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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은평구 역촌동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 2025년 6월 3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은평구 역촌동, 100년 전엔 산이 마을을 품고 논이 그 발치를 적시던 땅이었다

1912년 은평구 역촌동 토지 기록으로 읽는 잃어버린 서울의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혀낸 산과 논과 수탈의 이야기

역촌동 골목을 걷다가


한 번쯤 이 질문을 던져봐.


이 땅의 81필지를 소유했던 김씨 일가는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들의 44필지를 빼앗아간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무엇을 남겼을까.



목차

  1. 프롤로그: 1912년, 역촌동의 숨겨진 이야기

  2. 논이 역촌동을 뒤덮던 시절

  3. 역촌동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

  4. 산과 무덤, 역촌동의 숨은 얼굴

  5. 김씨와 이씨, 역촌동의 오랜 터줏대감

  6. 식민의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

  7. 역촌동의 오늘을 만든 국유지 이야기

  8. 마무리: 역촌동의 역사, 다시 보는 오늘

역촌동을 아는가. 은평구에 있는 이 동네는 요즘 불광천과 가까운 조용한 주거지로 알려져 있다. 화려한 핫플레이스라거나 역사적 명소라는 인상은 없다. 그냥 서울 서북쪽의 평범한 동네. 그런데 1912년 기록을 펼쳐보면, 그 평범함 아래 예상보다 훨씬 무겁고 깊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은 역촌동의 본래 얼굴을 보여준다. 산에 둘러싸인 논밭 마을, 그 마을을 터전 삼아 살아온 조선인 가문들, 그리고 그 땅에 깊숙이 들어온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보자.


1. 프롤로그: 1912년, 역촌동의 숨겨진 이야기

우리가 지금 걸어 다니는 은평구 역촌동 거리가 한때 논과 밭과 산으로 가득했다는 걸 상상해본 적 있는가. 아파트 단지와 카페가 들어선 자리에 벼가 자라고, 산자락에 초가집이 모여 있었던 그 장면. 불과 110년 전의 이야기다.

1912년 역촌동은 지금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거기에 더해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이 동네 토지 기록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조선인이 대대로 일궈온 땅에 동양척식주식회사가 44필지나 파고들었다는 사실, 그게 이 역촌동 기록을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닌 살아있는 아픔으로 만드는 지점이다.


2. 논이 역촌동을 뒤덮던 시절

1912년 역촌동에서 가장 눈에 띄는 토지는 논이었다. 55필지, 436,702㎡. 지금의 역촌동 풍경과 겹쳐 보면 그 규모가 실감이 난다.

55필지

논 (436,702㎡)

30필지

대지 (23,124㎡)

8필지

임야 (413,305㎡)

2필지

분묘지 (1,639㎡)

44필지

동척 소유지

37필지

국유지

436,702㎡의 논. 축구장 약 61개를 채울 수 있는 넓이다. 지금 역촌동에서 가장 넓은 아파트 단지와 비교해도 몇 배나 되는 면적이다. 그 광대한 논에서 봄이면 모내기가 시작되고, 가을이면 황금빛 벼 이삭이 바람에 흔들렸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논의 풍경이 역촌동 사람들의 한 해를 채웠다.

흥미로운 건 역촌동이 산에 둘러싸인 지형이라는 점이다. 임야가 무려 8필지, 413,305㎡에 달했다. 즉, 역촌동은 광활한 산이 마을을 감싸고, 그 산 발치에 55필지의 논이 펼쳐진 전형적인 산촌 농경 지대였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논을 적시고, 그 논에서 마을 사람들의 식량이 자랐다. 지금의 역촌동에서 그 물길의 흔적을 찾아보면, 어쩌면 불광천 어딘가에 그 기억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이런 산촌 농경 지대는 독특한 역사 층위를 가진다. 산에서 내려오는 토사와 논의 퇴적층이 겹쳐 쌓이는 지역은 다양한 시대의 문화 흔적이 층층이 보존되기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역촌동 지하 어딘가에 그 층위가 아직 있을 수 있다.



3. 역촌동에 자리 잡은 사람들의 이야기

1912년 역촌동에는 30필지, 23,124㎡의 대지가 있었다. 그 30개의 집터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논이 55필지인데 집은 30필지. 논 거의 두 필지마다 집 한 채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농경지와 주거지가 긴밀하게 얽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풍경이었다.

30필지의 집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대부분 초가지붕 아래 마당이 있는 구조였을 거다. 마당에 장독이 줄지어 서 있고, 우물이 하나씩 있었을 테고, 이웃집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살았을 거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저녁 연기가 산자락을 배경으로 올라가는 풍경. 그게 100년 전 역촌동 30필지 위의 일상이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집터는 중요한 유구다. 온돌 구조, 기와 파편, 아궁이의 재층, 생활 도기 조각들이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30필지 중 어느 하나라도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역촌동 조선인 마을의 생활상이 눈앞에 펼쳐질 수 있다.


4. 산과 무덤, 역촌동의 숨은 얼굴

역촌동 기록에서 가장 놀라운 숫자 중 하나는 임야 8필지, 413,305㎡다. 논이 436,702㎡였으니, 논과 산이 거의 같은 면적이다. 역촌동은 산과 논이 거의 대등하게 공간을 나눈 땅이었다는 뜻이다.

