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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 기초조사 이야기

5월 25일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7월 2일

1912년 토지조사 기록 시리즈 · 마포구 편

1912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는몇 필지였을까?대지 68%, 집터가 주인공인 국유지

문화유산 시굴조사 · 표본조사 · 지표조사 ·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조사

12필지

전체 국유지 필지

20,512㎡

전체 국유지 면적

68.2%

대지 비중 · 시리즈 최대

1,997㎡

대지 한 필지 평균 · 약 604평

지금까지 이 시리즈의 국유지는 논이거나, 산이거나, 밭이었습니다. 그런데 노고산동에서 처음으로, 집터가 주인공인 국유지를 만났습니다.

국유지 면적의 68.2%가 대지. 열두 필지 중 일곱 필지가 집터. 신촌 대학가의 강의실과 카페 아래에서, 114년 전 나라의 건물들이 서 있던 자리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지도에서 찾아보면 신촌의 심장부입니다. 서강대학교 캠퍼스가 동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신촌역과 서강대 정문 사이로 학생들의 물결이 하루 종일 흐르는 곳. 동네 이름의 주인은 캠퍼스 뒤편에 앉은 야트막한 노고산, 할미산이라고도 불리던 산입니다. 그 산자락 아래, 한강의 서강 나루로 이어지던 길목의 땅. 1912년의 국유지 장부는 이 동네에서 아주 낯선 구성을 보여줍니다. 논도 없고 임야도 없이, 대지 일곱에 밭 다섯. 오늘은 이 이상한 비율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목차

  1. 핵심 요약,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2. 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노고산동 국유지

  3. 대지 68.2%, 시리즈에서 처음 보는 비율의 의미

  4. 평균 604평, 국유 대지 7필지에는 무엇이 서 있었을까?

  5. 밭 5필지, 집터 곁의 텃밭이 말해주는 것

  6. 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7. 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8. 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9. 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1핵심 요약,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AI 브리핑 요약

1912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에는 국유지 12필지, 총 20,512㎡가 있었습니다.

지목별로는 대지가 7필지 13,980㎡, 밭이 5필지 6,532㎡였습니다.

즉, 노고산동 국유지는 면적의 68.2%가 대지로 이루어진 시설 중심형 국유지였으며,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서울의 국유지 가운데 대지 비중이 가장 높은 기록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번 기록은 검산이 상쾌할 만큼 깔끔합니다. 대지 7필지와 밭 5필지를 더하면 정확히 12필지, 13,980㎡와 6,532㎡를 더하면 정확히 20,512㎡. 필지도 면적도 완전히 일치합니다. 그런데 이 정갈한 숫자들이 그리는 그림은, 시리즈가 지금까지 만나온 어떤 동네와도 다릅니다.



2지목별 현황표와 그래프로 보는 노고산동 국유지

먼저 전체 구조를 표로 정리합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기록을 기준으로 한 노고산동 국유지의 지목별 현황입니다.

구분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중

필지당 평균

대지

7필지

13,980㎡

68.2%

약 1,997㎡

밭

5필지

6,532㎡

31.8%

약 1,306㎡

전체 국유지

12필지

20,512㎡

100%

약 1,709㎡

지목별 필지 수와 면적의 합이 전체 국유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기록입니다.

노고산동 국유지 지목별 면적 비중

대지13,980㎡

68.2%

밭6,532㎡

31.8%

막대는 단 두 개뿐입니다. 그런데 그 순서가 낯섭니다. 이 시리즈에서 국유지 그래프의 맨 윗자리는 늘 논이나 임야, 밭 같은 농지의 몫이었습니다. 염곡동에서는 논이 72.2%, 마장동에서는 임야가 74.2%, 서초동에서는 논이 60.0%였습니다. 대지는 언제나 그래프의 맨 아래, 한 자릿수 비중의 조연이었습니다. 마장동의 8.9%가 그나마 높은 편이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노고산동에서는 대지가 68.2%로 맨 위에 올라섰습니다. 조연이 주연이 된 것입니다.


