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현저동 토지 조사와 성씨별 소유 분석
- 2025년 8월 2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역사
서대문 현저동, 105필지가 품은 1912년의 기억서대문형무소 품은 땅에서 문화재 지표조사를 말하다
서대문구 현저동 · 105필지 · 126,314㎡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서기 전, 이 땅에는 김씨와 이씨와 장씨 가문이 어깨를 맞대며 살던 마을이 있었습니다.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알려진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105필지, 126,314㎡의 땅 위에 86필지의 집터가 빼곡했고, 18필지의 밭에서 곡식이 자랐으며, 김씨·이씨·장씨·조씨 가문이 균형을 이루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식민지 토지조사사업의 기록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알고 있는 현저동이 완전히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현저동의 공간적 범위와 전체 풍경
86필지의 대지 — 도시적 성격을 갖춘 주거 공간
18필지의 밭 —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1필지의 임야 — 마을의 마지막 자연
도시와 농촌의 균형 — 현저동의 공간 구조
성씨별 토지 소유 — 네 가문이 이룬 균형의 공동체
식민지 토지조사의 맥락 — 1912년 현저동이 놓인 시대
서대문형무소와 현저동 — 근대사의 무게가 쌓인 땅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현저동의 과거
마무리 — 오늘날 연구에 주는 함의

SECTION 01
1912년 현저동의 공간적 범위와 전체 풍경
서대문구 현저동. 지금 이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가장 먼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떠올립니다.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처형되던 그 역사의 무게가 현저동이라는 이름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12년, 그 형무소가 들어서기 전 이 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1912년 현저동은 총 105필지, 126,314㎡의 땅이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마을들과 비교하면 중간 규모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규모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현저동의 공간 구성입니다. 86필지의 집터, 18필지의 밭, 1필지의 임야. 이 구성이 당시 현저동이 어떤 성격의 마을이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서울 도심과 인접한 위치적 특성 속에서, 현저동은 이미 도시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밭농사의 흔적도 남아 있었고, 임야도 존재했습니다. 전통과 근대, 도시와 농촌이 교차하던 과도기의 마을이 바로 1912년의 현저동이었습니다.
105총 필지 수
126,314㎡총 면적
86대지 필지 수
18밭 필지 수
16김씨 소유 필지
1임야 필지 수
SECTION 02
86필지의 대지 — 도시적 성격을 갖춘 주거 공간
현저동 105필지 중 86필지, 70,347㎡가 대지였습니다. 전체의 82%. 이 높은 비율은 현저동이 농경 중심 마을이 아니라 주거 중심 공간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에서 비교해 보면, 원효로3가(92%), 원효로4가(95%), 토정동(93%)처럼 도시적 성격이 강한 마을들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86채의 집.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일부는 근대적 건물도 섞여 있었을 이 집들에서 김씨·이씨·장씨·조씨 가문의 사람들이 이웃해 살았습니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현저동에는 농사꾼만이 아니라 행상과 수공업자,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모여 살았을 것입니다.
86필지의 대지는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가장 풍부한 생활 유물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구역입니다. 기와 조각, 백자 파편, 생활 도구, 건물 기초 구조물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서울 도심에 인접한 현저동의 특성상,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다층적인 생활 층위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SECTION 03
18필지의 밭 —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현저동에는 18필지, 50,932㎡의 밭이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40%에 달하는 이 밭들이 현저동의 농경지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대지 면적이 70,347㎡, 밭 면적이 50,932㎡. 대지가 밭보다 넓다는 사실이 현저동의 성격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일반적인 농촌 마을이라면 논밭의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저동에서는 주거 공간이 농경지보다 더 많습니다. 이는 현저동이 이미 1912년에 서울 도심과의 연계 속에서 도시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농촌도 아니고 완전한 도시도 아닌, 두 세계 사이에 자리 잡은 과도기의 마을이었습니다.
