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용산구 용문동, 그곳에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8월 2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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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이런 땅이 있었다고?용문동 1912년 기록이 폭로한 100년의 비밀
용산구 용문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진짜 의미,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이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4분
"148필지 중 57필지.
그 땅의 주인은 한국인이 아니었다.
1912년 용산구 용문동, 이 숫자가 가진 무게를
당신은 알고 있는가?"
서울 용산구 용문동. 지금은 용문시장과 아파트, 학교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 동네를 걷다 보면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100년 전 이 땅의 기록을 열어보는 순간,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밭과 연못이 있었고, 마을 공동체가 살았고, 그리고 그 한편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어두운 역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 글은 1912년 용문동 토지 기록을 통해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고, 왜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 지역에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역사 강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발밑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진짜 이야기다.
목차 — 이 글의 흐름
1. 용문동, 100년 전 그 땅을 처음 펼쳐보다
2. 115채의 집, 그 안에 담긴 삶의 온도
3. 도로와 사사지 — 사람들이 오가던 길의 기억
4. 잡종지, 밭, 그리고 축구장 크기의 연못
5. 김씨, 이씨… 이름 속에 새겨진 뿌리
6. 국유지와 동척, 일제의 손이 닿은 흔적
7. 57필지 — 이 숫자가 말하는 것
8.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을 다시 읽는 방법
9. 성공 사례 — 땅속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10.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
1. 용문동, 100년 전 그 땅을 처음 펼쳐보다
1912년의 용문동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총 148필지, 157,000㎡. 지금 기준으로 보면 축구장 약 22개를 합친 크기다. 고층 아파트도, 대형 마트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사람들의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이름 모를 연못이 있었다.
지금 용문동을 걷는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용문시장의 활기찬 소음과 빽빽한 건물들일 것이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을 옆에 나란히 놓으면, 이 땅이 얼마나 많은 것을 빠르게 덮어버렸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덮인 것들 속에 문화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 잠을 깨우는 일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148
총 필지 수
157,000㎡
총 면적
115필지
대지(주거지)
57필지
일본인 소유
14필지
밭
9,038㎡
연못 1필지 면적

2. 115채의 집, 그 안에 담긴 삶의 온도
115필지, 약 90,000㎡의 대지. 이 숫자는 단순한 행정 수치가 아니다. 115개의 집이 있었다는 건, 115개의 삶이 이 땅 위에서 이어졌다는 뜻이다. 아침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채웠으며, 저녁이면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 하루를 정리했다.
한옥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이 집들 아래에는 마당을 가로질러 놓인 돌계단과 기단석, 온돌 구조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도 지표 아래에 남아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 전문가들이 조선 후기 주거지 유적을 찾을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런 대지의 집중 분포 구역이다. 용문동의 115필지 대지는 그 자체로 발굴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역사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기와 조각 하나, 도기 파편 하나로도 후대에 말을 건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필요하다.

3. 도로와 사사지 — 사람들이 오가던 길의 기억
1912년 용문동에는 8필지, 약 3,200㎡의 도로가 있었다. 포장도로가 아닌 사람들이 오가며 다져진 흙길이었다. 그 길 위로 짐을 진 사람이 지나갔고, 장을 보러 나가는 아주머니가 걸었으며, 아이들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1필지, 314㎡의 사사지. 이 절터의 존재는 작지만 중요하다. 사사지가 있었다는 건 이 마을에 불교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절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높은 우선순위를 가진다. 기와 조각, 불상의 잔편, 석조 건축 부재들이 지표면 가까이 혹은 얕은 땅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대의 GPS와 내비게이션엔 잡히지 않는 그 옛 길들. 하지만 그 길들은 지금의 용문동 골목 구조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겼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흔적을 읽는 작업이기도 하다.
4. 잡종지, 밭, 그리고 축구장 크기의 연못
9필지, 34,492㎡의 잡종지. 행정적으로 명확히 분류되지 않은 이 땅들은 어떤 용도였을까. 창고였을 수도 있고, 임시 거주 공간이었을 수도 있으며, 말 그대로 잡다한 용도로 쓰였을 수 있다. 바로 이 불명확함이 문화재 조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흥미롭다. 무엇이 나올지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구역이기 때문이다.
14필지, 20,000㎡ 이상의 밭. 지금의 용산 한복판에서 농작물이 자라던 시절이 있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잡초를 뽑으며 가을에는 수확을 했을 그 밭. 농경지는 고온다습한 토양 환경을 형성해 특정 유기물 유물의 보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
그리고 진짜 놀라운 것. 1필지 9,038㎡의 연못이다. 약 2,734평, 표준 규격 축구장의 1.3배 크기다. 용산 한복판에 이런 연못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연못 주변에는 사람들이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더위를 식혔을 것이다. 연못 바닥 퇴적층에는 당시의 생활 유물이 보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수습 발굴에서 연못 퇴적물은 항상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연못 하나가 사라지는 데는 채 한 세기가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바닥에 가라앉은 기억들은 아직 거기 있다."

