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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 기초조사 이야기

  • 5일 전
  • 6분 분량

역사 탐험 ✦ 문화유산 발굴조사

홍대 앞 땅속에


노고산(老姑山)의 비밀이 잠들어 있다

1912년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국유지 기초조사 이야기


12필지 20,512㎡, 대지와 밭으로 나뉜 그 땅이 들려주는 100년 전 서울의 진짜 모습

📍 서울시 마포구 노고산동📅 1912년 지적 기록 기반🏛 국유지 문화유산 기초조사🔍 지표조사·발굴조사


목 차

1장 노고산동이라는 이름 — 할머니 산이 품은 역사

2장 1912년 노고산동 통계 — 12필지 20,512㎡의 이야기

3장 국유지 대지 7필지 13,980㎡ — 그 위에 무엇이 있었나

4장 국유지 밭 5필지 6,532㎡ — 농경지가 말하는 것

5장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땅을 읽는 다섯 단계

6장 마포구 인근 발굴 성공 사례 — 땅 아래 역사가 나왔다

7장 발굴조사 의뢰 방법 — 나의 땅도 조사가 필요할까

8장 마무리 — 노고산이 아직 기억하는 것들




1장노고산동이라는 이름 — 할머니 산이 품은 역사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내려 홍대 방향으로 조금만 걸으면 노고산(老姑山)이 보인다. 높이 105미터, 지도에서는 그냥 작은 구릉처럼 보이는 이 산의 이름이 '늙은 할머니의 산'이라는 뜻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 시대부터 이 산 아래 마을을 노고산동이라 불렀고, 그 이름이 100년이 넘게 이어져 지금도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조용해 보이는 동네, 1912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세계사의 격동 속에서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지 불과 2년이 지난 해, 일제는 한반도의 모든 토지를 낱낱이 측량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기록 속에 노고산동이 남겼다. 국유지 12필지, 총면적 20,512㎡. 이 숫자들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축적해온 1912년 서울 지적 자료에 따르면, 마포구 일대는 당시만 해도 논과 밭이 펼쳐진 준농촌 지대였다. 지금 홍대 클럽 거리가 있는 곳에 벼가 자라고, 지금의 카페 골목 자리에 배추밭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 한가운데, 국가가 소유한 노고산동 땅 12필지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100년 전 서울의 지도와 기록을 통해 잊혀진 역사를 되짚고,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풀어갑니다." —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2장1912년 노고산동 통계 — 12필지 20,512㎡의 이야기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1912년 노고산동 국유지 기록을 들여다보면 그 시절 이 동네의 생생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총 12필지, 총면적 20,512㎡. 이 20,512㎡를 현재 단위로 환산하면 약 6,205평, 축구 경기장 약 2.9개 면적이다. 작지 않은 땅이다.

12필지국유지 총 필지 수

20,512㎡국유지 총 면적


(약 6,205평)

7필지대지 필지 수

13,980㎡대지 면적


(국유지의 68.2%)

5필지밭 필지 수

6,532㎡밭 면적


(국유지의 31.8%)

이 12필지는 단순히 땅 주인이 '국가'였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조선 시대부터 관청이나 왕실이 관리하던 땅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일제강점기 초기에 지적 정리 과정에서 소유권이 국가로 귀속된 토지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이런 국유지에는 일반 민간 소유지보다 더 오래된 역사의 층위가 쌓여 있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의 시선에서 이 땅은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3장국유지 대지 7필지 13,980㎡ — 그 위에 무엇이 있었나

국유지의 68%, 대지가 차지한 이유

국유지 12필지 중 7필지, 즉 전체 국유지 면적의 약 68.2%가 대지였다. 대지란 건물이 서 있거나 건물을 세울 수 있는 땅이다. 국유지가 주거·건물용 대지로 이렇게 많이 쓰이고 있었다는 건, 이 땅들이 단순한 빈 공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기준으로 국유 대지는 주로 관청 건물, 군사 시설, 또는 왕실과 관련된 건축물이 들어서는 땅이었다. 노고산 아래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 대지들은 산 아래를 거점으로 삼았던 어떤 시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지도를 보면 노고산 일대에 봉수대 흔적이나 군사적 시설이 기록된 경우도 있어, 이 7필지의 대지에서 그와 관련된 건물지 유구가 발견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

국유지 대지

13,980㎡

7필지 · 국유지의 68.2%


건물지·관청지 추정 가능

🌾

국유지 밭

6,532㎡

5필지 · 국유지의 31.8%


농경 문화 유구 가능성

13,980㎡의 대지는 오늘날로 치면 약 4,229평이다. 한 필지당 평균 약 1,997㎡, 600평 수준이다. 이는 단순한 주거용 소규모 대지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다. 국유 대지로서 이 정도 규모라면 관청 건물 혹은 그에 준하는 시설이 들어섰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런 규모의 국유 대지는 언제나 최우선 검토 대상이 된다.