3대지 68.2%, 시리즈에서 처음 보는 비율의 의미

농지의 국유지가 아니라, 건물의 국유지

이 비율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유지의 지목이 논이나 밭이라면, 나라는 그 땅에서 소작료와 수확물을 거두었다는 뜻입니다. 임야라면 목재와 자원을 관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대지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대지는 건물이 서 있는 땅입니다. 즉 노고산동의 국유지는 무언가를 길러내는 땅이 아니라, 무언가가 서 있던 땅이었습니다.

일곱 필지, 13,980㎡의 국유 대지. 이 동네에 나라와 관련된 건물이 그만큼 밀집해 있었다는 신호입니다. 왜 하필 노고산동이었을까요. 답의 실마리는 이 동네의 위치에 있습니다.

서강 나루의 배후지라는 위치

노고산동은 한강의 서강 일대로 내려가는 길목의 동네입니다. 조선시대의 서강은 단순한 나루터가 아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짐을 부리던 물류의 종착지 가운데 하나였고, 인근에는 관리들의 녹봉을 관리하던 광흥창 같은 국가 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곡식이 배에서 내려 창고로 들어가고, 창고에서 도성으로 실려 가는 동선 전체가 나라의 관리 아래 있던 지역입니다.

그런 물류의 대동맥 배후에 자리한 노고산동에 국유 대지가 일곱 필지나 몰려 있었다는 것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창고에 딸린 부속 시설, 물자와 사람을 관리하던 관원들의 거처, 조운과 관련된 업무 공간. 서강 일대의 국가 물류 시스템이 노고산 자락까지 뻗어 있었던 흔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1912년의 장부는 지목과 면적만 남기고 건물의 용도까지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68.2%라는 비율 자체가, 이 동네가 보통의 농촌 마을이 아니었음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4평균 604평, 국유 대지 7필지에는 무엇이 서 있었을까?

이제 대지 일곱 필지를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겠습니다. 13,980㎡를 일곱으로 나누면 한 필지 평균 1,997㎡, 약 604평입니다.

시리즈의 다른 국유 대지들과 나란히 세워 보면 이 숫자의 위치가 보입니다. 염곡동의 국유 대지는 평균 639㎡로 소작 농가의 집터 규모였습니다. 마장동은 평균 2,084㎡로 관영시설급, 서초동은 3,533㎡로 시리즈 최대의 대형 부지였습니다. 노고산동의 1,997㎡는 마장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영시설급 규모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장동과 서초동은 그런 대지가 국유지의 한 귀퉁이였던 반면, 노고산동은 그런 대지가 국유지의 몸통 그 자체라는 점입니다.

600평의 부지 일곱 곳. 초가 한 채씩 앉은 땅이 아닙니다. 본채와 부속채, 곳간과 마당이 함께 들어서는 시설 단위의 규모입니다. 이 일곱 필지가 노고산 자락과 서강으로 가는 길목에 줄지어 있었다고 상상해 보면, 1912년의 노고산동은 관영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선, 작지만 밀도 높은 행정과 물류의 동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912년이라는 시점이 이 건물들의 운명에도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전국의 소유권을 확정해 나갔고, 옛 왕조의 관유 시설과 부지는 총독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조선의 곡식과 문서가 드나들던 노고산동의 건물들이, 이제 다른 나라의 장부에 재산 목록으로 적히게 된 것입니다. 건물은 그대로 서 있어도, 그 건물이 섬기는 주인은 완전히 달라진 해였습니다.



5밭 5필지, 집터 곁의 텃밭이 말해주는 것

남은 다섯 필지는 밭입니다. 6,532㎡, 국유지의 31.8%. 한 필지 평균 1,306㎡, 약 395평입니다.