5. 김씨, 이씨… 이름 속에 새겨진 뿌리
1912년 용문동 토지 대장에 이름을 올린 성씨들. 김씨가 19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보유했고, 이씨가 10필지로 뒤를 이었다. 나머지 다양한 성씨들이 크고 작은 필지에 이름을 남겼다.
이 이름들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부터 이곳에 뿌리를 내린 토박이거나,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서울로 이주해온 새로운 주민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 이름이 기록된 대장부는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라, 이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 자료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런 소유자 기록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어느 성씨가 어느 구역에 살았는지, 어떤 규모의 집을 지었는지가 발굴 방향을 결정하는 주요 단서가 된다. 역사는 이름 없는 통계가 아니라 이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구분 | 필지 수 | 특징 |
김씨 소유지 | 19필지 | 가장 많은 비중 |
이씨 소유지 | 10필지 | 두 번째 규모 |
일본인 소유지 | 57필지 | 전체의 약 38% |
동양척식주식회사 | 2필지 | 식민 수탈 상징 |
법인 소유지 | 15필지 | 사찰·학교 등 추정 |
공동체 소유지 | 1필지 | 마을 공동 공간 |
6. 국유지와 동척, 일제의 손이 닿은 흔적
국유지 2필지. 숫자는 적지만 이 존재가 말해주는 것은 크다. 그리고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른바 동척의 소유지 2필지다. 이 회사의 이름이 토지 대장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역사 증언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표면적으로는 '동양 발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땅을 일본인에게 이전하기 위한 핵심 도구였다. 용문동에서 이 회사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건, 이 동네도 그 수탈의 손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척 소유지 인근에는 당시 일본식 건축물의 잔재나 경계석, 일본에서 들어온 건축 자재들이 지표 아래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런 불편한 역사와도 정직하게 마주하는 과정이다. 불편한 역사일수록 더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

7. 57필지 — 이 숫자가 말하는 것
148필지 중 57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약 38%다. 용문동 땅 세 곳 중 하나는 일본인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이건 단순한 부동산 투자가 아니었다. 1912년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57필지는 어떻게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을까. 강제 매수, 국가 권력을 앞세운 헐값 거래, 혹은 식민 정책에 의한 직접 배분. 어떤 경로였든 그 과정에는 조선인 원 소유자들의 상실이 있었다. 이 기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아픔을 담은 역사 자료다.
위키백과에 기록된 것처럼 용문동에는 남이 장군 사당이 있고, 단우물과 짠우물이 지금도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런 역사 지명들이 살아있는 동네에서 1912년 토지의 38%가 외국인 소유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충격적인 역사의 단면이다.
"57필지를 잃는 데는 2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땅의 기억을 되찾는 데는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하다."

8.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 땅을 다시 읽는 방법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하는 조사다. 문헌 분석, 지형 관찰, 표면 유물 수습을 통해 이 구역에 매장문화재가 있는지 판단하는 첫 번째 단계다. 용문동처럼 115채의 주거지와 절터, 연못, 다양한 소유 구조가 있었던 지역은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주목도가 매우 높은 곳이다.
지표조사 이후에는 표본조사가 이루어진다. 전체 사업 면적 중 매장문화재 가능성이 있는 구역의 2% 이내에서 표본적으로 땅을 열어보는 것이다. 그 다음은 시굴조사. 10~20% 범위에서 유적의 성격과 규모를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
이 순서를 지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한번 파괴된 유적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연못 바닥에 가라앉은 도기, 집터 아래 묻힌 온돌 구조물, 절터에 남은 기와 더미. 이것들은 절차를 지킬 때만 온전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서울은 지금도 끊임없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용문동 역시 그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재개발이 진행될 때마다 지표조사 없이 공사가 시작된다면, 우리는 영원히 모를 것들이 생겨난다. 그 손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9. 성공 사례 — 땅속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성공 사례 01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가 땅에서 나왔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7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공동 우물, 옛 도로 흔적뿐만 아니라 16세기 층에서 한글과 한자가 혼용된 금속활자와 일성정시의, 주전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을 실물로 증명한 역사적 발견이었다. 이 발굴이 가능했던 이유는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성공 사례 02
구로구 신축 현장 — 조선 후기 우물터의 귀환
2022년, 서울 구로구 한 신축 현장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우물터와 도기 조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단순한 유물 발견을 넘어 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 새롭게 조명되었고, 주민들의 지역 자긍심도 크게 높아졌다. 문화재 지표조사가 지역 공동체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 사례다.
성공 사례 03
용산구 효창동 — 토지 기록이 발굴 방향을 잡다
용문동 인근 효창동에서 진행된 조사에서도 1912년 토지 기록이 발굴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사사지와 대지가 집중된 구역을 중심으로 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선 후기 건물지와 생활 유물이 확인되었다. 100년 전 지적도가 지금의 발굴 지도가 된 셈이다.

10.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
오늘도 서울 어딘가에서는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 포클레인이 땅을 파고, 기초 공사가 시작된다. 그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용문동의 1912년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 발밑의 서울은 겹겹이 쌓인 시간의 도시다. 115채의 집, 거대한 연못, 절터, 그리고 수십 명의 이름들. 이것들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뿌리다.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뢰하는 것, 내가 사는 동네의 재개발 계획에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발굴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 작은 행동들이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커다란 선물이 된다. 지금의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것들이 있다.
용문동 골목을 걷다가 문득 발밑을 보세요.
그 아래, 누군가의 마당이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기억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입니다.
우리가 기억할수록 역사는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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