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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강북구 2,335필지 5,163,573㎡논 52.1% 시리즈 최고, 일본인 137필지, 미아리가 공동묘지로 지정된 해

  • 13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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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1912 토지조사부 시리즈

서울특별시 강북구 전역 · 문화재 기초조사 데이터

1912년 강북구 2,335필지 5,163,573㎡논 52.1% 시리즈 최고, 일본인 137필지, 미아리가 공동묘지로 지정된 해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이었던 이 땅에 1912년 일본인이 137필지를 장악했다. 같은 해 일제는 미아리 오패산 일대를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북한산 의병들의 숨소리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 해의 기록이다.

2,335총 필지

852논(52.1% 최고)

137일본인 소유

9창덕궁 소유

4사사지(사찰 부지)

1912년, 강북구 논의 면적이 전체 면적의 절반을 넘었다. 그리고 그 해 일제는 이 논 옆 오패산 일대를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2,335필지 중 852필지가 논이다. 전체 필지의 36.5%, 면적 기준으로는 2,688,124㎡로 전체의 52.1%를 차지한다. 시리즈 전체에서 논 면적 비율 최고다. 마포(논 26.2%), 송파(27.6%), 성동(12.9%)과 비교하면 강북구의 52.1%가 얼마나 압도적인지가 드러난다.

우이천과 중랑천의 지류가 흐르는 이 평야 지대는 조선 시대부터 비옥한 농경지로 알려졌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수량이 논농사를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 바로 이 해, 1912년에 일제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을 발표하며 미아리 오패산 일대를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풍요로운 농경지 옆에 죽은 자들의 공간이 들어선 것이다.

같은 해 일본인이 137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체 필지의 5.9%인데, 이것은 당시 강북구 일대가 아직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으로 서울 행정구역에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일본인의 토지 침투가 시작됐다는 것을 뜻한다. 북한산 자락의 조용한 논 마을에 역사의 폭풍이 몰아치던 그 해의 기록이다.


목차

11912년 강북구 토지 통계 총괄

2논 52.1% — 이 시리즈 최고 논 면적 비율

3일본인 137필지 — 숭인면에 이미 진입한 수탈의 손길

41912년 묘지규칙과 미아리 공동묘지의 탄생

5창덕궁 9필지 — 북한산 자락 왕실의 땅

6사사지 4필지 — 북한산 사찰의 흔적

7성씨 6종과 우이동·수유동 마을 사람들

8북한산 의병 — 토지조사 직전까지의 저항

9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10성공 사례와 감동으로 닫는 이야기



1

1912년 강북구 토지 통계 총괄 — 논의 왕국

1912년 강북구 토지의 전체 현황이다. 2,335필지 5,163,573㎡.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작은 필지 수다. 하지만 그 내부 구성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순수한 농촌 풍경을 보여준다.

852필지논(面積 52.1%)

1,087필지

137필지일본인 소유

312필지대지

53필지임야

52필지동양척식(주)

30필지국유지

26필지분묘지

9필지법인·창덕궁

4필지사사지

1필지연못

지목

필지 수

면적(㎡)

면적 비율

비율 시각화

논(畓)

852

2,688,124

52.1%


밭(田)

1,087

1,967,076

38.1%


임야(林野)

53

172,979

3.3%


대지(垈)

312

274,513

5.3%


분묘지

26

51,815

1.0%


사사지(寺社地)

4

8,558

0.17%


지소(池沼/연못)

1

505

0.010%


합계

2,335

5,163,570

≈100%


논 52.1%와 밭 38.1%. 이 두 지목이 합쳐 전체 면적의 90.2%를 차지한다. 나머지 9.8% 안에 대지(5.3%), 임야(3.3%), 분묘지(1.0%), 사사지(0.17%)가 담겨 있다. 강북구는 1912년 이 시리즈의 어느 구보다 순수한 농경 지대였다. 하지만 그 순수함의 이면에는 일본인 137필지라는 균열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 ✦


