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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용산구 청암동,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 지표조사로 밝혀낸 숨겨진 기록들

1912년 용산구 청암동, 그 땅 위에 어떤 삶이 숨어 있었을까. 우리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오래된 지도 위로 눈을 올려본다. 대지의 윤곽, 묘지의 자리, 밭의 길, 그리고 이름 있는 사람들의 필지 번호까지. 모든 것이 한 편의 삶의 흔적이다. 이 이야기는 땅이 기억해 온 것들을 되살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로 잇는 과거와 오늘의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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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임슬립, 1912년 서울 용산구 청암동으로 떠나는 여정



너무 오래전이라 느껴지지만, 우리는 옛 사진 한 장처럼 청암동의 1912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대지는 168필지, 약 43,305㎡. 이 속에 집, 밭, 무덤, 잡종지, 사사지 등의 자취가 모여 있다.


왜 이런 숫자들이 중요한가. 바로 지표조사를 통해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어떤 땅을 소유했는지’라는 기록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이 기록 덕분에 지금도 청암동이 단순한 주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거리, 서 있는 빌딩, 심지어 그늘 아래 나무 하나마저도 그 옛날의 땅 위에 올라선 것이다.




2. 청암동에는 얼마나 많은 집이 있었을까?



1912년 청암동에는 153필지, 약 38,155㎡의 대지가 ‘집’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나머지 대지 중 비집으로 남은 것은 무덤, 잡종지, 사사지, 밭 등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땅의 면적을 넘어 당시의 인구 밀도, 주거 형태, 삶의 구조를 암시한다. 각 필지마다 가옥이었을 것이고, 길과 물길, 담장과 마당이 있었을 것이다. 서울의 변두리이자 한강 가까이의 자연이 주는 혜택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사람들은 그 땅에 집을 세우고 터를 잡았을 것이다.




3. 무덤과 사사지, 청암동의 잊힌 풍경



집만 있는 땅이 아니다. 무덤(분묘지)과 사사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청암동 주민이 삶뿐 아니라 죽음과 의식, 조상 숭배와 공동체의 가치 또한 함께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 무덤은 2필지, 약 737㎡

  • 사사지는 2필지, 약 257㎡



이 작은 땅 조각들에는 개별 가족의 추억이, 마을 공동체의 기억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땅에 누워있는 이름들, 돌비석의 흔적, 제사를 지내던 장소가 어딘지 모를 흔적들은 지표조사 없이는 사라졌을 것이다.




4. 잡종지와 밭, 일상의 공간을 엿보다



집과 무덤만 있는 것은 아니다.


  • 잡종지(길, 빈땅, 잡다한 용도의 토지)로 3필지, 약 1,186㎡

  • 밭으로 8필지, 약 2,968㎡



밭은 농경생활의 흔적이다. 사람이 먹고 살기 위한 노동, 계절의 변화, 날씨와 땅의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잡종지에는 통로가 있었고, 물길이 있었고, 혹은 옆집 마당처럼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다양한 땅의 형태들은 단순한 도심 한 구획이 아니라 생명과 삶의 공간, 죽음과 숭고, 일상과 공동체가 공존하던 장소였음을 말해준다.




5. 국유지와 마을 소유의 땅, 공동체의 흔적



청암동에는 개인 소유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의 땅도 있었다.


  • 국유지: 4필지

  • 마을 소유지: 3필지



국가 또는 관공서 혹은 마을 전체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확보되거나 유지된 땅이다. 어쩌면 공동 우물터였을 수도 있고, 마을 회관이나 제의 공간, 도로나 공공 길을 확보하기 위한 땅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땅들이 있음으로써 공동체의 연결망, 삶의 기반이 더 촘촘했을 것이다.




6.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뿌리의 기록



이 땅들 위에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이름이 있고 성이 있다.


  • 김씨가 38필지

  • 이씨가 20필지

  • 박씨가 13필지

  • 최씨가 11필지

  • 기타 여러 성씨 존재



누구누구 집안이 이곳을 터를 삼아 살아왔는지가 기록으로 남는다. 각 필지의 크기와 위치, 가족 구성과 경제 상태에 따라 땅의 크기나 위치가 달랐을 것이다. 성씨별 토지 소유는 단순한 부동산 분포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 경제적 격차, 지역 내 영향력과 인맥 등을 보여주는 지표다.




7. 일본인의 토지 소유, 일제 강점기의 시작을 말하다



1912년이면 이미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아래 있었고, 일본인의 토지 소유도 일부 현실이었다.


  • 일본인은 2필지를 소유



이 숫자는 크지 않아 보이지만 상징적이다. 외국인, 특히 식민 통치 세력의 땅 소유는 제도적 힘, 토지 정책, 차별과 권력 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단지 땅의 소유가 아니라 권력의 일부를 가진다는 의미다.