왜 국유 대지가 발굴조사 핵심 대상인가국유 대지는 민간 소유지에 비해 토지 이용의 역사가 단절 없이 이어져 온 경우가 많다. 개인이 소유한 땅은 분가, 매매, 재건축 등으로 여러 차례 물리적 변형이 가해지지만, 국유지는 상대적으로 그 형태가 오래 유지된다. 이 말은 즉, 지표 아래 유구(遺構)가 그만큼 보존 상태가 좋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국유지를 기초조사 1순위로 분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장국유지 밭 5필지 6,532㎡ — 농경지가 말하는 것

국유 농경지, 그 특별한 의미

5필지 6,532㎡의 국유 밭. 이 농지가 왜 국유지로 기록되어 있었는지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조선 시대에 국가 소유의 경작지는 두 가지 용도로 주로 사용됐다. 하나는 궁방전(宮房田), 즉 왕실이나 왕족의 경제적 기반으로 운영되던 농지다. 다른 하나는 둔전(屯田), 군사들이 직접 경작해 군량을 확보하던 군사 농지다.

노고산 인근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이 5필지의 국유 밭은 군사 관련 시설과 연결된 둔전이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조선 시대 서울 서쪽 경계 지역에는 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 시설과 그에 딸린 둔전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6,532㎡, 약 1,976평의 밭이 국가 소유였다는 사실은 이 땅의 역사적 맥락을 한층 풍부하게 만든다.

문화재 지표조사 관점에서 밭이었던 국유지는 또 다른 이유에서 중요하다. 오랜 기간 경작이 이루어진 땅은 지표 아래 층위가 비교적 얕게 다져지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의 유구가 생각보다 좋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건물이 세워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한 대지보다, 경작지에서 더 온전한 고고학적 층위가 발견되는 역설이 실제 발굴 현장에서 종종 나타난다.




5장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땅을 읽는 다섯 단계

조사는 무조건 파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굴조사'라고 하면 굴착기가 땅을 파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전문가들의 세계에서 매장유산 조사는 훨씬 섬세하고 체계적인 과정이다.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전문기관만이 이 조사를 수행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지표조사에서 시작해 발굴조사로 마무리되는 단계별 접근법을 따른다.

1

지표조사 — 파기 전, 먼저 읽는다

문헌 기록, 고지도, 항공사진, 현장 답사를 통해 해당 지역에 매장유산이 존재할 가능성을 진단한다. 1912년 지적원도 분석도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노고산동 기초조사의 핵심 단계다.

2

참관조사 — 공사 현장 곁에서 지켜본다

공사 진행 중 매장유산 전문가가 현장에 참관해 유물 출토 여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공사와 보존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중간 단계다.

3

표본조사 — 좁게 파서 전체를 예측한다

발굴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유존 가능 지역의 좁은 범위를 표본적으로 조사한다. 최소한의 훼손으로 최대한의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4

시굴조사 — 범위와 성격을 파악한다

유존 지역을 부분적으로 굴착해 유적의 범위와 대략적인 성격을 파악한다. 이 단계에서 발굴조사의 방향이 결정된다.

5

발굴조사 — 확인된 유적을 전면 정밀 조사한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전체 범위를 전면적·정밀하게 조사한다. 출토된 유물 하나하나가 역사 기록이 된다. 각 단계마다 국가유산청 및 관할 지자체의 협의·허가가 필수다.



1912년 기초조사가 발굴로 이어지는 과정

이번 노고산동 국유지 1,804㎡… 아니, 12필지 20,512㎡에 대한 조사는 바로 이 지표조사를 위한 기초 자료 수집 단계다. 1912년 지적원도 분석, 조선 시대 고지도 비교, 인근 발굴 사례 검토, 지형·지질 분석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국유지로 분류된 대지 7필지와 밭 5필지 각각의 위치와 형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이 기초조사의 핵심 목표다.

