 역사적 연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민들이 함께 기원을 올리고 공동체의 평안을 빌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03 잡종지와 밭, 일상의 공간을 엿보다

잡종지 3필지 1,186㎡, 밭 8필지 2,968㎡. 주거 중심의 마을에서 이 두 종류의 땅은 일상의 숨통 같은 역할을 했다.

밭 8필지는 청암동 사람들이 직접 작물을 길러 먹거리를 마련하던 공간이었다. 한강과 가까운 청암동의 토양은 비옥했을 것이다. 무, 배추, 고추, 상추 같은 채소들이 이 좁은 밭들에서 자랐을 것이다. 한 집이 한 필지씩 밭을 갖기에도 부족할 만큼 작은 규모지만, 집 근처에 딸린 작은 텃밭처럼 생활의 일부였다.

잡종지 3필지는 특정 용도로 분류되지 않은 다목적 공간이었다. 골목 어귀의 공터, 집과 집 사이의 빈 땅,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작은 마당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동네 어린이 놀이터나 주민 쉼터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선 청암동에서 이 잡종지 3필지는 마을이 숨을 고르는 공간이었다.


04 국유지와 마을 소유지, 공동체의 흔적

국유지 4필지와 마을 소유지 3필지. 청암동 전체의 일부지만 의미 있는 기록이다.

국유지 4필지는 관공서나 총독부 관할 시설 부지였을 것이다. 청암동 한강변에 1924년 건립된 한강 수위관측소의 전신 시설이 이미 1912년 무렵부터 이 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혹은 한강변 수운을 관리하는 관청 관련 시설일 수도 있다. 국유지가 4필지나 됐다는 것은 이미 국가 권력이 이 작은 마을에도 그 손길을 뻗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을 소유지 3필지는 더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3필지는 청암동 주민들이 함께 관리하고 사용하던 공유지였다. 공동 우물이 있는 터였을 수도 있고, 마을 집회가 열리는 공터였을 수도 있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한 공동 창고가 있던 자리였을 수도 있다. 이 3필지는 청암동이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공동체적 삶이 살아있던 마을이었음을 증언한다.


05 성씨별 토지 소유, 뿌리의 기록



1912년 청암동의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마을의 사회 구조가 선명해진다.

1912년 청암동 — 성씨별 토지 소유 필지 수

김씨

38필지

이씨

20필지

박씨

13필지

최씨

11필지

김씨 38필지, 이씨 20필지, 박씨 13필지, 최씨 11필지. 김씨가 1위지만 나머지 성씨들도 비교적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청암동이 특정 씨족의 집성촌이라기보다 여러 성씨가 공존하는 혼성 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강 물류와 가까운 도시형 마을의 특성상,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필지를 보유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 38필지. 전체 168필지의 22.6%다. 다른 성씨들이 20필지 안팎인 것에 비해 두드러지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청암동에서 김씨 가문은 가장 큰 목소리를 가졌겠지만, 이씨·박씨·최씨와 협력하고 경쟁하며 공동체를 이루었을 것이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성씨 기록은 발굴된 유물을 특정 가문과 연결하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06 일본인의 땅, 식민지 그림자의 시작

일본인 소유 2필지. 168필지 중 2필지라면 1.2%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숫자는 크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1912년은 일제 강점 2년째. 아직 일본인의 토지 장악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청암동처럼 작고 조용한 한강변 마을에도 이미 일본인 소유지가 2필지 생겨났다는 사실은, 식민지 경제 구조의 침투가 서울 전역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2필지는 이후 더 늘어났을 것이다. 그것이 식민지 시대 토지 수탈의 방식이었다.

청암동 사람들은 이 2필지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두려움이었을까, 체념이었을까. 그 감정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2필지라는 숫자 안에 담겨 있다.


07 청암동과 한강, 귀후서터와 역사의 층위

청암동의 역사 유산 — 귀후서터·용호독서당터·한강 수위관측소

귀후서(歸厚署)는 조선시대 장례와 관련된 관청이었다. 그 터가 청암동에 있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조선의 공식 행정 공간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용호독서당터 또한 조선시대 독서당(사가독서)이 있었던 장소로, 학문과 연결된 공간이 이 한강변 마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924년 건립된 한강 수위관측소는 현재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청암동 한강변에 실물이 남아 있다.