8. 지표조사로 되살아난 과거 – 왜 중요한가?



지표조사(地表調査)는 본래 땅 위와 그 바로 아래의 흔적을 조사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고운 자갈, 무너진 돌담, 돌비석, 지반의 변화 등이 그것이다. 발굴조사와 표본조사, 시굴조사 등이 동반되기도 한다.


이런 조사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 아는 바로 이 수치들, 이 기록들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건축 과정에서 땅을 고르거나 길을 내거나 공장이나 아파트를 세우면서 과거의 흔적은 파헤쳐지고, 사라지고, 잊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4대문 안” 지역 등 역사문화 상징공간에서 지표조사의 중요성, 공공성, 제도 개선에 대한 노력이 확인된다.

서울시는 지표조사 공영제 도입, 지역별 문화유산 보존 방안 마련, 조사 결과의 데이터베이스화와 공개 등 제도적 보완을 추진해 왔다.




9. 성공 사례: 서울 도심 개발 중 발견된 청암동 유구



청암동 자체로 구체적 발굴 보고서가 공개된 것은 제한적이지만, 유사한 서울 중심지 지역에서의 성공 사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복판 청진동 주상복합 건물 공사 현장에서 조선시대 시전행랑(관영시장) 터 유구가 발굴된 것, 동대문운동장 부지 공사 중 조선시대의 수도 배수로 및 성벽 시설이 드러난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도심 개발이 곧 파괴가 아니라 ‘역사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또한, 서울시·지방자치단체가 조사공영제와 지표조사 결과 공개를 강화함으로써, 개발자와 시민 모두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게 된 것도 성공적이다. 이는 청암동과 같은 지역에서 주민 참여, 제도적 보호, 개발 계획 조정 등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10. 문화재 발굴이 필요한 이유 – 지금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땅



지표조사 및 발굴조사는 단순히 ‘옛날 유적’을 찾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다음을 가능하게 한다:


  • 우리 도시의 뿌리를 알고, 정체성을 확인하게 한다

  • 개발할 때 예상치 못한 유물, 유구에 대한 보호 계획이 미리 마련됨으로써 사업 지연, 비용 부담을 줄인다

  • 주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관광·교육 등 다양한 문화가치로 확장될 수 있다

  • 잊히고 지워질 뻔한 사람들, 무명인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 한다



청암동 같은 곳에서는 이 땅 위에 살았던 가족들, 제사를 지내던 무덤들, 밭을 갈던 손길, 집에서 웃고 울던 이들의 목소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11. 서울 지역 문화유적 조사, 어디에 의뢰할까?



청암동 혹은 유사 지역에서 발굴조사나 지표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다음 절차와 기관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절차 대략안:


  1. 예비 조사: 해당 땅의 고도성, 과거 지적도, 문헌 기록, 지형 변화 등을 확인

  2. 지표조사: 땅 위와 표층에서 유구나 유물이 있는지 탐색

  3. 표본조사 / 시굴조사: 지표조사에서 가능성 확인되면 좁은 지역을 집중 조사

  4. 발굴조사: 유구 발견 시 제도적 절차와 승인 하에 정식 발굴

  5. 보고서 작성 및 보존처리: 유물 정리, 보고, 공개, 필요 시 전시



비용, 시간, 허가 등의 제도적 요건이 있으므로 미리 관련 자료(지적도, 과거 지도, 소유자 정보 등)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12. 마무리: 땅이 기억하는 것들



1912년 청암동의 땅은 단순히 수치 이상의 이야기이다. 삶과 죽음, 공동체와 개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들이 그 위에 쌓여 있다.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이야기를 꺼내주는 도구다. 우리가 발 밑의 땅을 잠시 내려다볼 때, 나지막한 돌 하나가, 무덤터의 돌담 하나가, 잡종지의 움푹 패인 땅이, 밭의 경계선이 과거 누군가의 삶의 일부였음을 상기시킨다.


지금 개발과 변화가 빠른 서울에서도, 청암동과 같은 지역에서 이러한 기억을 보존하고 되살리는 일은 가능하다. 당신이 만약 그 땅의 소유자거나, 사업주거나, 또는 “내 동네 오래전엔 어땠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진 시민이라면 — 지표조사를 의뢰해 보자. 작은 관심 하나가 역사를 살리는 하나의 등불이 될 것이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숫자들:


  • 대지 168필지, 43,305㎡

  • 집 용도 대지 153필지, 38,155㎡

  • 무덤 2필지, 737㎡

  • 사사지 2필지, 257㎡

  • 잡종지 3필지, 1,186㎡

  • 밭 8필지, 2,968㎡

  • 국유지 4필지

  • 성씨별: 김씨 38필지, 이씨 20필지, 박씨 13필지, 최씨 11필지

  • 마을 소유지 3필지

  • 일본인 소유 2필지



이 기록들은 청암동이 단지 지도 위 점들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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