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성동구 송정동, 그 땅 위에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5월 12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3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 기관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1912년, 성수동 옆 그 땅의진짜 주인은 누구였을까
성동구 송정동 79필지 — 동양척식주식회사, 창덕궁, 국유지까지. 문화재 발굴 기관이 밝혀낸 한 동네의 충격적인 100년 전 기록
지금 성수동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당신.그 자리, 100년 전엔 일본 회사의 땅이었다.그 사실을 알고도 같은 기분으로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서울에서 가장 핫한 동네 성수동. 그 바로 옆, 성동구 송정동.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그 골목이 1912년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총 79필지, 면적 1,296,528㎡에 달하는 광활한 땅. 그 땅 위에는 일본 식민 자본의 흔적, 조선 왕실의 그늘, 그리고 이름 없는 농부들의 땀이 뒤섞여 있었다. 문화재 발굴 기관이 밝혀낸 이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 강의가 아니다. 지금 당신이 발 딛고 있는 이 도시의 민낯이다.
목 차
송정동, 그 이름을 처음 불러보면
문화재 지표조사가 들춰낸 숫자들
너른 들판 위의 삶 — 논과 밭 이야기
삶의 터전, 대지와 집의 기억
숲과 산이 지킨 임야의 기록
잡종지 — 모두의 것이었던 잊혀진 땅
성씨로 읽는 송정동의 사람들
나라의 땅, 국유지의 무게
동양척식주식회사 — 침략의 발자국
궁궐의 그늘, 창덕궁 소유지
문화재 발굴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것
성공 사례 — 역사를 지킨 발굴의 기억들
마무리 — 송정동이 전하는 말

SECTION 01
1. 송정동, 그 이름을 처음 불러보면
성수동이라고 하면 누구나 안다. 요즘 가장 핫한 서울의 동네, 수제화 골목에서 출발해 카페와 갤러리가 가득한 힙스터의 성지. 그런데 성수동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송정동을 아는 사람은 훨씬 적다.
성동구 송정동. 지금은 조용하고 주거 중심의 동네지만, 1912년이라는 시간의 창문을 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일제강점기 초반, 조선의 토지조사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그 해, 송정동은 총 79필지에 1,296,528㎡의 방대한 땅을 품고 있었다.
숫자만 들어도 놀랍다. 1,296,528㎡. 지금으로 치면 여의도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런데 이 넓은 땅이 당시에는 얼마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손에 나뉘어 있었는지, 그 복잡한 구조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는 서울 전역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현대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성동구 역시 이 조사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으며, 송정동의 기록은 특히 흥미로운 구조를 보여준다.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조선 왕실, 일본 식민 자본, 국가 권력, 그리고 이름 없는 농민들이 한 땅 위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SECTION 02
2. 문화재 지표조사가 들춰낸 숫자들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그 땅의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작업이다. 과거의 문헌, 지적도, 고지도를 교차 분석하고 지표면에서 확인 가능한 흔적들을 수집해 해당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지를 판단한다. 이 조사가 선행되어야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1912년 송정동 조사 데이터를 펼쳐보면, 그 구성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79필지총 필지 수
1,296,528㎡총 면적
6필지잡종지
855,960㎡
52필지국유지
6필지동양척식
주식회사
2필지창덕궁
소유지
전체 면적 중 잡종지 6필지가 무려 855,960㎡로 전체의 66%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52필지가 국유지라는 점,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가 6필지, 창덕궁 소유지가 2필지라는 사실들이 연이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 숫자들 하나하나가 당시 송정동이 얼마나 복잡한 권력 지형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SECTION 03
3. 너른 들판 위의 삶 — 논과 밭 이야기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창덕궁 이야기로 가기 전에, 먼저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들이 일군 논과 밭이 없었다면, 이 모든 복잡한 소유 관계도 의미가 없었을 테니까.
1912년 송정동의 논은 5필지, 37,173㎡였다. 한강과 가까운 성동구 일대의 지형적 특성상, 한강 지류에서 물을 끌어들여 논을 일궜을 것이다. 봄이면 물을 채우고, 여름 내내 벼를 키우고,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그 논의 풍경. 지금의 성수동 카페 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바로 이 자리였다.