지표조사는 전문가만의 영역이지만, 이 기초 자료를 축적하고 공개하는 일은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가 1912년 서울 전 지역의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공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의 기록이 쌓일수록, 미래의 발굴은 더 정밀해진다.


6장마포구 인근 발굴 성공 사례 — 땅 아래 역사가 나왔다

SUCCESS CASE 01

마포구 일대 도심 재개발 사업 과정에서 진행된 구제 발굴 사례를 보면, 지표면에서 불과 0.8~1.5미터 아래에서 조선 시대 건물지와 기와 편, 생활 토기류가 출토된 경우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중기~후기로 추정되는 온돌 구들장 흔적이 도심 재개발 현장에서 발견된 사례는, 사전 지표조사를 충분히 수행한 현장일수록 유구 훼손 없이 역사 자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번 노고산동 기초조사의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SUCCESS CASE 02

서울 종로구 도심부 발굴 사례에서는 국유지로 기록된 토지의 지표 아래에서 조선 초기 석축 유구와 우물터가 발견된 바 있다. 사전 1912년 지적원도 분석에서 해당 지역이 국유 대지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 발굴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록과 발굴이 만나 역사가 복원된 대표적인 사례다. seoulheritage.org가 1912년 자료를 공개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성공 사례를 더 많이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이 두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다. 사전 조사가 철저할수록 발굴의 성공률이 높아진다는 것. 무작정 파면 유구가 파괴된다. 하지만 기초조사를 통해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하는지 알고 나서 진행하는 발굴은, 역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살려내는 행위가 된다.



7장발굴조사 의뢰 방법 — 나의 땅도 조사가 필요할까

어떤 경우에 문화재 지표조사가 의무인가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땅이나 건물이 문화재 조사 대상인지 궁금해진 분이 있을 것이다. 국가유산청 규정에 따르면 일정 면적 이상의 건설 공사를 진행하기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또한 매장문화재 유존 지역으로 지정된 구역 내 개발 행위에도 사전 지표조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다.

특히 서울 마포구처럼 조선 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어 있던 역사 지역은, 도심 전체가 잠재적인 문화재 유존 가능 지역으로 볼 수 있다. 공사 도중 예상치 못한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 공사 전면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사전에 제대로 확인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구분

조사 종류

주요 내용

1단계

기초조사·지표조사

문헌·현지 조사로 유적 존재 여부 진단

2단계

표본·시굴조사

좁은 범위 굴착, 유적 범위·성격 파악

3단계

발굴조사

확인된 유적 전면 정밀 조사·기록

필수

허가·협의

국가유산청 및 관할 지자체 협의 필수

발굴조사 의뢰 전 체크리스트✔ 국가유산청 매장문화재 유존 지역 해당 여부 사전 확인✔ 토지 면적과 개발 규모가 지표조사 의무 기준에 해당하는지 검토✔ 국가유산청 등록 전문 조사기관에 사전 상담 요청✔ 관할 지자체 문화재 담당 부서 문의✔ 1912년 이전 고지도·지적원도 등 참고 자료 확보✔ 인근 발굴 사례 및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 자료 검토




8장마무리 — 노고산이 아직 기억하는 것들

노고산. '늙은 할머니의 산'이라는 이름처럼, 이 산은 수백 년의 기억을 조용히 품고 있다. 조선 시대 군사들이 오르내리던 흙길, 국유 대지 위에 서 있던 어느 관청 건물의 기와, 국유 밭에서 자라던 가을 작물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진 게 아니다. 단지 땅 아래 잠들어 있을 뿐이다.

1912년 지적 기록이 남긴 숫자들, 12필지, 20,512㎡, 대지 13,980㎡, 밭 6,532㎡는 단순한 행정 수치가 아니다. 그 숫자들은 이름 없이 살다 간 사람들의 흔적이고, 국가가 지켜야 했던 무언가의 기억이며,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역사의 암호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가 이 암호를 풀어내는 열쇠다.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에게

지금 당신이 걷는 서울 어딘가의 골목길 아래,100년 전 누군가도 똑같이 걸었다.밥 냄새가 났고, 아이 웃음소리가 났고,계절마다 밭에서 작물이 자랐다.우리가 그 기억을 기록하고 지키는 한,그들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노고산 할머니 산은 오늘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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