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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 2025년 8월 10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8일

문화재 지표조사 · 발굴조사 · 마포 역사

591필지 위에 새겨진 삶과 죽음,


그리고 수탈의 흔적


— 1912년 마포구 아현동 토지 기록과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아현동 골목을 걸어본 적 있으신가요?



언덕을 오르다 보면 어딘가 고즈넉한 기운이 납니다. 재개발로 새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 좁은 계단길이 남아 있는 언덕배기. 그런데 그 땅 아래에 무덤이 있었다면요? 그리고 그 옆 밭에서 누군가 오늘 먹을 채소를 뽑고 있었다면요?



1912년 마포구 아현동. 591필지, 477,149㎡. 이 숫자 안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수백 개 가문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591필지

1912년 아현동


총 필지 수

477,149㎡

전체 토지


총 면적

14필지

무덤(분묘지)


46,919㎡

목 차

1.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 591필지의 마을 이야기

2.논과 밭, 그리고 대지 — 토지 이용의 생생한 단면

3.무덤이 말해주는 조상과 기억

4.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그리고 그 외 사람들

5.국유지, 법인 땅,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6.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의 변화

7.역사 속 아현동, 오늘날의 의미

8.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필요성

9.성공 사례 — 발굴이 가져온 놀라운 발견들

10.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 서울 발굴·조사 의뢰 안내


01

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 591필지의 마을 이야기

현동. 지금은 아현역 근처 오르막길과 신촌 변두리 느낌으로 기억되는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품고 있었습니다. 총 591필지, 477,149㎡. 서울 마포구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 땅 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규모만 따지면 아현동은 이 시리즈에서 소개한 동네 중 가장 큰 필지 수를 가진 곳입니다. 염리동 180필지, 충정로3가 546필지보다도 많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땅을 나눠 쓰며 살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현동 언덕 위에서 바라보면 논과 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겠죠. 아침이면 닭 우는 소리에 잠이 깨고, 밭에서 일하다 허리를 펴면 멀리 한양 도성의 성곽이 보이던 그런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용한 마을에도 1912년이라는 시대의 무게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한일병합 2년 차. 토지조사사업이 막 시작된 해.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전국 각지에 손을 뻗던 바로 그 시기에, 아현동의 땅 기록이 작성되었습니다.



02

논과 밭, 그리고 대지 — 토지 이용의 생생한 단면

591필지의 땅이 어떻게 쓰이고 있었는지 살펴보면, 1912년 아현동의 생활상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지목

필지 수

면적 (㎡)

특징

2

4,571

마을 유일의 논, 희귀

168

320,682

전체의 28.4% 필지, 주 농업

대지

407

104,975

주거·상업 집중

분묘지

14

46,919

마을 역사의 증언자

논이 단 2필지, 4,571㎡에 불과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아현동 언덕 지형 특성상 벼농사를 짓기에는 물이 부족했을 겁니다. 대신 밭이 168필지, 320,682㎡로 압도적입니다. 이 넓은 밭에서 보리, 콩, 배추, 무 같은 잡곡과 채소가 자랐습니다. 가을 수확철이면 아현동 곳곳에서 곡식을 말리는 멍석이 펼쳐졌을 겁니다. 아이들이 그 멍석 사이를 뛰어다니다 꾸중을 들었겠죠.

대지가 407필지, 104,975㎡. 필지 기준으로 전체의 68.9%입니다. 이 말은 아현동 사람들이 주로 집에서 생활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상인, 장인, 고용 노동자들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농촌보다는, 도성 근방의 반도시적 마을의 성격이 강했던 거죠.


03

무덤이 말해주는 조상과 기억

아현동 토지 기록에서 가장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분묘지, 즉 무덤 자리가 14필지에 46,919㎡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숫자로만 보면 아현동 전체 면적의 약 9.8%가 무덤이었다는 뜻입니다. 거의 10분의 1이죠.

⛰️

1912년의 아현동 무덤들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문의 역사이자 마을 사람들의 집단 기억을 담은 공간이었습니다. 아현동 언덕배기에는 성씨별 묘역이 대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한식이나 추석이 되면 마을 곳곳에서 성묘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향 연기가 피어오르고, 제물을 차리며, 살아있는 자와 떠난 자가 그 자리에서 잠시 만났습니다.