청암동 한강변 —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물의 기억

용산구 서쪽 끝에 위치한 청암동은 한강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마을이었다. 남쪽은 한강 건너 여의도, 북쪽은 마포구 도화동과 접해 있었다. 조선시대 용산 일대는 경강(京江)의 중요한 수운 구간이었고, 청암동도 그 물길 속에 있었다. 1912년 청암동 사람들은 한강을 삶의 일부로 안고 살았다. 그 강물이 지금도 청암동 옆을 흐르고 있다.

청암동의 역사는 1912년 토지 기록보다 훨씬 깊다. 귀후서 터와 용호독서당 터가 이 마을에 있었다는 것은, 조선 시대 관아와 학문의 공간이 이미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 역사의 층위 위에 1912년 168필지의 민가가 더해졌고, 지금은 아파트와 빌라가 그 위를 덮고 있다. 세 개의 시간대가 한 땅에 겹쳐 있는 것이다.

1924년 건립된 한강 수위관측소가 지금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특히 의미 있다. 이 관측소는 1912년 당시 국유지 4필지 중 하나와 연결된 시설의 후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미 100년이 넘은 이 관측소가 청암동에 실물로 남아있다는 것은, 문화재 보존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08 지표조사로 되살아난 과거 — 왜 중요한가



지표조사(地表調査)는 땅 위와 표층에 남은 흔적들을 조사하는 기초 과정이다. 고운 자갈, 무너진 돌담, 돌비석의 자취, 지반의 변화 같은 것들이 단서가 된다. 이 조사가 없다면 1912년 청암동의 기록처럼 소중한 수치들이 개발 과정에서 파헤쳐지고 사라졌을 것이다.

서울에서는 실제로 도심 공사 현장에서 문화재가 발견되어 역사를 새로 쓴 사례가 여럿 있다. 청진동 주상복합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시전행랑(관영시장) 유구가 발굴됐고, 동대문운동장 부지 공사에서는 조선시대 수도 배수로와 성벽 시설이 드러났다. 청암동도 마찬가지다. 귀후서 터와 독서당 터가 있었던 이 마을에서 개발이 진행된다면, 반드시 사전 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발굴조사는 단순히 과거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도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고,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어떤 뿌리 위에 서 있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청암동 153필지의 집터 아래에 잠든 이야기들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09 서울 문화유산 조사, 어디에 어떻게 의뢰할까

문화재 조사 절차 — 5단계로 알아보기

1

예비 조사 — 해당 부지의 과거 지적도, 문헌 기록, 지형 변화 자료를 수집하고 역사성을 사전 검토한다.

2

지표조사 — 땅 위와 표층에서 유구나 유물의 흔적이 있는지 전문가가 현장을 탐색한다.

3

표본조사·시굴조사 — 지표조사에서 가능성이 확인된 지점을 좁혀 집중 조사한다.

4

발굴조사 — 유구 발견 시 국가유산청의 승인 하에 정식 발굴을 진행한다.

5

보고서 작성 및 보존 처리 — 발굴 결과를 정리하고 유물을 보존·공개한다.

발굴조사 의뢰 전 이것만 알아두세요

청암동처럼 귀후서터·독서당터 같은 조선시대 관아·시설 흔적이 기록된 지역에서는 개발 전 지표조사가 법적으로 권고되거나 의무화될 수 있습니다. 지적도, 과거 지도, 소유자 정보 등을 미리 준비하면 조사 절차가 빨라집니다. 소규모 공사의 경우 국가유산청의 국비 지원 발굴조사 제도를 활용해 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를 통해 관련 자료를 확인하세요.


마무리 —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청암동의 땅은 수치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53필지의 집터에는 삶이 있었고, 2필지의 무덤에는 죽음이 있었으며, 2필지의 사사지에는 신앙이 있었고, 8필지의 밭에는 노동이 있었다. 3필지의 공유지에는 공동체가 있었고, 2필지의 일본인 소유지에는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이야기들을 꺼내주는 도구다. 우리가 발 아래 땅을 잠시 내려다볼 때, 나지막한 돌 하나가, 무덤터의 돌담 조각 하나가, 밭의 경계선 흔적 하나가 과거 누군가의 삶의 일부였음을 상기시킨다.



1912년 청암동의 김씨 가문 38필지에서 일군 땅, 이씨 20필지의 집터, 박씨와 최씨의 이웃한 골목. 그 위로 지금도 한강이 흐르고 있다.

귀후서 터와 용호독서당 터가 있던 이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깊이, 기억을 쌓아왔을 뿐이다.

당신이 지표조사를 의뢰하든, 그저 이 이야기를 읽고 청암동이라는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하든. 그 작은 관심 하나가 역사를 살리는 등불이 된다. 땅은 언제나 기억을 기다린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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