밭의 규모는 더 크다. 무려 50필지, 382,755㎡. 전체 필지 수 79개 중 63%가 밭이라는 뜻이다. 이 밭들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작물이 자랐을 것이다. 봄에는 상추와 쑥갓, 여름에는 고추와 호박, 가을에는 무와 배추. 지금도 성동구 일대에 가면 가끔 오래된 텃밭을 만날 수 있는데, 그 텃밭들이 100년 전 송정동 밭의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묘한 감정이 든다.
이 논과 밭을 일군 사람들은 이름이 남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의 노동이 이 마을을 먹여 살렸고, 그 노동의 흔적이 지금도 땅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SECTION 04
4. 삶의 터전, 대지와 집의 기억
논밭 사이사이에 집이 있었다. 대지 16필지, 8,360㎡. 79필지 중 16필지가 집터라는 것은, 당시 송정동이 그리 큰 마을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적다고 해서 가볍지 않다. 그 16필지 위에 각각 한 가족의 삶이 있었다.
단층 기와집이었을 수도 있고, 초가지붕 흙벽 집이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어머니가 장독대 옆에 앉아 간장을 담그고, 아버지가 논에서 돌아와 손발을 씻던 그 집들. 지금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거나, 빌라 골목이 형성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파트 기둥 아래, 빌라 계단 아래 어딘가에 100년 전 그 집의 초석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문화재 발굴 과정에서 조선시대 또는 근대 초기의 주거지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다. 특히 성동구처럼 한강변에 인접한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에, 대지 16필지 아래 어떤 층위의 역사가 쌓여 있을지는 실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SECTION 05
5. 숲과 산이 지킨 임야의 기록
2필지, 12,277㎡. 필지 수는 적지만 임야는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산과 숲은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가는 생계의 공간이었고, 약초를 캐러 가는 치유의 공간이었으며, 무덤이 들어서는 기억의 공간이었다.
성동구 일대가 지금은 완전히 도시화됐지만, 1912년 당시에는 서울 외곽의 야산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12,277㎡에 달하는 이 임야가 어느 방향에 위치했는지, 지금의 어떤 장소와 겹치는지를 추적해보는 것도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특히 임야는 봉분(무덤)이 조성되기 좋은 조건이다. 만약 이 임야 안에 조선시대 묘역이 존재했다면, 그 아래에는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부장품이나 유구가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역사가,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SECTION 06
6. 잡종지 — 모두의 것이었던 잊혀진 땅
이제 송정동에서 가장 충격적인 데이터를 봐야 할 시간이다. 잡종지 6필지, 855,960㎡. 전체 면적의 무려 66%가 잡종지였다. 이 숫자 앞에서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
잡종지(雜種地)란 지목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땅을 말한다. 농지도 아니고 주거지도 아니고, 특정 시설 부지로 분류되지도 않은 땅. 당시 행정적으로 정확한 용도를 부여하기 어렵거나, 다양한 용도로 혼용되던 공간이 잡종지로 기록됐다. 공터, 창고, 도로, 하천변 완충지, 임시 작업장 등이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6필지에 855,960㎡라는 규모는 단순히 애매한 땅의 집합이 아니다. 이 넓이는 논(37,173㎡)의 23배, 밭(382,755㎡)의 2.2배에 달한다. 마을 전체 땅의 3분의 2가 용도 불명의 잡종지였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아직 완전히 개발·정비되지 않은 미개척 상태였음을 의미한다.
"가장 넓었지만 가장 이름이 없었던 땅. 잡종지는 어쩌면 그 시대 가장 솔직한 기록이었을지도 모른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방대한 잡종지가 한강변 인근이라는 점이다. 한강의 홍수 범람 구역이나 배후습지가 잡종지로 기록됐을 가능성이 있고,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는 강변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층층이 쌓여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잡종지야말로 가장 주목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다.
SECTION 07
7. 성씨로 읽는 송정동의 사람들
이 광활한 땅에서 살아가던 개인들은 누구였을까. 1912년 토지조사 기록에는 소유자의 성씨가 남아 있어, 당시 송정동 주민들의 면면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성씨 | 소유 필지 수 | 특이 사항 |
이씨(李) | 3필지 | 최다 개인 소유 |
박씨(朴) | 2필지 | |
신씨(申) | 2필지 | |
정씨(鄭) | 2필지 | |
한씨(韓) | 2필지 |
이씨 3필지, 박씨·신씨·정씨·한씨 각 2필지. 숫자 자체는 크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소유한 총 11필지라는 수치는 전체 79필지 중 14%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땅이 국유지(52필지)와 잡종지(6필지)로 이루어진 송정동에서, 개인 소유 11필지는 실제 주민들이 이 마을에서 살아가던 삶의 흔적이다.
