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광진구 중곡동,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
- 2025년 4월 2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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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이 걷는 광진구 그 골목, 113년 전엔 밭고랑이 펼쳐지고 산새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 1912년 중곡동의 땅 이야기
이 글을 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상상해보세요.
지금 당신이 밟고 있는 중곡동 아스팔트 아래에, 113년 전 이씨 아저씨가 새벽부터 논두렁을 걸어 다녔습니다.
박씨 청년이 괭이질하던 그 밭이, 지금의 저 카페 건물 자리라면요.
김씨 할아버지가 땔감을 지고 내려오던 임야가, 지금의 이 아파트 단지 자리라면요.
그 이야기는 사라진 게 아닙니다.
땅속에, 기록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목차
1.1912년 중곡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2.논 — 마을의 생명줄, 125필지의 풍경
3.밭 — 땀과 희망으로 일군 326필지
4.잡종지 — 중곡동의 미래를 품은 땅
5.집과 산 — 삶의 온기와 자연의 품
6.이씨, 박씨, 김씨 — 이 땅을 일군 사람들
7.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땅을 지킨다
8.성공 사례 — 삽 대신 기록을 먼저 들었을 때
9.중곡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 1912년 중곡동으로 떠나는 시간 여행
광진구 중곡동. 지금은 지하철역 주변으로 카페와 맛집이 즐비하고, 아파트 단지가 하늘을 향해 뻗은 평범한 서울 동네입니다. 하지만 딱 113년 전, 이곳의 풍경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912년, 중곡동은 518필지, 2,211,173㎡의 드넓은 땅이었습니다. 축구장 약 300개를 합쳐놓은 크기입니다. 그 광활한 땅이 논, 밭, 집터, 산, 그리고 잡종지로 나뉘어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씨, 박씨, 김씨 같은 다양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 위에서 씨앗을 심고, 수확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며 하루하루를 이어갔습니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 seoulheritage.org는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역사 지적 데이터를 하나씩 정리하며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중곡동 기록도 그 일환입니다. 지금부터 그 기록 속으로 들어가 113년 전의 중곡동을 걸어보겠습니다.
518
총 필지 수
2,211,173
총 면적 (㎡)
약 300개
축구장 환산 크기
113년
땅속에 잠든 시간
2. 논 — 마을의 생명줄, 125필지의 풍경
1912년 중곡동에서 논은 125필지, 300,708㎡를 차지했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13.6%에 해당하는 이 논들이 마을의 생명줄이었습니다. 지금의 광진구 어딘가에 이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는 사실이 선뜻 실감되지 않지만, 그것이 1912년 중곡동의 현실이었습니다.
봄이면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는 손길들이 분주했을 것입니다. 이씨 아저씨가 허리를 굽히고 논두렁을 따라 걸으며 물길을 살피고, 박씨 할머니가 모심기 품앗이를 위해 이웃 집에 들렀을 것입니다. 여름 장마가 지나면 초록빛 벼가 바람에 출렁이다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변하며 마을 전체를 들판의 온기로 감쌌겠죠.
125필지의 논이 다 같은 땅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물이 잘 빠지는 비옥한 논에서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겠지만, 물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 논에서는 애를 태우며 농사를 지었겠죠. 그 고생의 흔적이 지금도 중곡동의 땅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3. 밭 — 땀과 희망으로 일군 326필지
중곡동에서 가장 많은 필지를 차지한 것은 밭이었습니다. 326필지, 592,577㎡. 전체 면적의 약 26.8%입니다. 논보다 필지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은, 중곡동이 단순히 벼농사만 짓는 마을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는 복합 농업 마을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밭에서는 고추, 배추, 무, 콩, 보리 같은 작물이 계절마다 바뀌며 자랐습니다. 이씨 아주머니가 쪼그려 앉아 김장용 배추를 다듬고, 최씨 아저씨가 괭이를 들고 밭고랑을 만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을이면 배추 절이는 냄새가 마을에 퍼지고, 이웃끼리 품앗이로 김장을 돕는 풍경이 반복되었겠죠.
326필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그 숫자만큼 많은 가족이 이 밭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그 밭에서 난 수확이 겨울을 버티는 힘이 되었습니다. 밭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새벽이 있었고, 해 질 녘까지 굽힌 허리가 있었습니다. 그 묵묵한 노력이 오늘의 중곡동을 있게 한 뿌리입니다.

