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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초구 우면동, 땅 아래 숨겨진 서울의 잊힌 시간들

  • 2025년 11월 18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4일

문화재 지표조사 · 문화재 발굴조사 · 서울 서초구 우면동 역사 · 발굴조사원 · 유적발굴단 · 농경유구 발굴


우리가 사는 땅에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숨어 있다. 발굴조사원들이 흙을 열고 유물 발굴 작업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 예술의전당과 아파트 단지, 현대화된 생활 인프라가 촘촘히 자리 잡은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633필지 1,582,017㎡. 논 249필지와 밭 273필지가 들판을 가득 채웠고, 이씨 254필지가 이 마을의 중심을 이루던 그 시절이었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 아래에 그 모든 이야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 글은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1912년 우면동 토지 기록을 바탕으로, 사라진 농경 마을의 풍경과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의 실제 의미를 이야기 형태로 풀어낸다. 그걸 알고 걷는 우면동과 모른 채 걷는 우면동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 것이다.


목차

1사라진 풍경에 손을 뻗는 순간

2우면동의 땅을 여는 첫 장면

3논과 밭이 그려낸 거대한 지도

4성씨별 토지 소유가 말해주는 마을의 얼굴

5공유지와 국유지가 품은 조용한 서사

6유적을 만나는 발걸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이야기

7실제 성공 사례로 돌아보는 발굴 현장의 생생함

8우면동의 오늘과 내일을 잇는 감정의 선

9글의 끝에서 전하고 싶은 마음

633

총 필지 수

1,582,017㎡

총 면적

273

밭 필지

249

논 필지

254

이씨 필지

14

분묘 필지


1. 사라진 풍경에 손을 뻗는 순간


처음엔 이런 사실이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발굴조사원들이 실제로 흙을 열고 유물 발굴 작업을 시작하면 흙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세상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마주하는 것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서초구 우면동을 들여다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면동의 풍경은 예술의전당, 아파트 단지, 도로가 가득하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633필지 1,582,017㎡. 논과 밭이 서초구 남서쪽 들판을 가득 채우고, 이씨 집안이 이 마을의 절반 가까이를 지키고 있었다.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다.


2. 우면동의 땅을 여는 첫 장면



1912년 서초구 우면동. 총 633필지 1,582,017㎡.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무게, 생계를 위한 선택, 그리고 마을의 성격을 담은 풍경이다. 논은 249필지 748,806㎡. 거대한 규모다. 당시 우면동이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 중심지였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밭은 273필지 592,091㎡로 논보다 필지 수가 많다. 이 시리즈에서 밭이 논보다 많은 동네들은 대체로 경사지와 구릉형 지형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면동도 마찬가지로, 관악산·우면산 자락의 지형 조건이 논농사보다 밭농사에 더 유리한 환경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지는 73필지 88,691㎡. 이 공간들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일을 나서고 어머니들은 하루를 준비했을 것이다. 분묘지 14필지 6,198㎡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많은 분묘 필지 수다. 창동(5필지), 쌍문동(1필지), 상봉동(5필지)과 비교해도 우면동의 분묘 14필지는 압도적이다. 이 마을이 오랜 세월 동안 대대로 이어져 온 집성촌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단서다.

273필지

592,091㎡

249필지

748,806㎡

임야

22필지

145,828㎡

대지

73필지

88,691㎡

분묘

14필지

6,198㎡

사사지

2필지

400㎡

우면동 분묘지 14필지는 이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많은 수치다. 이씨 254필지와 함께 읽으면 우면동이 이씨 집안이 수 세대에 걸쳐 뿌리내린 대표적인 집성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분묘 주변 구역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가장 조심스럽고 가장 풍부한 정보를 품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3. 논과 밭이 그려낸 거대한 지도



논과 밭이 이렇게 큰 비율을 차지했다는 것은 우면동이 단순한 교외 지역이 아니라 생산 중심의 거대한 생활권이었다는 뜻이다. 밭 273필지와 논 249필지를 합치면 522필지로 전체 633필지의 82.5%가 농경지였다. 창동(89.4%), 중계동(90.5%), 쌍문동(86.2%)에는 미치지 않지만, 서초구에 이 정도 규모의 농경지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밭 273필지는 여러 곡물과 채소, 가축을 위한 환경을 갖춘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 정도 비율이면 마을 전체가 서로 농사 기술을 공유하고 작물 상태를 논의하며 수확철마다 함께 모여 공동 작업을 벌였을 것이다. 지금의 우면동은 예술의전당과 아파트 단지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문화재 발굴과 조사가 더 중요해진다. 땅 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도 땅 아래의 기억을 꺼내주는 유일한 방법이 발굴이기 때문이다.


4. 성씨별 토지 소유가 말해주는 마을의 얼굴

이미지 프롬프트 4

A large Korean extended family working together on their farmland in the Seocho area circa 1912, multiple generations participating in planting season, elders directing younger family members, children helping at the edges, a strong sense of communal belonging, warm spring light, no text, all figures are Korean in traditional clothing

1912년 우면동에서 이씨가 254필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이 시리즈 전체에서도 압도적인 수치다. 전체 633필지의 40.1%가 이씨 한 성씨에 집중되어 있었다. 창동의 이씨 153필지(20.8%), 중계동의 이씨 128필지(22.2%), 쌍문동의 이씨 127필지(23.1%)와 비교해도 우면동 이씨의 지배적 비중은 단연 이 시리즈 최고치다.