이씨가 3필지로 가장 많다는 것은 이씨 가문이 이 동네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한씨(2필지)의 존재도 흥미롭다. 성동구 일대에는 조선시대부터 한강 뱃사공이나 어부와 관련된 직업 집단이 거주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한씨 집안이 그 계통과 연관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성씨들의 후손이 지금도 성동구 어딘가에 살고 있다면, 그들은 알게 모르게 조상의 땅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이 왠지 뭉클하다.

SECTION 08
8. 나라의 땅, 국유지의 무게
52필지가 국유지였다. 전체 79필지의 66%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비중이다. 숫자로만 보면 당시 송정동은 국가가 대부분을 소유한 땅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1912년이라는 시점은 일제강점기 초반이다. 즉, 이 '국유지'가 단순히 대한제국의 국유지를 뜻하는 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접수한 국유지일 가능성이 높다. 대한제국이 무너지면서 왕실 소유지나 관청 소유 토지들이 일괄적으로 조선총독부 소유로 전환됐고, 이것이 1912년 토지조사에서 '국유지'로 기록된 것이다.
52필지의 국유지가 어떤 용도로 사용됐는지, 지금의 어떤 시설과 겹치는지는 구체적인 현장 조사 없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땅들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그 아래에는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초반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통과한 역사의 지층이 쌓여 있다는 것이다.
알아두면 유익한 정보
국유지로 분류된 땅에서 건설 공사가 진행될 경우,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하면 최대 5년 이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개발 전 반드시 문화재 발굴 기관에 자문을 구하는 것이 필수다.
SECTION 09
9. 동양척식주식회사 — 침략의 발자국
이 글에서 가장 무거운 챕터다.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줄여서 '동척'이라고 불리는 이 기관은 1908년 일본이 설립한 식민지 수탈의 도구였다.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합법적으로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국책 회사였고, 전국 각지에서 토지를 사들이거나 강제로 취득하는 방식으로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축적했다.
송정동에도 동척 소유의 땅이 6필지 있었다. 구체적인 면적은 기록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6필지라는 숫자 자체가 이미 충분히 말해준다. 이 회사의 이름이 찍힌 땅 위에서 농사를 지어야 했던 조선인 농민들의 처지를 상상해보면,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삶의 고통이 느껴진다.
동척은 1917년부터 만주, 러시아 연해주까지 사업을 확대했고,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해체됐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토지 문서는 지금도 국가기록원에 일부 보존되어 있으며, 문화재 지표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역사의 잔혹함이 아이러니하게도 역사를 지키는 기록이 된 것이다.
송정동 동척 소유지 6필지가 지금의 어떤 땅인지를 추적하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호기심을 넘어 우리 사회가 식민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청산했는지를 되짚는 작업이기도 하다.

SECTION 10
10. 궁궐의 그늘, 창덕궁 소유지
어두운 이야기 다음에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가 온다. 창덕궁 소유지 2필지. 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정보가 아니라, 조선 왕조의 마지막 숨결이 닿아 있는 기록이다.
창덕궁은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건립된 왕실의 이궁(離宮)으로, 임진왜란 이후 270년 이상 조선의 사실상 법궁 역할을 했다. 이 왕궁이 서울 외곽, 지금의 성동구 송정동 인근에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왕실 소유의 외곽 토지는 대개 두 가지 용도였다. 첫째는 왕실 재정에 충당하기 위한 수입원으로서의 농지. 왕실 소속 농민들이 이 땅을 경작하고 수확물의 일부를 궁에 납부했다. 둘째는 말 목장이나 수렵지처럼 왕실 생활과 직결된 특수 용도 토지. 한강 인근의 성동구 일대는 조선시대 왕실 말 목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만큼, 창덕궁 소유지 2필지가 그와 연관됐을 가능성도 있다.
1912년은 창덕궁이 이미 일제에 의해 축소되고 황실 재산이 체계적으로 침탈당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정동의 2필지가 아직 창덕궁 소유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 침탈 과정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의 마지막 흔적일 수 있다. 이 2필지 위에는 조선 왕조의 영광과 쇠락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SECTION 11
11. 문화재 발굴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것
여기까지 읽었다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 것이다. 이게 다 100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 우리한테 왜 중요한 걸까?
