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홍제동, 땅 위에 새겨진 삶의 기록
- 서울 HI
- 8월 31일
- 3분 분량
목차
1. 서두 – 100년 전 홍제동, 그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2. 논과 밭, 삶의 중심이 된 토지 구조
3. 집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흔적
4.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공간
5. 산과 잡종지, 활용되지 않은 공간의 의미
6. 땅을 가진 성씨들, 토지 소유 구조의 단면
7.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일제의 그림자
8. 일본인의 토지 소유, 변화의 시작
9. 1912년 홍제동의 풍경을 상상하다
10.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치
⸻

서두 – 100년 전 홍제동, 그 땅이 말해주는 이야기
1912년,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넘은 시간 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은 322필지, 472,183㎡의 땅 위에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땅은 단순히 농사를 짓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순간을 품고 있던 삶의 무대였습니다. 지금의 홍제동을 걷다 보면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도로, 상점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그 자리에 한 세기 전에는 논과 밭, 무덤과 작은 절터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1912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당시 홍제동 사람들의 삶과 사회 구조를 조금 더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
논과 밭, 삶의 중심이 된 토지 구조
홍제동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땅은 밭이었습니다. 무려 184필지, 293,697㎡에 달했지요. 당시 홍제동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은 분명 농사였음을 보여줍니다.
논도 적지 않았습니다. 39필지 109,944㎡의 면적이 논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도심 속 아파트 단지로 변한 이 땅에서, 한 세기 전에는 벼가 바람에 흔들리고 농부들이 구부정하게 모를 심고 추수를 하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밭과 논은 단순한 식량 생산지가 아니라, 공동체의 생존을 유지하는 근간이자 가족의 삶을 지탱하는 터전이었습니다.
⸻
집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살던 흔적
1912년 홍제동에는 91필지 27,831㎡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농사일을 돕고,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고, 저녁이면 마당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을 풍경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아파트 단지의 정겨운 풍경도 결국 이런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무덤과 사사지, 기억과 신앙의 공간
홍제동에는 1필지 710㎡의 무덤, 즉 분묘지가 있었습니다. 이는 선조들을 기리고 조상의 혼을 모시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사사지(寺寺地)가 2필지, 2,112㎡ 있었습니다. 이는 작은 절이나 종교적 공간이 자리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삶에는 불교 신앙이 여전히 스며 있었고, 절은 단순한 종교 공간을 넘어 공동체의 정신적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
산과 잡종지, 활용되지 않은 공간의 의미
홍제동에는 임야도 있었습니다. 3필지 34,314㎡의 산은 나무와 땔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자연적 울타리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잡종지라 불리는 땅도 2필지 3,573㎡ 있었습니다. 이는 논밭으로도 집터로도 쓰이지 못한 애매한 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축을 키우거나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한 공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땅을 가진 성씨들, 토지 소유 구조의 단면
1912년의 홍제동은 여러 성씨들이 땅을 나누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김씨가 113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했고, 장씨가 51필지, 이씨가 42필지, 박씨가 19필지, 정씨가 13필지, 송씨가 12필지를 소유했습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당시 마을을 이루던 주요 가문들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김씨와 장씨가 중심 가문으로 마을의 주축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크고, 다른 성씨들은 비교적 소규모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일제의 그림자
홍제동의 322필지 가운데 5필지는 국유지였습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소유의 땅이 1필지 있었다는 점입니다.
동척은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으로, 땅을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팔거나 직접 경영했습니다. 홍제동에도 동척 소유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일제의 그림자가 이미 깊숙이 드리우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
일본인의 토지 소유, 변화의 시작
1912년 홍제동에는 일본인이 23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라, 한 세기 전 이 땅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소유 구조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는 이후 점점 늘어나, 지역 사회의 균형을 흔들고 결국은 생활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1912년 홍제동의 풍경을 상상하다
지금의 홍제동을 걷다 보면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빼곡한 아파트 단지, 상점가가 보입니다. 그러나 1912년의 홍제동은 논과 밭이 마을의 중심이었고, 집들은 소박하게 흩어져 있었으며, 산과 작은 절, 무덤이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었습니다.
그 땅 위에서 김씨, 장씨, 이씨, 박씨 등이 농사를 짓고 살아갔고, 아이들은 밭두렁을 뛰어다니며 자랐습니다. 동시에 일본인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워지며, 앞으로 닥쳐올 격변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치
1912년 홍제동의 기록은 단순한 통계 자료가 아니라, 땅 위에 새겨진 사람들의 삶과 역사의 흔적입니다.
논과 밭, 집과 절, 그리고 국유지와 일본인 소유지까지. 각각의 땅은 단순한 면적이 아니라, 그 위에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무게와 사회의 구조를 보여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발과 아파트, 상업 공간에 가려 잊혀진 이 기록을 다시 꺼내어, 서울의 문화유산으로서 보존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출처 : 서울 문화유산 발굴 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