노고산동 국유지에서 밭이 맡았던 역할은, 대지와 짝을 지어 읽으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시설이 있으면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먹거리가 필요합니다. 관영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부식을 대던 채마밭, 시설 운영에 필요한 잡곡을 기르던 부속 경작지. 노고산 자락의 완만한 비탈에 자리한 이 밭들은, 일곱 채의 건물들과 한 세트로 굴러가던 생활의 기반이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네 국유지에 논이 한 필지도 없다는 점입니다. 노고산동은 산자락과 한강 사이의 좁은 경사지여서 큰 논이 들어설 지형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 동네 국유지의 존재 이유가 농업 경영이 아니라 시설 운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염곡동과 서초동의 국유지가 쌀을 거두는 땅이었다면, 노고산동의 국유지는 일하는 땅이었습니다. 같은 국유지라는 이름 아래, 서울의 동네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1912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는 총 12필지 20,512㎡였으며, 평균 604평의 대지 7필지가 면적의 68.2%를 차지하고 밭 5필지가 더해진, 이 시리즈에서 대지 비중이 가장 높은 시설 중심형 국유지였습니다.


6이 기록이 문화재 지표조사에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고산동은 지금 대학가의 한복판입니다. 캠퍼스 시설이 새로 들어서고, 신촌 일대의 정비와 신축이 이어지는 동네. 이런 곳에서 114년 전 장부의 숫자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실무 자료가 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법률 제20742호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착공 전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해야 합니다. 3만㎡ 이상의 사업 면적은 지표조사가 의무이고, 그보다 작은 사업이라도 유존 지역 여부나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따라 조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2026년 1월부터는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에 따른 조사 기준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때 노고산동의 기록은 문화재발굴기관 조사원들에게 유난히 또렷한 과녁을 제공합니다. 대지 비중 68.2%라는 숫자는, 이 동네 국유지 조사의 핵심이 건물지 유구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600평급 대지 일곱 필지가 있던 일대에서는 건물의 기단과 주춧돌, 담장의 기초, 넓은 온돌과 아궁이, 배수 시설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관영 시설이었다면 기와 조각과 저장 구덩이, 셈과 기록에 쓰이던 유물이 함께 나올 수 있습니다. 밭 다섯 필지가 있던 비탈에서는 경작층과 그 아래 더 오래된 층위가 겹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고산 자락이라는 지형 자체가, 어느 시대든 사람들이 터를 잡고 무덤을 앉히던 자리였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컨대 이 글의 숫자들은 신촌의 강의실과 카페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을지를 가리키는 확률 지도입니다. 개발을 준비하는 쪽에는 공사 지연과 비용의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안전장치가 되고, 우리 모두에게는 대학가의 소음 아래 묻힌 조운 시대의 노고산동을 건져 올릴 그물이 됩니다.



7지표조사부터 발굴조사까지, 절차 한눈에 보기

문화유산 조사는 법이 정한 단계를 밟아 점점 깊이 들어가는 절차입니다. 노고산동에서 조사가 진행된다면 다음 순서를 따르게 됩니다.

문헌조사와 지표조사

1912년 토지대장 같은 옛 기록을 분석하고, 조사원이 지표면을 직접 걸으며 유물 산포 여부와 지형을 확인합니다. 땅을 파지 않는 단계로, 개발 사업의 첫 관문입니다.

표본조사

지표조사 결과 유존 가능성이 있는 구역에서, 사업 면적의 2% 이내를 선별해 굴착하여 문화층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시굴조사

유구의 분포 범위와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사업 면적의 10% 이내에서 트렌치를 넣어 확인합니다. 노고산동이라면 옛 국유 대지 7필지 일대가 핵심 구역이 됩니다.

발굴조사

유구가 확인되면 전면 발굴로 전환합니다. 유구와 유물을 기록하고 수습하며, 조사 결과에 따라 보존 조치나 이전 복원이 결정됩니다.

보고서 작성과 활용

조사 성과는 보고서로 남아 학계와 시민에게 공유되고, 지역의 역사 콘텐츠로 다시 태어납니다. 지금 읽고 계신 이 글도 그 활용의 한 형태입니다.