답은 간단하다. 도시는 계속 변하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땅을 파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그리고 그 땅 아래에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역사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그것을 모르고 파면 영원히 사라지고, 알고 파면 보존할 수 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다.
성동구 일대는 최근 몇 년 사이 성수동을 중심으로 재개발과 상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됐다. 오래된 공장 건물들이 카페와 쇼룸으로 탈바꿈했고, 낡은 골목들이 젊은 창업자들의 공간으로 채워졌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역사적 층위가 파괴됐는지, 혹은 얼마나 소중하게 보존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1912년 송정동에 기록된 창덕궁 소유지, 동척의 흔적, 국유지 52필지, 이름 없는 농민의 밭 50필지.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성동구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우리가 아직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 동네도 조사해보고 싶다면?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에서 성동구를 포함한 서울 25개 구의 1912년 토지조사 기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의 법적 절차와 예산 정보도 상세히 제공됩니다. 개발 전 한 번의 조사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손실을 막을 수 있습니다.
SECTION 12
12. 성공 사례 — 역사를 지킨 발굴의 기억들
문화재 발굴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성동구 인근에서 이루어진 사례와 유사한 서울 내 발굴 성공 사례를 통해 살펴보면 이 작업의 중요성이 더욱 실감 난다.
성공 사례 1
뚝섬 유원지 일대 — 한강변 생활 유적 발굴
성동구 뚝섬 인근에서 진행된 도시 인프라 공사 과정에서 조선 후기 한강변 어촌 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됐다. 당시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지역이 역사적 가치가 높은 구역으로 사전에 분류됐기 때문에, 공사팀이 신속하게 발굴팀에 연락했고 유물이 제대로 수습될 수 있었다.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그냥 버려졌을 역사다.
성공 사례 2
광화문 광장 — 600년 행정 중심지의 귀환
2006년 광화문 광장 조성 과정에서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 거리의 유구가 발견됐다. 발굴조사를 통해 600년 전 조선의 행정 중심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광장은 이 역사적 층위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재설계됐다. 지금 광화문 광장 지하에는 조선의 역사가 그대로 잠들어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힘이 만들어낸 결과다.
성공 사례 3
성동구 하왕십리 — 근대 초기 주거지 발굴
성동구 하왕십리 일대 재개발 과정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선제적으로 시행한 결과, 일제강점기 초반의 주거지 흔적과 함께 조선 말기 생활 유물이 발견됐다. 공사 업체는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발굴 구역을 미리 설정해 공사 일정 지연 없이 유물을 보존했다. 사전 지표조사가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는 동시에 역사를 지킨 사례다.
이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하나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역사를 위한 낭만적인 작업이 아니라,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실용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지표조사를 제대로 시행한 경우, 공사 중 예상치 못한 발굴로 인한 중단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전체 공사 비용도 낮아진다. 역사도 살리고, 돈도 아끼는 것이다.

SECTION 13
13. 마무리 — 송정동이 전하는 말
1912년 송정동은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이씨, 박씨, 신씨, 정씨, 한씨가 일군 논밭. 창덕궁이 내려다보던 왕실의 토지.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찍어놓은 수탈의 도장. 국가가 관리하던 52필지의 광활한 땅. 그리고 용도조차 정해지지 않은 채 펼쳐져 있던 855,960㎡의 잡종지.
이 모든 것이 지금의 성동구 송정동 어딘가에 겹쳐 있다. 젊은이들이 커피를 마시는 카페 건물 아래에, 주부들이 장을 보는 골목 아래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원 아래에. 우리는 그 위를 매일 걸어 다니면서 그것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알고 걷는 것과 모르고 걷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이 땅이 어떤 사람들의 꿈과 노동으로 만들어졌는지, 어떤 권력과 고통이 이 땅을 통과했는지를 알고 걷는다면, 도시는 조금 더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다. 과거를 파헤쳐 현재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 이름 없이 이 땅을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송정동은 지금도 변하고 있다. 하지만 변해가는 그 땅 아래에서, 100년 전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씨의 논에서 자란 벼가창덕궁 상에 올랐을지도 모를 그 땅.
동척의 도장이 찍힌 밑에서도묵묵히 씨를 뿌렸을 이름 없는 농부.
그 땅이 지금 당신의 발아래 있다.오늘만큼은, 잠시 멈춰 그 땅을 느껴보길.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도시는누군가의 삶 위에 지어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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