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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마포구 신수동의 땅과 사람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7월 3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1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기관마포구 역사서울 문화유산1912년 토지기록

서울 한복판에 논 17필지, 무덤 9필지가 있었다— 마포구 신수동 1912년의 충격적인 기록

450필지 458,712㎡의 땅이 품었던 삶, 죽음, 의식의 흔적 — 그리고 문화재 지표조사가 그것을 어떻게 꺼내는가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읽는 시간 약 13분

"신수동을 걷다가 이런 생각을 해봤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골목 바로 밑에


100년 전 누군가의 무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가능성을 알고도 이 땅을 그냥 파도 될까?"

마포구 신수동. 홍대와 서강대 사이, 젊은이들이 오가는 이 동네가 1912년에는 논과 밭, 그리고 무덤이 가득한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450필지, 458,712㎡. 지금 기준으로 축구장 약 64개 면적의 땅 위에서 수많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 글은 그 기록을 들여다보며, 신수동 땅이 품고 있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왜 지금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숫자 뒤에 숨겨진 삶을 함께 찾아가보자.


목차 — 이 글의 흐름

1. 1912년 신수동 —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

2. 논 17필지, 밭 157필지 — 들판이 도시였던 시절

3. 무덤 9필지 — 삶과 죽음이 한 동네에 있었다

4. 264필지의 집, 그 안에 담긴 온기

5. 김씨 85필지 — 성씨로 읽는 마을 권력 지도

6. 사사지 1필지와 국유지 12필지의 비밀

7. 문화재 지표조사, 이 땅을 다시 읽는 방법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순서의 이유

9. 성공 사례 — 신수동처럼 땅속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10.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


1. 1912년 신수동 —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

1912년의 신수동을 지금 모습과 겹쳐놓으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달랐다. 지금 홍대 앞 카페들이 들어선 자리에 밭이 있었고, 대형 아파트 단지 아래에 논이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는 무덤이 있었다.

450필지, 458,712㎡. 이 숫자의 무게를 실감하려면 신수동 전체를 걸어서 돌아다니면서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의 빽빽한 도시 건물들 아래에 100년 전 농부들이 씨앗을 뿌리고, 가족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공간이 있었다는 걸.

신수동에는 1958년에 세워진 하늘가족교회 구 예배당이 아직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이 동네는 시간의 켜가 두터운 곳이다. 그 켜 아래, 1912년의 기록이 말해주는 또 다른 층위가 지금도 땅속에 잠들어 있을 수 있다.

450필지

총 필지 수

458,712㎡

총 면적

264필지

대지(주거지)

157필지

17필지

9필지

분묘지(무덤)



2. 논 17필지, 밭 157필지 — 들판이 도시였던 시절

논 17필지, 61,388㎡. 밭 157필지, 210,999㎡. 이 두 숫자를 합치면 신수동 전체 면적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지금의 신수동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 동네의 절반은 농경지였다.

논보다 밭이 훨씬 많았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논의 면적은 61,388㎡인 데 반해 밭은 210,999㎡로 약 3.4배나 된다. 이건 신수동 땅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논은 물이 풍부한 저지대에 만들어지지만, 밭은 조금 높은 곳이나 배수가 잘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능하다. 마포 일대의 지형 특성상 밭농사가 논농사보다 더 적합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157필지의 밭. 그 하나하나에서 봄마다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잡초를 뽑고,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나눴을 사람들이 있었다. 그 땅에 남겨진 농기구의 흔적, 밭두렁의 흔적이 지금도 지표 아래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 농경지 유적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조사 대상 중 하나다.

밭 (전)

157필지


210,999㎡

대지

264필지


67,101㎡

논 (답)

17필지


61,388㎡

분묘지

9필지


115,068㎡

임야

2필지


3,900㎡

사사지

1필지


254㎡



3. 무덤 9필지 — 삶과 죽음이 한 동네에 있었다

분묘지, 즉 무덤. 9필지, 115,068㎡. 이 숫자가 놀라운 이유가 있다. 무덤의 면적이 논(61,388㎡)보다 크다. 심지어 대지(67,101㎡)와 맞먹는다. 1912년 신수동에는 집보다 더 넓은 땅이 무덤으로 쓰이고 있었다.