413,305㎡의 산. 지금의 북한산 둘레길 일부 구간을 합친 것과 비슷한 면적이다. 그 산이 역촌동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캐고, 때로는 산신에게 제를 올리기도 했을 거다. 산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마을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덤이 있었다. 2필지, 1,639㎡. 면적은 작지만, 이 두 필지에 역촌동 사람들의 조상이 잠들어 있었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찾아가 절을 올리고, 그 앞에서 음식을 나누며 가족의 유대를 확인하던 그 분묘지가 역촌동 어딘가에 있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분묘지는 특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는 공간으로, 조선 시대 매장 문화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5. 김씨와 이씨, 역촌동의 오랜 터줏대감

1912년 역촌동 토지 기록에는 다양한 성씨가 등장한다.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건 김씨로 81필지를 소유했다. 이씨가 12필지로 그 뒤를 이었다.

81필지

김씨

12필지

이씨

44필지

동척 소유

37필지

국유지

김씨 81필지. 이건 단순히 성씨가 많다는 게 아니다. 역촌동 전체 사유지에서 김씨 한 성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라는 건, 이 가문이 오랫동안 역촌동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같은 본관의 김씨 일가가 대대로 이 논을 갈고, 이 산에 선산을 마련하며 살아왔을 거다.

그 81필지의 김씨 가문이 1912년 이후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봐. 일제강점기가 진행되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역촌동에 44필지를 확보했다. 그 44필지 중 일부가 원래 김씨 가문의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마을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이 역촌동 김씨 중에도 있었을 거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성씨 기록은 단순한 토지 소유 정보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어느 구역에 어느 가문이 살았는지 알면, 그 지역 출토 유물의 귀속과 역사적 맥락을 연결할 수 있다. 비석 하나, 기와 파편 하나가 성씨 기록과 만나면 이름 없는 조각에 갑자기 이야기가 생겨난다.


6. 식민의 흔적, 동양척식주식회사



1912년 역촌동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 여기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 44필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역촌동에 있었다는 것의 의미

1908년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경제를 장악하기 위해 세운 국책회사. 1912년은 토지조사사업이 한창이던 시기로, 동척은 전국 각지에서 조선인의 땅을 수탈하거나 국유지를 불하받아 급격히 세력을 키웠다. 역촌동의 44필지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17년 말 기준 조선 총독부 다음의 최대 지주로 성장한 동척의 영향이 은평구 역촌동이라는 작은 동네에도 고스란히 미쳤던 거다.

44필지. 역촌동에서 김씨 가문이 81필지를 가진 최대 지주였다면, 동척은 단일 법인으로는 두 번째로 많은 땅을 가진 셈이다. 그 땅에서 일했던 조선인 소작농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다. 자신이 씨를 뿌리고 땀 흘려 거둔 벼의 절반 이상이 동척으로 넘어가는 구조. 그 구조 속에서 역촌동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무겁다.

동척에 맞선 저항의 역사도 있다. 독립운동가 나석주 의사는 1926년 경성의 동척 건물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건 한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44필지 역촌동을 포함한 전국 수백만 조선인의 분노를 대신한 행동이었다. 역촌동의 이 44필지도 그 역사의 한 조각이다.


7. 역촌동의 오늘을 만든 국유지 이야기

1912년 역촌동에는 국유지가 37필지나 있었다. 동척 소유 44필지와 합치면, 역촌동 전체 토지 중 개인이 아닌 법인이나 국가 소유인 땅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37필지의 국유지는 어떤 땅이었을까. 역촌동 지형 특성상 산 가까이에 있는 역둔토, 즉 조선 시대 관청 소속 농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마을 도로, 수리 시설, 관청 부지였을 수도 있다. 37필지라는 숫자는 역촌동에 국가 차원의 관리가 상당히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국유지가 후에 역촌동의 도시 개발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추적이 필요하지만, 민간 소유에 비해 수용과 용도 변경이 쉬운 국유지는 종종 공공 시설의 기반이 됐다. 지금 역촌동 어딘가에 있는 공원, 도로, 공공건물이 1912년 37필지 국유지의 연장선 위에 있을 수 있다.


8. 마무리: 역촌동의 역사, 다시 보는 오늘



역촌동의 1912년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오다 보면, 평범하게 보이던 이 동네가 전혀 다른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55필지의 논, 8필지의 산, 30필지의 집, 2필지의 무덤. 그리고 81필지의 김씨 가문, 44필지의 동척, 37필지의 국유지. 이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이 1912년 역촌동의 진짜 얼굴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는 이 기록들을 분석하고 역사 지도를 구축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역촌동처럼 산이 마을을 감싸고, 논이 그 발치를 적시던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예상치 못한 역사 층위가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건설 공사 전 지표조사, 필요 시 시굴조사와 표본조사, 정밀 발굴조사로 이어지는 단계별 작업이 이 땅의 이야기를 지키는 방법이다.

역촌동을 걸을 때 이제 조금 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가. 김씨 가문이 일구던 논, 동척에 빼앗긴 44필지, 산 발치에 조용히 자리했던 두 집안의 무덤. 그 위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역촌동 골목을 걷다가, 딱 한 번만 멈춰봐.



산이 마을을 감싸고,


논이 그 발치를 적시던 그 땅에서


김씨 가문이 대대로 벼를 길렀고,


동척이 그 땅 44필지를 빼앗아갔고,


이름 모를 두 집안의 조상이 산자락에 잠들었다.



그 아픔을 딛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골목 아래 아직 있다.



역사를 알면, 걷는 발걸음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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