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광진구 중곡동, 그 땅에 숨겨진 이야기
- 서울 HI
- 4월 21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월 3일
1912년, 서울 광진구 중곡동. 지금은 빌딩과 아파트로 가득한 이곳이, 한 세기 전에는 논과 밭, 그리고 사람들의 꿈이 얽힌 드넓은 땅이었다.

서울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중곡동. 지금은 카페와 맛집으로 북적이는 이 동네가 100여 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본 적 있나? 그때 중곡동은 논, 밭, 산, 그리고 소박한 집들이 어우러진, 사람 냄새 나는 마을이었다. 518필지, 무려 2,211,173㎡에 달하는 땅에 얽힌 이야기들. 그곳엔 이씨, 김씨, 박씨 같은 사람들이 땀 흘리며 살아갔고, 그들의 삶이 땅 위에 고스란히 새겨졌다.
이 글은 1912년 중곡동의 풍경을 생생히 되살려줄 거야. 논과 밭의 규모부터, 어떤 사람들이 어떤 땅을 소유했는지까지.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볼게. 자, 준비됐지? 과거로 떠나는 타임머신, 지금 출발한다!
목차
중곡동의 전체면적, 어떤 땅이었을까?
논이 펼쳐진 중곡동, 농사의 중심지
집이 있던 대지, 사람들의 삶의 터전
산과 임야, 자연이 숨 쉬던 곳
잡종지, 중곡동의 숨겨진 가능성
밭, 땀과 노력의 흔적
중곡동을 일군 사람들, 그들의 성씨와 땅
1912년 중곡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
1. 중곡동의 전체면적, 어떤 땅이었을까?
1912년, 중곡동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총 518필지, 면적은 2,211,173㎡. 이게どれくらい 큰 거냐면, 축구장 약 300개 크기라고 생각하면 돼! 어마어마하지?
이 땅은 그냥 평범한 빈터가 아니었어. 논, 밭, 산, 집터, 그리고 잡종지까지. 각기 다른 용도로 나뉘어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집을 짓고, 자연과 함께 살아갔던 이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2. 논이 펼쳐진 중곡동, 농사의 중심지
중곡동의 논은 125필지, 300,708㎡ 규모였다. 이건 전체 면적의 약 13.6%에 해당하는 크기야. 논이 많다는 건, 이곳이 농사로 먹고사는 마을이었음을 보여줘.
상상해봐. 아침 햇살 아래, 이씨 아저씨가 허리 숙여 모를 심고, 물이 찰랑이는 논두렁을 따라 박씨 할머니가 걸어가는 모습. 논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었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마을을 이어주는 생명줄이었지.
그런데 논 125필지가 다 같은 논은 아니었을 거야. 어떤 곳은 비옥해서 쌀이 주렁주렁 열렸고, 어떤 곳은 물이 잘 안 빠져서 고생했을지도. 그때 농부들의 땀과 애환이 지금도 그 땅 아래 어딘가 스며있을 것 같지 않아?
3. 집이 있던 대지, 사람들의 삶의 터전
논이 생명줄이었다면, 집이 있던 대지는 사람들의 보금자리였다. 47필지, 18,505㎡의 대지에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어. 이건 전체 면적의 0.8% 정도로, 생각보다 적은 비율이야.
왜 그랬을까? 그때 중곡동은 농사가 주된 삶이었기 때문에, 집보다는 논과 밭이 더 중요했기 때문일 거야. 그래도 이 47필지의 대지엔 가족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울려 퍼졌을 거야.
김씨네 집 마당에선 저녁이면 된장찌개 냄새가 퍼지고, 정씨네 담장 너머론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을지도. 이 작은 대지들이 모여 중곡동이라는 마을을 만들었어.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변했지만, 그때의 따뜻한 풍경은 여전히 상상 속에 살아있어.
4. 산과 임야, 자연이 숨 쉬던 곳
중곡동엔 산과 임야도 있었다. 13필지, 228,057㎡ 규모로, 전체 면적의 약 10.3%를 차지했어. 이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새들이 지저귀던 자연의 품이었을 거야.
임야는 단순히 숲이 아니었어. 땔감을 구하고, 약초를 캐고, 때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지. 박씨 청년이 산길을 따라 땔감을 지고 내려오고, 신씨 할아버지가 약초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해.
지금은 개발로 많이 사라졌지만, 그때의 임야는 중곡동 사람들에게 자연의 선물이었어.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자연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살짝 따뜻해지지 않아?
5. 잡종지, 중곡동의 숨겨진 가능성
잡종지는 7필지, 1,071,323㎡로 전체 면적의 무려 48.4%를 차지했다. 이게 뭐냐고? 잡종지는 논도 밭도 아닌, 명확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땅이야. 말하자면, 중곡동의 ‘미래’를 품은 땅이었던 셈이지.
이 잡종지는 마을의 가능성을 상징했어. 누군가는 여기서 새 농지를 일구려 했을 거고, 또 누군가는 집을 지을 꿈을 꾸웠을지도. 1912년의 중곡동 사람들은 이 드넓은 잡종지를 보며 어떤 미래를 상상했을까? 그들의 꿈이 지금의 중곡동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을지도 몰라.
6. 밭, 땀과 노력의 흔적
밭은 326필지, 592,577㎡로 전체 면적의 약 26.8%를 차지했다. 논보다 훨씬 많은 필지 수를 보면, 중곡동이 다양한 작물을 키우는 농사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어.
밭에선 고추, 배추, 무 같은 작물이 자랐을 거야. 이씨 아주머니가 쪼그려 앉아서 김장용 배추를 다듬고, 최씨 아저씨가 괭이질하며 땀 흘리는 모습이 그려지지? 이 밭들은 단순한 농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노력과 희망이 깃든 공간이었어.
밭 326필지.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야.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가족의 생계, 그들의 하루하루가 지금도 중곡동의 역사로 남아있어.
7. 중곡동을 일군 사람들, 그들의 성씨와 땅
중곡동의 땅을 소유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이씨가 10필지, 박씨가 7필지, 김씨가 5필지, 정씨가 4필지… 그리고 임씨, 천씨, 최씨, 신씨, 안씨, 유씨, 하씨, 조씨, 차씨, 황씨까지. 다양한 성씨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일궜다.
이씨는 논과 밭을 골고루 소유하며 마을의 중심 역할을 했을지도. 박씨는 임야 근처에 집을 짓고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았을 거야. 김씨와 정씨는 밭에서 농사지으며 아이들을 키웠고, 최씨는 잡종지에 새로운 꿈을 심었을지도 몰라.
이 사람들의 이름은 단순한 성씨가 아니야. 그들은 중곡동의 역사를 만든 주인공들이었어. 각기 다른 필지에서, 각기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갔던 그들.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의 중곡동을 있게 했지.
8. 1912년 중곡동이 우리에게 남긴 것
1912년의 중곡동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었어. 사람들의 땀, 꿈, 그리고 삶이 얽힌 공간이었지. 논과 밭에서 농사짓고, 대지에 집을 짓고, 임야에서 자연을 느끼고, 잡종지에서 미래를 꿈꾸던 그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중곡동에도 여전히 살아있어.
지금 우리가 걷는 중곡동의 거리 아래, 그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빌딩과 아파트 사이로, 100년 전 논과 밭의 풍경이 스쳐가는 것 같지 않아?
이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도 잠시 멈춰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 우리의 터전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흔적을 남길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1912년 중곡동의 생생한 풍경을 느껴봤길 바래. 만약 너도 너희 동네의 옛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발굴조사나 시굴조사를 통해 숨겨진 역사를 찾아보는 건 어때? 과거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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