지금의 도시 감각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선 시대와 근대 초기까지 무덤은 마을 인근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상의 무덤 곁에 살고,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며,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은 공동체 문화가 있었다. 신수동의 분묘지는 그 문화의 구체적인 흔적이다.

무덤 터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매우 중요한 조사 대상이다. 분묘 유구에서는 당시의 장례 문화, 부장품, 묘비 관련 석재, 관 재료들이 발견될 수 있다. 9필지, 115,068㎡의 분묘지. 그 땅 아래 어딘가에 조선 후기 사람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같은 동네에 있었던 그 시절.


그 죽음의 흔적이 지금 도로 아래, 아파트 지하에 남아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사 없이 땅을 파도 되는 것일까?"


4. 264필지의 집, 그 안에 담긴 온기

264필지, 67,101㎡의 대지. 264개의 집이 있었다. 264개의 가족이 있었고, 264개의 이야기가 매일 새로 쓰였다. 아침에 밥을 짓는 연기, 저녁에 어른들이 마당에 모여 앉는 소리,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노는 발소리.

흥미로운 건 대지 264필지의 면적(67,101㎡)이 밭 157필지의 면적(210,999㎡)보다 훨씬 작다는 점이다. 필지 수는 대지가 더 많지만 면적은 밭이 3배 이상이다. 이건 당시 집들이 상대적으로 작고 촘촘하게 모여 있었다는 뜻이다. 골목이 좁고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통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진다.

촘촘하게 모인 주거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의미가 크다. 집들이 밀집된 구역에는 온돌 구조물, 우물, 담장 기초, 생활 도기류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을 수 있다. 264채의 집이 남긴 흔적들이 지금도 신수동 땅속에 층층이 쌓여 있을 것이다.



5. 김씨 85필지 — 성씨로 읽는 마을 권력 지도

1912년 신수동의 토지 소유자 분포는 당시 이 마을의 사회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씨가 85필지로 압도적 1위였고, 이씨가 70필지로 뒤를 이었다. 그 뒤로 조씨 37, 박씨 25, 정씨 24, 최씨 21, 장씨 17, 송씨 16, 유씨 13, 황씨 12, 남씨 10, 한씨 10 순으로 이어진다.

이 분포는 단순한 부동산 통계가 아니다. 김씨와 이씨가 전체 토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건, 이 두 성씨 가문이 신수동의 중심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구역에는 종중 묘지나 문중 사당, 고택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소유자 분포를 분석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어느 성씨가 어느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는지가, 발굴 시 어디서 어떤 유물이 나올지를 예측하는 가장 정밀한 나침반이 된다.

김씨

85필지

이씨

70필지

조씨

37필지

박씨

25필지

정씨

24필지

최씨

21필지

기타

장·송·유·황·남·한씨 외


6. 사사지 1필지와 국유지 12필지의 비밀

사사지는 딱 1필지, 254㎡. 작은 땅이지만 이 존재가 말해주는 것은 크다. 절터나 사당으로 쓰였을 이 공간은 마을 공동체의 신앙과 의식이 담긴 신성한 장소였다. 사사지 구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항상 높은 우선순위를 갖는다. 불교 관련 석조 유물, 기와 조각, 제의 관련 도기류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국유지 12필지. 당시 국가 또는 관리 기관이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던 땅이다. 도로, 관청 부지, 혹은 군사적 목적의 시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2년에 국유지가 12필지나 있었다는 건, 이 구역이 행정적으로도 중요하게 다뤄진 지역이었음을 시사한다. 국유지 구역에서는 관청 건물의 기단석, 도로 포장 흔적, 관용 도기류 등이 발굴 대상이 될 수 있다.



7. 문화재 지표조사, 이 땅을 다시 읽는 방법

문화재 지표조사는 땅을 파기 전에 하는 조사다. 논과 밭, 집터, 무덤이 있었던 이 신수동 같은 지역에서 지표조사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먼저 1912년 토지 대장처럼 역사 기록을 분석한다. 어느 구역에 무덤이 있었는지, 어디에 절터가 있었는지, 어느 성씨가 어느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는지를 파악한다. 이 분석이 조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 다음 현장에 나가 지표면을 관찰한다. 오래된 담장 흔적, 돌무더기, 기와 조각이나 도기 편이 지표면에 드러나 있다면 그 아래에 더 많은 것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지표조사는 땅을 훼손하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한 번 파괴된 유적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파기 전에 충분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표조사 결과는 반드시 보고서로 작성되어 국가유산청장에게 제출되고, 문화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보존 여부가 결정된다.


