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초구 우면동, 땅 아래 숨겨진 서울의 잊힌 시간들
- 서울 HI
- 11월 18일
- 3분 분량
목차
사라진 풍경에 손을 뻗는 순간
우면동의 땅을 여는 첫 장면
논과 밭이 그려낸 거대한 지도
성씨별 토지 소유가 말해주는 마을의 얼굴
공유지와 국유지가 품은 조용한 서사
유적을 만나는 발걸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이야기
실제 성공 사례로 돌아보는 발굴 현장의 생생함
우면동의 오늘과 내일을 잇는 감정의 선
글의 끝에서 전하고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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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라진 풍경에 손을 뻗는 순간
아주 큰 글씨로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사는 땅에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숨어 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너도 모르게 잠시 멈칫할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매일 걸어 다니는 서울의 길 아래에는,
한 세기 전 누군가의 삶이 묻혀 있고
그들의 발자국이 여전히 땅 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야.
처음엔 이런 사실이 그저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어.
하지만 발굴조사원들이 실제로 흙을 열고 유물발굴작업을 시작하면,
흙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세상 위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마주하는’ 거야.

2.우면동의 땅을 여는 첫 장면
1912년 서초구 우면동.
총 633필지, 1,582,017㎡.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무게, 생계를 위한 선택,
그리고 마을의 성격을 담은 하나의 풍경이야.
논은 249필지 748,806㎡.
거대한 규모야.
당시 우면동이 쌀을 중심으로 한 농경 중심지였다는 걸 보여주지.
이 넓은 논에서
아침마다 물결처럼 흔들리던 벼의 잎사귀를 떠올리면
그 시대 공기의 냄새까지 떠오르는 것 같아.
대지는 73필지 88,691㎡.
이 공간들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일을 나서고
어머니들은 장작을 모아 하루를 준비했겠지.
분묘지는 14필지 6,198㎡.
이곳에는 이미 삶을 마무리한 이들의 마지막 시간이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조용하지만 강한 존재감이다.
사사지는 2필지 400㎡,
임야는 22필지 145,828㎡,
밭은 무려 273필지 592,091㎡.
이 수치들은 우면동이 얼마나 농촌 공동체의 색을 가진 마을이었는지 보여준다.

3.논과 밭이 그려낸 거대한 지도
논과 밭이 이렇게 큰 비율을 차지했다는 건
우면동이 단순한 교외 지역이 아니라
생산 중심의 거대한 생활권이었다는 뜻이야.
특히 273필지나 되는 밭은
여러 곡물과 채소, 가축을 위한 여건을 모두 갖춘 공간이었을 거야.
이 정도 비율이면 마을 전체가
서로 농사 기술을 공유하고
작물 상태를 논의하고
수확철마다 함께 모여 축제를 벌이기도 했겠지.
흥미로운 건, 그 시절의 농경 패턴은 오늘의 도시 풍경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야.
지금의 우면동은 아파트, 도로, 편의시설, 예술의전당 등
완전히 현대화된 생활권이라
옛날의 농경 중심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워.
그래서 발굴과 조사가 더 중요해지는 거야.
문화재발굴과정은 땅 위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도
땅 아래의 기억을 꺼내주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4.성씨별 토지 소유가 말해주는 마을의 얼굴
1912년 우면동에서
이씨가 254필지를, 김씨가 110필지를, 조씨가 98필지를,
그리고 최씨·서씨·정씨·윤씨·손씨·허씨 등이 뒤를 이었어.
이 말은 그냥 통계가 아니야.
이게 바로 마을의 구조였고,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도가 되었을 거야.
서로 다른 성씨들이 어떤 위치에 살고
어떤 땅을 경작했고
그들의 집터와 관계가 어떻게 얽혔는지가
오늘 우리가 보는 지명과 풍습에도 영향을 줬을지도 몰라.

5.공유지와 국유지가 품은 조용한 서사
당시 우면동에는
공유지가 4필지, 국유지는 단 1필지.
이건 마을이 거의 전부 개인 중심의 농경 지역이었다는 의미야.
마을 공동으로 썼던 공유지는
아마 우물, 제사터, 공동 농기구 보관소 같은
공공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커.
작아 보이지만
공유지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함께 돌보고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었으니까.

6.유적을 만나는 발걸음,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이야기
지금 우리가 이 기록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 하나야.
과거를 통해 오늘의 도시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지.
유적발굴은 단순히 흙을 파는 일이 아니야.
문화재발굴조사장비를 사용해 세밀하게 층위를 분석하고
유물발굴작업을 통해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흔적을 복원하고
유적발굴단이 협업하여
하나의 조각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이야.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는 문화재발굴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져.
그 이유는
도시 개발이 빠르게 진행되는 서울의 특성상
땅이 변하기 전에 기억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야.
우면동도 마찬가지야.
지금 우리가 보는 현대적인 모습 뒤에는
한 세기 전 평온한 농경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굴조사 덕분에 우리는 잊지 않을 수 있게 되지.

7.실제 성공 사례로 돌아보는 발굴 현장의 생생함
한 번은 서울의 다른 지역 발굴에서
당시 농경 마을의 창고로 쓰였던 구덩이가 발견된 적이 있었어.
안에서는 토기 파편, 탄화된 곡물, 생활 흔적이 한꺼번에 검출됐지.
이런 발견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시대 풍경을 복원하는 열쇠가 되었어.
곡물의 종류와 토기의 재질을 분석하니
그 시대 기후와 생활 방식까지 드러났거든.
이러한 발굴은
우면동을 포함한 서울 곳곳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몰랐던 삶의 조각들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거야.
8.우면동의 오늘과 내일을 잇는 감정의 선
지금 우면동은
고층 건물과 도로, 생활 인프라가 촘촘하게 자리 잡은 지역이야.
하지만 그 땅 아래에는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
넓은 논과 밭이 뒤덮었던 풍경,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가 이뤄낸 삶의 흔적이 남아 있어.
그걸 알고 걷는 우면동과
그걸 모른 채 걷는 우면동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 거야.
문화재발굴은
이 감정의 선을 이어주는 일이다.
과거를 펼쳐
현재를 이해하게 만들고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작업이야.
9.글의 끝에서 전하고 싶은 마음
너와 나는 이렇게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고
과거의 우면동을 상상해봤어.
이런 과정을 통해
도시는 기억을 잃지 않게 되고
우리는 땅 위에 서 있지만
땅 아래의 시간을 함께 느끼게 돼.
이 글을 다 읽은 너에게 말하고 싶어.
시간은 흘러도
땅은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꺼내주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같은 사람들이야.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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