4. 잡종지 — 중곡동의 미래를 품은 땅
중곡동 기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수치가 하나 있습니다. 잡종지 7필지, 1,071,323㎡. 전체 면적의 무려 48.4%입니다. 중곡동 땅의 절반 가까이가 잡종지였다는 것인데, 이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잡종지는 논도 밭도 집터도 아닌, 용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땅을 가리킵니다. 지목이 불분명하거나, 여러 용도가 혼재되어 있거나, 아직 개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의 땅입니다. 1912년의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분류 기준이 모호해 잡종지로 기록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이 잡종지는 중곡동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아직 무엇이 될지 결정되지 않은 이 광활한 땅에서, 누군가는 새 농지를 일구려 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집을 지을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중곡동의 주거지와 상업지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잡종지 위에 세워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의 관점에서도 이 잡종지는 흥미로운 단서입니다. 용도가 불명확했던 만큼, 그 아래에 다양한 시대의 흔적이 복합적으로 쌓여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통해 그 층위를 하나씩 벗겨낼 때, 중곡동의 더 깊은 시간이 드러날 것입니다.
1912년 중곡동 토지 구성 상세 요약
잡종지 7필지 (1,071,323㎡, 48.4%) · 밭 326필지 (592,577㎡, 26.8%)
논 125필지 (300,708㎡, 13.6%) · 산 13필지 (228,057㎡, 10.3%)
집터 47필지 (18,505㎡, 0.8%)
총 518필지 · 합계 2,211,173㎡ (축구장 약 300개 규모)
5. 집과 산 — 삶의 온기와 자연의 품
집터 — 47필지, 18,505㎡
논과 밭이 생존을 책임졌다면, 집터는 사람들의 하루를 담는 그릇이었습니다. 47필지, 18,505㎡. 전체 면적의 0.8%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에 중곡동 사람들의 모든 일상이 담겨있었습니다.
김씨네 집 마당에서는 저녁이면 된장찌개 냄새가 골목을 타고 퍼졌을 것입니다. 정씨네 담장 너머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겠죠. 이씨 할아버지는 마루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며 하루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식구들 밥을 지었습니다. 그 47채의 집에서 매일 반복된 평범한 일상이 중곡동을 따뜻하게 살아있게 했습니다.
산 — 13필지, 228,057㎡
중곡동에는 13필지, 228,057㎡의 임야가 있었습니다. 전체 면적의 10.3%를 차지한 이 산은 마을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원의 보고였습니다. 겨울이면 땔감을 구하러 산을 올랐고, 봄이면 약초와 산나물을 캐러 다녔습니다. 박씨 청년이 지게에 땔감을 가득 지고 내려오고, 신씨 할아버지가 약초 바구니를 들고 산길을 걸어 내려오는 모습이 중곡동의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산은 또한 마을의 수호자였습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고, 장마철에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숨바꼭질하고 뛰어노는 놀이터였고, 어른들에게는 잠시 앉아 숨을 돌리는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6. 이씨, 박씨, 김씨 — 이 땅을 일군 사람들
1912년 중곡동의 토지 기록에는 이 땅을 소유하고 일군 사람들의 성씨가 남아있습니다. 이씨가 10필지로 가장 많은 땅을 소유했고, 박씨가 7필지, 김씨가 5필지, 정씨가 4필지를 차지했습니다. 그 외에도 임씨, 천씨, 최씨, 신씨, 안씨, 유씨, 하씨, 조씨, 차씨, 황씨까지 실로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중곡동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10필지를 소유한 이씨 집안. 논과 밭을 골고루 갖고 있던 이씨는 마을에서 꽤 영향력 있는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수확이 좋은 해에는 이웃과 나누고, 어려운 해에는 함께 걱정하며 마을의 중심 역할을 했겠죠. 7필지의 박씨는 임야 근처에 집터를 잡고 산과 가까운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김씨와 정씨는 밭에서 땀 흘리며 아이들을 키웠고, 임씨와 천씨, 최씨는 각자의 땅에서 각자의 꿈을 이어갔습니다.
이 이름들은 기록 속의 글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중곡동의 이른 새벽을 깨우며 논으로 나선 사람들이고, 해가 질 때까지 밭을 매며 가족을 먹여 살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밟고 다닌 논두렁이 지금은 아스팔트 도로가 되었고, 그들이 살던 집터 위에 아파트가 올라섰지만, 그들의 흔적은 땅속 어딘가에 아직 남아있습니다.

