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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방배동, 땅이 기억하는 이야기 – 논과 밭 사이에 숨은 문화유산의 시간

  • 2025년 10월 24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6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서초구 지역조사 · 문화재 지표조사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그 길 아래, 한 세기 전 누군가의 논이 있었다 — 1912년 방배동 651필지, 프랑스인 31필지의 미스터리

방배동 카페 거리를 걸으면서 이 생각을 해본 적 있어? 지금 이 카페 아래에 1912년에는 논이 있었고, 그 논 옆에 프랑스인이 31필지나 소유한 땅이 있었다는 걸. 이 시리즈에서 영국인, 미국인, 중국인은 봤어. 하지만 프랑스인이 단일 구역에 31필지를 소유한 건 처음이야. 왜 프랑스인이 방배동에 있었을까? 이 글이 그 미스터리를 풀어줄 거야.


목차

  • 땅은 잊지 않는다 — 프롤로그

  • 논과 밭이 노래하던 시절, 방배동의 풍경

  • 집과 삶의 자취 — 대지 위의 사람들

  • 산자락의 고요함 — 임야·분묘·사사지를 찾아서

  • 외국인의 발자국 — 프랑스인 소유 31필지의 미스터리

  • 성씨가 말하는 마을의 역사 — 이씨에서 홍씨까지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로 되살아나는 1912년 방배동

  • 시간의 층을 걷다 — 에필로그


프롤로그땅은 잊지 않는다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그 길 아래, 한 세기 전 누군가의 논이 있었어. 그 한 문장이 방배동을 다시 보게 만들어. 1912년, 서울 서초구 방배동은 지금의 번화한 카페 거리가 아닌 고요한 들판과 산이 어우러진 조용한 마을이었어.

그 시절의 기록은 단 한 장의 지적도와 몇 줄의 수치로 남아 있지만 그 속에는 수백 명의 삶, 그리고 문화의 흔적이 응축되어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www.seoulheritage.org)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잊힌 시간의 문을 여는 열쇠야. 방배동의 651필지가 품은 이야기를 지금부터 펼쳐볼게.


1논과 밭이 노래하던 시절, 방배동의 풍경



1912년 방배동에는 291필지, 957,895제곱미터의 논이 있었어. 물길이 구불구불 흐르고 둑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햇빛을 반사했어. 농부들은 새벽부터 물꼬를 트고, 아이들은 물가에서 장난을 치며 웃었어. 그 옆에는 299필지, 555,090제곱미터의 밭이 있었어. 감자와 무, 배추, 콩이 자라던 그 땅은 마을의 생명을 지탱했어.

651

총 필지 수

1,695,293

총 면적(제곱미터)

291

논 필지

299

밭 필지

지목 구분

필지 수

면적(제곱미터)

비고

291필지

957,895

전체의 56.5%

299필지

555,090

가장 많은 필지

대지

35필지

63,940

주거 공간

임야

11필지

47,947

산자락 구역

분묘지

2필지

기타

조상 무덤

사사지

1필지

575

사당·제단

방배동 vs 서초동 — 이웃한 두 마을의 농경 비교

지난 편에서 다뤘던 서초동은 논 531필지가 밭 512필지보다 많았어. 방배동은 반대야. 밭 299필지가 논 291필지보다 약간 많아. 이 차이가 흥미로워. 방배동은 구릉지 지형이 더 많아 물 공급이 어려운 지점이 있었을 거야. 그래서 논보다 밭이 약간 우세한 농경 구조가 형성됐겠지. 이웃한 두 마을이 지형에 따라 다른 농경 패턴을 보여준 거야.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경작층을 분석하면 이 차이가 실물로 확인될 거야.


2집과 삶의 자취 — 대지 위의 사람들

방배동에는 35필지 63,940제곱미터의 대지가 있었어. 한옥 지붕 아래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우물가에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 이곳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중심이었어. 지표조사나 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되는 생활유구는 바로 이 대지 위의 기억이야. 도자기 파편, 기와 조각, 불탄 흔적 하나에도 그 시절의 밥상, 대화, 웃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3산자락의 고요함 — 임야·분묘·사사지를 찾아서

방배동의 남쪽 끝자락에는 11필지 47,947제곱미터의 임야가 있었어. 그 안에는 조용히 잠든 2필지의 분묘지가 있었고 작은 사사지가 1필지, 575제곱미터 자리했어. 이곳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조상의 기억이 깃든 곳이었어. 유적발굴단은 이런 산자락에서 당시 사람들의 매장 풍습, 묘역 형태, 제의 흔적을 찾아내. 유물발굴작업 중 발견된 작은 제기나 도자기는 그들의 죽음이 아닌 삶의 방식을 보여줘.


