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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최종 수정일: 8월 16일

목차

1. 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 591필지, 47만㎡의 마을 이야기

2. 논과 밭, 그리고 대지 – 토지 이용의 생생한 단면

3. 무덤이 말해주는 조상과 기억

4.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그리고 그 외 사람들

5. 국유지, 법인 땅,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6.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의 변화

7. 역사 속 아현동, 오늘날의 의미

8.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필요성 – 과거를 복원하는 첫걸음

9. 성공사례와 실제 이야기 – 발굴이 가져온 놀라운 발견

10.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 서울 지역 발굴·조사 의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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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아현동의 첫인상 – 591필지의 마을 이야기


“100여 년 전, 당신이 아현동 골목길을 걸어갔다면 어떤 풍경을 보았을까요?”


1912년,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 마포구 아현동은 전혀 다른 세상을 품고 있었습니다.

총 591필지, 면적 477,149㎡.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작아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논, 밭, 무덤, 대지, 그리고 빈터까지 모두를 품은 하나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2필지, 4,571㎡의 논이 물빛을 반짝이며 자리했고, 168필지 320,682㎡에 달하는 밭에서는 곡식과 채소가 계절에 맞춰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사람들은 논과 밭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해질녘이면 집으로 돌아와 대청마루에서 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마감했죠.



논과 밭, 그리고 대지 – 토지 이용의 생생한 단면


아현동의 중심에는 407필지, 104,975㎡의 대지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기와집, 초가집, 그리고 마당이 넓은 대가집도 있었죠.

논은 단 2필지뿐이었지만, 밭이 마을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밭농사가 중심이었던 이곳에서는 보리, 콩, 배추, 무 등이 자주 재배되었고, 농번기에는 아이들까지 나와 일을 도왔습니다.


밭 사이사이에는 잡풀이 무성한 무덤들이 있었습니다. 무덤의 총 면적은 46,919㎡, 14필지. 그중에는 오래된 봉분도 있었지만, 막 흙이 덮인 새로운 무덤도 있었습니다. 이 무덤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무덤이 말해주는 조상과 기억


1912년 아현동 무덤들은 단순한 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문의 역사이자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담은 공간이었죠.

아현동 언덕배기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성씨별 묘역이 있었고, 제사 때가 되면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향을 피우고 술을 올렸습니다.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를 진행하면, 이런 무덤 터에서 당시 사용된 도기, 청자 조각, 심지어 의복 부속품까지 발견될 수 있습니다.



성씨별 토지 소유 현황 – 김씨, 이씨, 그리고 그 외 사람들


아현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한 성씨는 김씨였습니다. 무려 111필지. 이어 이씨 54필지, 최씨 35필지, 강씨 29필지, 조씨 25필지, 박씨 23필지, 정씨 22필지, 임씨와 유씨가 각 16필지, 안씨 14필지, 노씨 12필지, 신씨 11필지 등 다양한 가문이 함께 살았습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를 보여줍니다. 토지를 많이 소유한 가문일수록 마을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미쳤고, 결혼이나 장례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국유지, 법인 땅,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


흥미로운 점은 아현동에 54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관청에서 관리하거나 공공 용도로 쓰이던 땅이었죠.

그런데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상징하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이 마을에도 발을 들였습니다. 6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동척은 당시 조선의 농지와 임야를 헐값에 매입해 일본인에게 넘기던 악명 높은 회사였습니다.


법인 소유의 땅도 6필지가 있었는데, 이는 종교기관, 학교, 또는 상업 목적의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시대의 변화


1912년 아현동에는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18필지 있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부동산 거래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의 토지제도가 변화하고 식민지 지배가 뿌리내리던 시기의 한 단면입니다.

오늘날 발굴조사에서 발견되는 일본식 건물터나 생활유물은 이 시기 일본인의 생활 흔적과 직결됩니다.



역사 속 아현동, 오늘날의 의미


아현동은 100년 전에도, 지금도 변화의 한가운데 있는 지역입니다.

당시의 땅 분포와 소유 구조를 살펴보면, 오늘날 재개발과 도시계획 과정에서도 비슷한 권리 구조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는 이런 변화를 기록하고, 미래 세대가 과거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필요성 – 과거를 복원하는 첫걸음


서울에서 개발이나 건축 공사를 시작할 때, 해당 부지가 과거에 어떤 역사와 흔적을 지녔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이 과정에서 유적 가능성이 확인되면, ‘시굴조사’와 ‘발굴조사’가 이어집니다.

1912년 아현동 자료처럼 땅의 용도와 소유 구조를 알고 있다면, 발굴 과정에서 예상되는 유물의 종류나 위치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공사례와 실제 이야기 – 발굴이 가져온 놀라운 발견


서울의 한 재개발 지역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했을 때, 단순한 옛 건물터로 보였던 곳에서 조선 후기 생활유물과 17세기 청자 파편이 대거 발견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 발견으로 인해 공사 계획이 일부 변경되었고, 유적은 보존되어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는 역사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아현동 또한 비슷한 잠재력을 품고 있습니다. 100년 전의 무덤 터나 밭자리에서 당시 농기구, 생활도구, 심지어 집터 흔적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 – 서울 지역 발굴·조사 의뢰 안내


만약 서울에서 토지를 개발하거나 건축을 계획 중이라면,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법적 의무를 넘어서,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고 보존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글 출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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