18필지의 밭에서는 보리, 콩, 조, 채소류가 재배되었을 것입니다. 그 작물들은 집에서 소비되기도 했고, 가까운 서대문 시장이나 마포나루를 통해 판매되어 현금 수입을 만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현저동 사람들은 도시 근교 농업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SECTION 04
1필지의 임야 — 마을의 마지막 자연
현저동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 1필지, 5,034㎡의 임야입니다. 86필지의 집터와 18필지의 밭이 가득한 이 마을에서, 단 하나의 임야 필지가 자연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5,034㎡, 약 1,500평의 이 임야는 울창한 산림 지대라기보다는 마을 주변 구릉에 남아 있는 작은 숲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숲이 현저동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생활 자원이었습니다. 겨울을 대비한 땔감을 여기서 구했고, 약초와 산나물을 채취했으며,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임야 1필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특별한 가치를 갖습니다. 인간의 직접적인 경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구역에는 더 온전한 형태의 고고학적 층위가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야와 대지가 맞닿는 경계 구역에서는 숯 가마 터나 목재 저장 관련 구조물의 흔적이 발굴되기도 합니다.
SECTION 05
도시와 농촌의 균형 — 현저동의 공간 구조
지금까지 살펴본 현저동의 공간 구성을 한눈에 비교해 보겠습니다.
도시적 공간86
필지 대지
70,347㎡
전체의 약 56%
농경·자연 공간19
필지 (밭 18 + 임야 1)
55,966㎡
전체의 약 44%
도시적 공간 56%, 농경·자연 공간 44%. 이 비율이 1912년 현저동의 정체성을 압축합니다. 완전히 도시로 넘어가기 직전의, 두 세계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던 공간. 서울 도심과 가깝지만 아직 농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현저동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전환점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이 균형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서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저동의 땅은 빠르게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18필지의 밭과 1필지의 임야는 서서히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을 것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바로 그 변화의 층위를 땅속에서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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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6
성씨별 토지 소유 — 네 가문이 이룬 균형의 공동체
1912년 현저동의 토지 기록에서 네 성씨가 두드러지게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김씨 16필지, 이씨 12필지, 장씨 11필지, 조씨 10필지. 흥미로운 것은 이 네 가문의 필지 수 차이가 불과 6필지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김씨16필지최대 보유
이씨12필지두 번째
장씨11필지세 번째
조씨10필지네 번째
이 균형은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대조됩니다. 홍은동의 이씨 140필지, 이촌동의 김씨 64필지처럼 특정 가문이 압도적으로 많은 필지를 소유한 마을들과 달리, 현저동은 네 가문이 비교적 고르게 땅을 나눠 가진 균형의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균형 구조는 마을 운영에서도 드러났을 것입니다. 어느 한 가문이 독점적으로 마을을 이끌기보다는, 네 가문이 서로 협력하고 때로 경쟁하며 공동체를 유지했을 것입니다. 마을 제사, 공동 작업, 혼사 등 중요한 결정에서 이 네 가문의 목소리가 균등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씨 기록은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유물의 소유자를 추적하는 핵심 단서가 됩니다. 현저동에서 비석 파편, 도자기, 생활 도구가 발굴될 때, 이 네 성씨의 균형적인 분포는 유물이 어느 가문과 연관될 가능성이 있는지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장씨라는 비교적 드문 성씨가 11필지를 보유했다는 사실은, 현저동 특유의 가문 구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입니다.