이 무덤들이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왜 중요할까요? 묘역에서는 당시 사용된 도기, 청자 조각, 비석 파편, 그리고 의복 부속품까지 발굴될 수 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해당 가문의 경제적 수준, 문화적 취향, 시대적 변화를 알려주는 1차 사료입니다. 지금 아현동 재개발이 진행되는 자리 어딘가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그 흔적들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무덤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들이 기억을 이어가는 장소입니다. 그 기억의 층위를 복원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의 시작입니다."



04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그리고 그 외 사람들

1912년 아현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김씨였습니다. 111필지. 이어서 이씨 54필지, 최씨 35필지, 강씨 29필지, 조씨 25필지, 박씨 23필지, 정씨 22필지, 임씨와 유씨가 각각 16필지, 안씨 14필지, 노씨 12필지, 신씨 11필지 등 다양한 성씨들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김씨

111필지

이씨

54필지

최씨

35필지

강씨

29필지

조씨

25필지

박씨

23필지

정씨

22필지

임·유씨

각 16필지

안·노·신씨

11~14필지

이렇게 많은 성씨가 한 동네에서 공존했다는 건, 아현동이 특정 집성촌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김씨 111필지와 이씨 54필지가 상위를 차지하지만, 강씨, 조씨, 박씨, 정씨 등 중간 규모의 성씨도 고르게 분포해 있습니다. 이런 다양성은 아현동이 서울 도성 근방의 혼합형 마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토지 소유와 마을 권력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111필지의 김씨 어른들은 마을 회의에서 가장 큰 목소리를 냈겠죠. 하지만 안씨, 노씨, 신씨처럼 10필지 남짓을 가진 가문들도 아현동을 일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두레를 조직하고, 공동 우물을 관리하고, 마을 제사를 치렀습니다.


05

국유지, 법인 땅,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이제 이 블로그에서 가장 무거운 이야기를 해야 할 차례입니다. 1912년 아현동에는 개인 소유 외에 세 가지 종류의 특별한 토지가 있었습니다.

국유지

54필지. 관청 건물, 군용지, 관리용 시설 부지로 추정됩니다. 아현동에서 국유지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은 이 지역이 서울 도성 근방의 전략적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법인 소유

6필지. 종교기관, 학교, 혹은 상업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필지들이 어느 단체의 소유였는지 추가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 아현동의 6필지

6

아현동 내 동척 필지

1908

동척 설립 연도

50%+

소작농에 징수한 소작료

동양척식주식회사. 이름만 들어도 역사 교과서가 떠오르는 그 이름이 아현동에도 등장합니다. 1908년 일본 정부가 설립한 이 국책 회사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식민지 경영의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조선 산업 장려와 일본인 이민 지원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 농민을 소작농으로 전락시키고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습니다.

아현동의 6필지. 숫자로는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 6필지는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1914년 기준으로 동척은 전국에 약 7만 정보의 토지를 보유한 식민지 조선 최대의 지주였습니다. 인근 마포구 서교동에서만도 10필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니, 아현동의 6필지도 그 광대한 수탈망의 한 점이었던 셈입니다.

1926년에는 의열단원 나석주가 이 회사 본점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일으켰습니다. 그만큼 동척은 조선 민중에게 원한과 분노의 상징이었습니다. 아현동 어딘가에서도, 동척 소유 땅을 경작하다 소작료를 빼앗긴 농민이 주먹을 꽉 쥐었겠죠.



06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의 변화

동척 외에도 일본인 개인이 소유한 토지가 18필지 있었습니다. 1912년 아현동 전체 591필지 중 일본인 및 동척 소유를 합치면 24필지. 비율로는 약 4%입니다. 수치 자체는 충정로3가 일본인 소유 46%에 비하면 작아 보입니다. 하지만 맥락이 다릅니다.

아현동은 도성 안쪽보다 외진 위치였고, 1912년 당시에는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는 건, 식민지 자본이 서울 외곽까지 이미 침투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18필지의 주인들은 누구였을까요? 토지를 매입해 임대 수익을 챙긴 상인? 조선총독부 관련 업무를 보던 관리? 아니면 이민을 온 일본인 농가? 정확한 답은 당시 문서와 발굴 자료를 교차 분석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 역사적 맥락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수백만 조선 농민이 토지 소유권을 상실하거나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척은 전국 농지의 12.3%에 달하는 토지를 손에 넣었고, 소작농 58만여 호가 동척의 땅을 경작하며 50% 이상의 소작료를 내야 했습니다. 아현동의 토지 기록은 이 거대한 역사적 변화의 현장을 기록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07

역사 속 아현동, 오늘날의 의미

아현동은 100년 전에도, 지금도 변화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마을을 재편했고, 지금은 재개발과 도시재생 사업이 마을의 얼굴을 다시 바꾸고 있습니다. 그 구조적 유사성이 놀랍습니다.