8실제 발굴 성공 사례, 땅이 돌려준 역사

건물지 조사가 실제로 어떤 발견을 만들어냈는지, 서울 도심의 세 장면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사례 1 · 동대문

야구장 아래에서 나온 조선의 군사시설

동대문운동장 부지를 공원으로 재개발하던 중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서울성곽의 일부와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하도감 터, 물길을 다스리던 이간수문 유구가 확인되었습니다. 관영 시설의 건물지가 통째로 확인된 대표 사례로, 국유 대지가 밀집했던 노고산동의 조사가 참고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본보기입니다. 이 발견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옆 유구전시장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시민을 맞고 있습니다.

사례 2 · 풍납토성

아파트 공사장에서 깨어난 백제의 왕성

송파구 풍납동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실시된 조사는 한국 고고학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흙벽 둔덕으로만 여겨지던 풍납토성이 조사 결과 한성백제의 도읍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대한 왕성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개발 직전의 땅에서 한 나라의 수도가 통째로 돌아온, 조사 제도의 존재 이유를 증명한 사건이었습니다.

사례 3 · 인사동

공사장 항아리에서 나온 세종시대의 금속활자

종로 인사동의 재개발 부지에서는 항아리 하나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겨 있었고,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 활자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발굴조사가 없었다면 흩어져 사라졌을 인쇄 문명의 보물이, 절차 하나 덕분에 온전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입니다.

동대문도, 풍납동도, 인사동도,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공사 예정지였습니다. 노고산동의 600평짜리 대지 일곱 필지 아래에 어떤 건물의 뼈대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기록은 이미 어디를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9자주 묻는 질문과 한 줄 결론

자주 묻는 질문

1912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는 총 몇 필지였나요?

총 12필지였으며, 전체 면적은 20,512㎡였습니다.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 중 대지는 얼마나 있었나요?

대지는 7필지, 13,980㎡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68.2%에 해당하며, 이 시리즈에서 확인된 국유지 가운데 대지 비중이 가장 높은 기록입니다.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 중 밭은 얼마나 있었나요?

밭은 5필지, 6,532㎡였습니다.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31.8%였으며, 한 필지 평균은 약 1,306㎡였습니다.

노고산동 국유지에 대지 비중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고산동이 조운선이 닿던 서강 나루와 국가 창고 지대의 배후에 자리한 동네였기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평균 약 604평에 달하는 대지 7필지는 관영 시설과 그 부속 건물의 부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자료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1912년의 지목과 필지 기록은 땅속 매장유산의 위치와 성격을 예측하는 기초자료입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은 지표조사가 의무이며, 대지 비중이 높은 노고산동은 특히 건물지 유구의 확인 가능성이 높은 지역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1912년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 12필지 20,512㎡는 서강 물류 지대의 배후에서 대지가 68.2%를 차지한 시설 중심형 관유지였고, 그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는 살아 있는 지도입니다.

할미산 아래 일곱 채

노고산 그늘이 길게 내려앉으면


일곱 채 너른 마당에 불이 켜졌다



서강에서 올라온 곡식 자루와


붓끝에서 마르던 장부의 먹내



나라의 건물은 곡식을 기르지 않았지만


곡식이 지나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



주인이 바뀐 해에도 주춧돌은 자리를 지켰고


채마밭 다섯 뙈기는 철마다 푸르렀다



지금 그 위로 강의실의 불빛과


청춘들의 발소리가 지나가지만



주춧돌은 아직 그 자리에서


자신을 찾아올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노고산동 일대 개발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문화재 지표조사, 표본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까지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가 10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함께합니다.

자료 기준 1912년 토지조사사업 국유지 현황 자료


분석 대상 서울특별시 마포구 노고산동


분석 항목 필지 수, 지목(대지·밭), 면적


관련 법령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법률 제20742호), 국가유산청고시 제2026-2호


본 글은 1912년 토지대장 및 국유지 관련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토지 이용 현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이미지 설명: 본문 표는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 현황으로, 대지 7필지 13,980㎡, 밭 5필지 6,532㎡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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