SECTION 07
식민지 토지조사의 맥락 — 1912년 현저동이 놓인 시대
1912년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생활 통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토지조사사업의 산물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근대적 지적도를 작성함으로써, 토지세 부과와 소유권 정리, 나아가 토지 수탈을 제도적으로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역사적 맥락 — 토지조사사업과 현저동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관습적 소유 관계가 근대적 법적 소유권 체계로 전환되었고, 소유자를 입증하지 못한 많은 토지가 국유지로 편입되었습니다. 1912년 현저동의 토지 기록은 바로 이 과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단순한 마을 정보를 넘어 식민지 근대화 과정 속에서 지역 사회가 어떻게 변모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현저동의 기록에는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달리 일본인 소유지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가 눈에 띄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1912년 시점에서 현저동이 아직 일본의 직접적인 토지 잠식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가 이미 1908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은, 이 땅에 식민지 권력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SECTION 08
서대문형무소와 현저동 — 근대사의 무게가 쌓인 땅
현저동을 이야기할 때 서대문형무소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1908년 일제가 설립한 이 형무소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고 고통받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무소가 자리 잡은 땅은 바로 현저동이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와 1912년 현저동의 관계1908년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가 설립되었을 때, 주변의 현저동 땅은 여전히 김씨·이씨·장씨·조씨 가문이 생활하던 마을이었습니다. 1912년의 토지 기록은 형무소 설립 4년 후의 현저동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86필지의 집터와 18필지의 밭이 여전히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마을 어딘가에는 형무소의 높은 담장이 이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역사적 맥락은 현저동의 문화재 발굴을 더욱 복잡하고 중요하게 만듭니다. 조선 시대 생활 유구, 일제강점기 초기 형무소 관련 시설의 잔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흔적. 이 여러 층위의 역사가 현저동의 지표 아래에 겹겹이 쌓여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이 모든 층위를 조심스럽게 해석하고 기록하는 작업입니다.

SECTION 09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현저동의 과거
1912년 현저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주거지와 농경지의 분포, 임야의 존재 여부, 성씨별 토지 소유 양상은 곧 문화유산 조사에서 마을 구조와 생활 양식을 복원하는 핵심 단서가 됩니다.
특히 현저동은 서대문형무소라는 근대사의 상징과 연결되어 있어, 문화재 조사의 의미가 더욱 각별합니다. 86필지의 대지 아래에는 조선 후기 생활 유구와 일제강점기 초기의 흔적이 함께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18필지의 밭에서는 당시의 농경 방식과 작물 패턴을 보여주는 토양 층위가 발굴될 수 있습니다.
현저동에서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86필지 대지 구역의 생활 유구, 18필지 밭의 농경 층위, 임야와 대지의 경계 구역을 체계적으로 살피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의 단계적 접근을 통해, 서대문 형무소 설립 전후 현저동의 변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성공 사례 — 인사동 금속활자, 지표조사가 역사를 구하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된 덕분에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이처럼 현저동에서도 체계적인 지표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르는 생활 유물과 역사적 흔적이 풍부하게 출토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공 사례 — 서울 재개발 부지에서 조선 후기 생활 유구 발굴
서울 내 여러 재개발 부지에서 지표조사가 선행되었을 때, 조선 후기의 집터 유구와 생활 도구, 도자기 파편이 출토된 사례들이 있습니다. 현저동의 86필지 대지 기록은 이와 유사한 조건에서 풍부한 생활 유물을 품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SECTION 10
마무리 — 오늘날 연구에 주는 함의
1912년 서대문구 현저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한 과거의 문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문화재를 발굴하고 지표조사를 진행할 때 참고해야 할 역사적 근거입니다. 86필지의 집터에서 살아가던 김씨·이씨·장씨·조씨 가문의 사람들, 18필지의 밭에서 작물을 기르며 생계를 이어가던 농부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경이 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맥락.
현저동의 기록은 특정 가문들이 어떤 방식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공동체를 형성했는지, 도시화와 농업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라는 무거운 역사의 공간과 같은 땅 위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공존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역사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일깨워 줍니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단순히 땅속의 유물만이 아니라 그 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 전체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문화재 조사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현저동의 105필지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105필지의 기억이서대문형무소의 담장 너머에서 기다린다"
김씨 16필지, 이씨 12필지, 장씨 11필지, 조씨 10필지. 네 가문이 균형을 이루며 살던 현저동의 마을. 그 86필지의 집터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와 18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곡식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의 담장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서도 사람들은 살았고, 밭을 일구었고, 이웃과 제를 올렸습니다. 그 평범한 삶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하는 일입니다.
기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땅속에 새겨진 기억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꺼내어 읽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현저동의 105필지는 오늘도당신의 발 아래에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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