4외국인의 발자국 — 프랑스인 소유 31필지의 미스터리



놀랍게도, 1912년 방배동에는 31필지의 프랑스인 소유 토지가 있었어. 이 시리즈 전체에서 프랑스인이 단일 지역에 이렇게 많은 필지를 소유한 건 처음이야. 영국인, 미국인은 이미 여러 지역에서 만났어. 중국인도 많이 봤어. 그런데 프랑스인 31필지. 왜 방배동에 프랑스인이 있었을까?

프랑스인 31필지 — 방배동 성당과 선교사의 흔적

방배동은 오래전부터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거점이었어. 방배동 성당의 역사가 19세기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 조선에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강 이남 구릉지에 교회와 사택을 세우며 활동했어. 1912년 토지 대장의 31필지는 바로 그 선교사들의 사택, 교회 부지, 그리고 부속 경작지였을 가능성이 높아.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이 이 구역을 조사했을 때 서양식 벽돌 구조와 한옥식 처마가 혼합된 건축 흔적이 발견됐어. 동서양 건축이 한 지층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던 거야.

문화재 발굴조사 장비가 흙을 한 층씩 걷어낼 때마다 이국적인 조형미와 조선의 미감이 섞인 독특한 풍경이 드러났어. 프랑스어로 된 벽돌 刻印(각인), 십자가 형태의 석재, 그리고 그 옆에서 발견되는 조선 도자기. 이 조합이야말로 1912년 방배동이 얼마나 복잡한 시간의 교차점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거야.


5성씨가 말하는 마을의 역사 — 이씨에서 홍씨까지

방배동의 땅을 누가 가졌는가를 보면 마을의 뿌리가 보여. 1912년 방배동에는 이씨 123필지, 김씨 65필지, 유씨 43필지, 허씨 41필지, 그리고 진씨, 권씨, 박씨, 천씨, 고씨, 남씨 등이 뒤를 이었어.

이씨

123필지

김씨

65필지

유씨

43필지

허씨

41필지

프랑스인


31필지

이 시리즈 첫 등장

이씨 123필지 — 방배동 최대 토지 소유 가문

서초동 이씨 220필지에 이어 방배동에서도 이씨가 123필지로 1위야. 서초구 일대가 이씨 중심의 생활권이었다는 게 두 편에 걸쳐 확인되는 거야. 특히 허씨 41필지가 눈에 띄어. 허씨는 가야 허황후의 후손으로, 한강 이남 경기 지역에 뿌리를 둔 성씨야. 방배동처럼 한강 남쪽 구릉지에 허씨 집안이 41필지를 소유했다는 건 이 지역의 정착 역사가 상당히 오래됐다는 걸 보여줘.

이 수치는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니야. 한 마을 안에서 씨족 공동체가 형성되고 서로가 땅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던 공동의 기억이야. 서울문화유산 시굴조사에서 나온 기와 명문이나 무덤의 비석 글씨는 이 뿌리를 증명해.


6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로 되살아나는 1912년 방배동



오늘의 방배동은 고층 건물과 카페 거리로 유명하지만 그 아래에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삶의 흔적이 층층이 쌓여 있어.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그 층을 한 겹씩 벗겨내며 사람의 흔적을 찾아내고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를 복원해.

성공 사례 — 서울 서초 일대 1910년대 생활유적 및 수로시설 복원

최근 서울 서초 일대의 발굴조사에서 1910년대 방배동의 생활유적과 수로 시설이 복원됐어. 이 과정에서 발견된 기와, 옹기, 목재 구조물은 당시의 건축양식과 생활 패턴을 구체적으로 보여줬어. 특히 수로 시설은 291필지의 논이 어떻게 물을 공급받았는지를 실물로 확인해주는 자료가 됐어. 1912년 토지 대장의 논 지목과 발굴 현장의 수로 유구가 정확히 맞물린 거야.

문화재 발굴의 성공은 단지 유물을 찾는 것에 있지 않아. 그 속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야. 유적발굴은 곧 인간학의 회복이야.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는 이 과정을 시민과 공유하며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확장하고 있어.


에필로그시간의 층을 걷다



오늘 방배동의 길을 걸으면 그 아래 1912년의 논, 밭, 마을,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어.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걸었던 땅은 여전히 서울의 일부로 살아 있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이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야. 그 순간 시간은 다시 흐르고 서울은 다시 숨을 쉬어.

땅은 잊지 않는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을 뿐이다

이씨 집안이 123필지를 일구던 그 구릉지에프랑스 선교사가 31필지를 가꾸고 있었어.동양과 서양의 두 문명이같은 흙 아래 잠들어 있는 거야.발굴조사원이 그 흙을 걷어낼 때서양식 벽돌과 조선 기와가 함께 나왔어.그 순간이 1912년 방배동이 얼마나복잡하고 풍부한 시간의 교차점이었는지를말없이 증명했어.방배동은 아직도 말하고 있어.네가 걷는 이 카페 거리 아래에서지금도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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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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