7.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 — 기록이 땅을 지킨다
1912년의 중곡동 기록이 지금 왜 중요한지, 이쯤에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13년 전의 토지 문서 하나가 오늘날 서울의 도시 개발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서울에서 건물을 새로 짓거나 지하를 굴착하는 공사가 시작되기 전, 법적으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입니다. 해당 부지의 지표면을 살펴 유물이나 유구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이 조사가 모든 발굴의 첫 관문입니다.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시굴조사, 표본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집니다.
이때 1912년의 토지 기록은 결정적인 길잡이가 됩니다. 중곡동의 경우, 잡종지 1,071,323㎡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집터 47필지가 어디에 분포했는지를 알 수 있다면, 지표조사의 방향과 깊이가 달라집니다. 집터 아래에는 조선시대 생활유물이나 건물 기초가 남아있을 수 있고, 논과 밭 아래에는 경작 유구와 농기구 흔적이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중곡동처럼 잡종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곳은 문화재 발굴 기관에서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용도가 혼재된 땅일수록 다양한 시대의 흔적이 복잡하게 쌓여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seoulheritage.org가 이 기록을 정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록이 있어야 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문화재 조사 4단계 — 기록에서 발굴까지
지표조사 — 지표면 관찰로 유물·유구 흔적 파악. 모든 조사의 시작점.
시굴조사 — 소규모 굴착으로 지층 구조와 유물 유무 확인.
표본조사 — 구역 내 유물 분포를 체계적으로 파악.
본발굴조사 — 전면 발굴로 유적 전체를 기록하고 보존 방안 수립.
8. 성공 사례 — 삽 대신 기록을 먼저 들었을 때
실제 현장에서 이 기록과 조사 과정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냈는지, 사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공 사례 1 — 서교동 재개발 현장
홍대 인근 서교동 재개발 공사 전, 연구진이 1912년 토지 기록을 먼저 검토해 집터와 논이 겹치던 구역을 특정했습니다. 해당 지점에 시굴조사를 선행한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와 전기 도자기, 삼국시대 토기까지 연속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기록이 삽의 방향을 결정한 덕분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온전히 세상에 나왔습니다.
성공 사례 2 — 구로동 공원 조성 사업
구로구 구로동 공원 조성 과정에서 1912년과 1920년대 토지 기록을 비교 분석해 과거 연못과 창고 자리임을 확인했습니다. 시굴조사에서 유구가 그대로 드러났고, 개발 사업자·지자체·문화재 발굴 기관이 협력해 유구 보존에 성공했습니다. 100년 전 연못의 흔적이 지금 공원 속 예술 작품으로 되살아나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공 사례 3 — 행촌동 주거 재개발
종로구 행촌동 재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를 단계별로 착실히 밟은 결과, 조선시대 주거 유구가 연속 확인되었습니다. 우물 하나, 담장 기초 돌 하나, 도자기 파편 하나가 하나의 시대를 복원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습니다. 단계적 조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이 사례는 지금도 현장에서 인용됩니다.
삽을 들기 전에, 기록을 먼저 펼쳐야 하는 이유
세 사례 모두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공사 전에 기록을 확인하고,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충분히 거친 뒤 발굴에 착수했다는 것.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수백 년의 역사가 하루 만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중곡동의 1912년 기록도 바로 그 방패막이입니다.
9. 중곡동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1912년 중곡동의 이씨, 박씨, 김씨는 자신들의 이름이 113년 뒤에도 누군가에게 읽힐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냥 살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논으로 나가고, 밭을 매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고, 저녁이면 가족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닫았습니다. 그 평범하고 고요한 반복이 쌓여 중곡동이 되었고, 광진구가 되었고, 지금의 서울이 되었습니다.
다음에 중곡동 거리를 걸을 때, 딱 한 번만 발밑을 생각해보세요. 이 아스팔트 아래 어딘가에 1912년의 논두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카페 건물 아래에 박씨 집안의 밭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저 아파트 단지 자리에 이씨 할아버지가 해마다 벼를 심던 논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그 땅 아래에, 113년의 시간이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발굴조사와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잠든 시간을 깨우는 일입니다. 옛날 물건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이고, 그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우리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진한 인사입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한, 중곡동의 이씨도, 박씨도, 김씨도 아직 이 땅 위에 있습니다.

밭고랑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생겼고,
논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올라갔으며,
산이 있던 자리에 건물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 아래 흙 속에
그들의 땀과 씨앗이 여전히 잠들어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발굴하는 한
그 씨앗은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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