1912년의 토지 분포와 소유 구조를 이해하면, 오늘날의 재개발 분쟁이 왜 발생하는지도 조금 더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오래된 토지 권리 관계, 특정 지역의 역사적 소유 패턴, 그리고 그것이 현재 재산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역사는 반복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아는 사람은 그 반복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특히 아현동처럼 대규모 무덤 터와 밭이 공존했던 지역에서는, 재개발 과정에서 문화재가 출토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습니다. 14필지에 걸친 46,919㎡의 분묘지 어딘가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조선시대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08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필요성

서울에서 토지를 개발하거나 건축 공사를 시작할 때, 해당 부지의 역사적 흔적을 확인하는 과정이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아현동처럼 1912년 기록에 무덤 터와 오래된 대지가 많이 확인되는 지역은 특히 지표조사의 중요성이 큽니다.

지표조사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표본조사(면적의 2% 이내)나 시굴조사(10% 이내)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중요한 유구가 발견되면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연결되어 비로소 아현동의 잃어버린 100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1912년 아현동 자료처럼 구체적인 토지 기록이 남아 있다면, 발굴 과정에서 예상되는 유물의 종류나 위치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필지가 무덤 터였는지, 어느 필지가 대지였는지를 미리 알고 조사에 임하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09

성공 사례 — 발굴이 가져온 놀라운 발견들

실제로 이런 기록과 발굴이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

서울 재개발지구 조선 후기 유물 발굴 사례

서울 한 재개발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단순한 옛 건물터로 보였던 곳에서 조선 후기 생활유물과 17세기 청자 파편이 대거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공사 계획이 일부 변경되었고, 유적은 보존되어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는 역사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

분묘지 발굴을 통한 가문 역사 복원

서울 외곽 재개발 과정에서 진행된 분묘지 발굴조사에서, 조선 중기 도자기와 함께 비석 파편 및 제기 조각이 출토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 유물들은 해당 지역에 거주했던 가문의 경제 수준과 생활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아현동의 14필지 분묘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발굴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

마포구 서교동 동척 토지 조사 사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마포구 서교동 일대를 분석한 결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로 기록된 필지와 인근 농경지 터의 지층 분석을 통해 일제강점기 초기 농업 구조 변화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아현동 동척 소유 6필지도 같은 방식으로 그 용도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10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 서울 발굴·조사 의뢰 안내

서울에서 토지를 개발하거나 건축을 계획 중이라면,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매장유산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정 면적 이상의 개발 사업에는 사전 지표조사가 법적 의무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법적 의무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조사는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입니다. 1912년 아현동에서 밭을 갈고, 무덤을 지키고, 동척의 소작료에 허리가 휘던 그 사람들의 흔적이 아직 땅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내는 가장 늦은 안부입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seoulheritage.org)에서는 지표조사 의뢰 절차, 예상 비용, 소요 기간 등 발굴조사 전반에 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아현동을 포함한 마포구 일대의 토지 개발 계획이 있다면, 먼저 문의해 보세요. 내 땅 아래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 확인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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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동처럼 무덤 터와 오랜 대지가 공존했던 지역일수록 문화재 발굴 가능성은 높습니다.지표조사 의뢰부터 정밀 발굴까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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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밭을 일구던 손이,그 무덤을 지키던 마음이아직 이 땅 아래 있습니다.

동척의 소작료에 허리를 굽히면서도, 가을 수확의 기쁨을 잊지 않았던 사람들.무덤 앞에 술 한 잔 올리며, 자식들이 더 나은 세상을 살길 빌었던 사람들.111필지의 김씨 어른도, 11필지의 신씨 농부도, 이름 없이 기록된 그 모든 이들도.그들의 땀과 눈물이 스민 흙을 지금 우리가 밟고 있습니다.그 흙을 함부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거창하지 않습니다.지금 이 글을 다 읽은 당신처럼, 그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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