8.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순서의 이유

문화재 조사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순서를 지키는 것과 지키지 않는 것의 차이는, 역사를 발견하는 것과 파괴하는 것의 차이다. 신수동처럼 무덤, 논, 사사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지역일수록 이 순서가 더욱 중요하다.

STEP 1

지표조사

문헌·현장 분석으로 분포 확인

STEP 2

표본조사

면적 2% 이내 초기 탐색

STEP 3

시굴조사

10~20% 범위 예비 발굴

STEP 4

정밀 발굴

면 단위 전면 기록·발굴

시굴조사는 정밀 발굴 전에 작은 구덩이를 내어 유적의 성격과 규모를 확인하는 예비 단계다. 신수동처럼 분묘지가 넓게 분포한 지역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묘 구조물의 위치와 범위를 파악하면, 이후 정밀 발굴에서 유물을 온전한 형태로 꺼낼 수 있다.

서울은 지금도 재개발이 끊이지 않는 도시다. 신수동 역시 그 흐름 안에 있다. 개발이 이루어질 때마다 이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주목해야 한다. 한 번 사라진 유적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9. 성공 사례 — 신수동처럼 땅속에서 역사가 돌아온 순간들

성공 사례 01

신수동 조사 — 기와 조각과 사당터의 귀환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이 신수동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기와 조각과 생활 유물이 출토된 사례가 있다. 한 농경지 터에서는 토기 조각과 함께 밭 경작에 사용된 농기구 잔해가 발견되었고, 그 주변에서는 사당터로 추정되는 유구도 확인되었다. 이 발견은 신수동 땅이 단순한 농지와 묘지를 넘어, 삶과 죽음과 의식이 한데 담긴 복합 문화 공간이었음을 증명했다. 지표조사가 없었다면 영원히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성공 사례 02

종로구 인사동 — 금속활자가 땅에서 돌아왔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체계적인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진행된 정밀 발굴에서 7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16세기 층에서는 한글·한자 혼용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주전이 한꺼번에 출토되어 학계를 뒤흔들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조선 전기 인쇄 기술을 실물로 증명한 이 발견이 가능했던 것은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체계적으로 선행되었기 때문이다. 순서를 지킨 결과였다.

성공 사례 03

마포 인근 분묘지 조사 — 부장품으로 읽은 조선의 장례 문화

마포 인근 지역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 후기 분묘지 유구가 확인된 사례가 있다. 1912년 토지 대장의 분묘지 정보를 기반으로 시굴조사 방향을 설정했고, 실제로 당시 매장 문화를 보여주는 도자기 부장품과 목관 흔적이 발견되었다. 분묘 주변의 제의 용기들도 출토되어 당시 조상 숭배 문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토지 기록이 발굴의 나침반이 된 정확한 사례다.



10.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

신수동의 1912년 기록을 들여다보고 나면 이 동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홍대 앞 카페들이 늘어선 그 골목이, 100년 전에는 밭이었다는 것. 지하철역 근처 아파트 아래에 어쩌면 조선시대 누군가의 무덤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전문가가 이 땅을 먼저 읽어야 한다. 서울 전 지역의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는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팀에 의뢰할 수 있다. 조사 설계부터 보고서 작성, 인허가 절차까지 전 과정을 지원한다.

450필지 위에서 살아갔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 농부의 땀, 집 주인의 꿈, 조상에 대한 경의.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역사는 살아남는다. 그 역할을 지표조사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관심이 함께 해야 한다.



신수동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생각해보세요.


내 발밑에 논이 있었고, 무덤이 있었고,


누군가가 씨를 뿌리고 조상에게 절을 했던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그 기억을 잊지 않는 것이


과거를 위한 일이 아니라


미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당신이 그 기억을 지키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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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 지역 문화재 조사 전문팀 — 지표조사부터 발굴, 보고서 작성, 인허가까지 전 과정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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