김씨 110필지, 조씨 98필지가 그 뒤를 이었고, 최씨·서씨·정씨·윤씨·손씨·허씨 등이 나머지를 채웠다. 이씨·김씨·조씨 세 집안만 합치면 462필지로 전체의 73%에 달한다. 이 정도 집중도는 우면동이 이씨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집성촌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분묘 14필지라는 이 시리즈 최다 수치와 결합하면, 이씨 집안이 수 세대에 걸쳐 이 땅에 뿌리내린 역사가 얼마나 깊었는지가 느껴진다.

254

이씨 필지

110

김씨 필지

98

조씨 필지

14

분묘 필지

4

공유지

1

국유지

이씨 254필지 = 전체 633필지의 40.1%. 이 시리즈 전체에서 단일 성씨가 전체 필지의 40% 이상을 차지한 동네는 우면동이 유일하다. 분묘 14필지와의 결합은 우면동이 이 시리즈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성씨 집성촌이었음을 증명한다.


5. 공유지와 국유지가 품은 조용한 서사

당시 우면동에는 공유지 4필지, 국유지 단 1필지가 있었다. 이건 마을이 거의 전부 개인 중심의 농경 지역이었다는 의미다. 마을 공동으로 썼던 공유지 4필지는 우물, 제사터, 공동 농기구 보관소 같은 공공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작아 보이지만 이 4필지가 이씨·김씨·조씨 집안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발굴조사에서 공유지 구역은 언제나 마을 공동체의 핵심 시설 유구 출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점으로 분류된다. 우면동의 공유지 4필지 위치를 추적하면,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이던 공간의 흔적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국유지 단 1필지는 이 마을이 행정 기관의 손길이 거의 미치지 않았던 순수한 농경 공동체였음을 보여주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6. 유적을 만나는 발걸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이야기



지금 우리가 이 기록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를 통해 오늘의 도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다. 유적 발굴은 단순히 흙을 파는 일이 아니다. 문화재발굴조사 장비를 사용해 세밀하게 층위를 분석하고, 유물 발굴 작업을 통해 수백 년 전의 흔적을 복원하고, 유적발굴단이 협업하여 하나하나의 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우면동처럼 이씨 집안의 분묘 14필지가 흩어져 있던 지역에서는 장례 관련 유구와 제례 유물이 특히 풍부하게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집성촌의 생활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이씨 소유지 254필지 곳곳에서 층위를 이루며 쌓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밭 273필지의 농경 문화층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작물을 키웠고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를 알려주는 생생한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7. 실제 성공 사례로 돌아보는 발굴 현장의 생생함

성공 사례 — 농경 마을 창고터 발굴, 한 시대를 복원하다

서울의 다른 지역 발굴에서 당시 농경 마을의 창고로 쓰였던 구덩이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안에서는 토기 파편, 탄화된 곡물, 생활 흔적이 한꺼번에 검출됐다. 이런 발견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시대 풍경을 복원하는 열쇠가 됐다. 곡물의 종류와 토기의 재질을 분석하니 그 시대 기후와 생활 방식까지 드러났다. 우면동 밭 273필지와 논 249필지가 있던 구역에서도 이런 방식의 발굴이 이루어진다면, 서초구 일대 농경 문화 연구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참고)


8. 우면동의 오늘과 내일을 잇는 감정의 선

지금 우면동은 고층 건물과 도로, 생활 인프라가 촘촘하게 자리 잡은 지역이다. 하지만 그 땅 아래에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 273필지의 밭과 249필지의 논이 뒤덮었던 풍경, 그리고 이씨 집안이 수 세대에 걸쳐 지켜온 분묘 14필지의 기억이 남아 있다. 그걸 알고 걷는 우면동과 모른 채 걷는 우면동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든다.

우면동을 모른 채 걸을 때: 예술의전당 옆 아파트 단지. 우면동을 알고 걸을 때: 이씨 집안이 254필지를 지키던 들판, 분묘 14기가 산자락에 자리했던 집성촌, 봄마다 모내기로 들썩이던 논 249필지 위를 걷는 것.

문화재 발굴은 이 감정의 선을 이어주는 일이다. 과거를 펼쳐 현재를 이해하게 만들고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작업이다.


9. 글의 끝에서 전하고 싶은 마음



우리는 이렇게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우면동을 상상해봤다. 이씨 254필지가 지배하던 들판, 분묘 14필지에 잠들어 있는 수 세대의 기억, 공유지 4필지에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이던 풍경. 이런 과정을 통해 도시는 기억을 잃지 않게 되고, 우리는 땅 위에 서 있지만 땅 아래의 시간을 함께 느끼게 된다.

시간은 흘러도, 땅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꺼내주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같은 사람들이야.

1912년 우면동의 633필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씨가 지켜온 254필지의 논밭, 14기의 분묘, 공유지의 우물 소리가


지금 예술의전당 옆 그 땅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문화재 발굴은 과거를 펼쳐 현재를 이해하게 만들고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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