2

논 52.1% — 이 시리즈 최고 논 면적 비율, 왜 강북구는 논의 왕국이었나

시리즈 전 구 논 면적 비율 비교

강북구

52.1% — 시리즈 최고

52.1%

송파구

27.6%

27.6%

마포구

26.2%

26.2%

영등포구

15.1%

15.1%

성동구

12.9%

12.9%

강북구의 논 비율이 이렇게 높은 이유는 지형에 있다. 북한산 화강암 봉우리들에서 시작된 계곡물이 우이천과 중랑천 지류로 합쳐지며 강북구 남쪽 평야로 흘러내린다. 이 풍부한 수량이 넓은 수전(水田) 지대를 만들었다. 우이동, 수유동, 미아동, 번동 일대의 평야가 이 논들이 펼쳐진 공간이었다.

조선 시대 강북구 지역은 경기도 양주목에 속했으며, 한성부 경흥로가 지나는 교통 요지였다. 양주로 이어지는 이 도로변에 넓은 논 지대가 펼쳐져 있었고, 그 논들이 도성에 쌀을 공급하는 중요한 산지 역할을 했다.

논 852필지 2,688,124㎡는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하다. 수전(水田)은 혐기성 환경을 형성해 유기물 보존에 탁월한 조건을 제공한다. 강북구의 논 지역, 특히 우이천 변의 저습지 구역에서는 선사시대 도구, 씨앗, 목재, 직물 등 유기질 유물이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논의 역사는 단순한 농업 기록이 아니라 그 논 아래에 쌓인 수천 년의 문화층을 가리키는 지도다.


3

일본인 137필지 — 숭인면에 이미 진입한 수탈의 손길



1912년 강북구 일대는 아직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이었다. 서울 행정구역 밖의 농촌 마을이었다. 그런데 이미 일본인이 137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체 2,335필지의 5.9%다.

이 비율이 왜 충격적인가? 당시 일본인들은 주로 서울 도심과 교통 요지 인근에 토지를 취득했다. 도심에서 먼 숭인면 농촌 지역에 이미 137필지를 확보했다는 것은, 일본 자본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빠르게 서울 외곽 농촌 지역까지 잠식했는지를 보여준다. 비옥한 논 지대를 가진 강북구 일대는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에게 매력적인 목표였다.

일본인 137필지의 고고학적 함의

일본인 소유 137필지는 대부분 비옥한 논과 밭이었을 것이다. 이 필지들에서는 일제강점기 일본식 농업 시설(수리조합 관련 석조 구조물, 경계 표석 등)과 기존 조선 농민의 생활 유구가 층위로 겹쳐 있을 가능성이 있다. 두 문화가 충돌하는 지점의 문화층은 고고학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4

1912년 묘지규칙과 미아리 공동묘지의 탄생

1912년은 강북구 역사에서 특별한 해다. 이 해에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토지조사사업이 강북구 일대 토지를 측량하고 있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는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취체규칙」을 발표했다. 이 규칙에 따라 미아리 오패산 일대가 공동묘지 1번 구역으로 지정됐다.

살아 있는 자들의 논밭을 측량하는 동시에, 죽은 자들이 묻힐 공간을 지정하는 일이 같은 해에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가옥에 신식 번지가 붙고,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분묘는 지정 구역으로 이전 압박을 받았다. 1912년 강북구의 분묘지 26필지 51,815㎡는 이 압박이 본격화되기 직전의 마지막 자유로운 분묘 기록이다.

"1912년 묘지규칙이 발표되면서 지정된 공동묘지 19곳 중 1번은 미아리 오패산 일대, 2번은 숭인면 미아리 일대였다. 이는 죽은 자를 관리하고 토지 수탈을 위한 사전 작업이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미아리 공동묘지 관련 역사 기록

그 공동묘지는 1930년대에 본격 운영되기 시작해 이상, 이육사, 유관순, 한용운 같은 인물들이 처음 묻혔다가 나중에 다른 곳으로 이장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1957년 이장이 완료된 후 이 공동묘지 터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1950~60년대 서울 서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이룬다.

지금도 미아리 일대의 재개발 현장에서는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와 그 이전 시기의 분묘가 겹쳐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1912년 분묘지 26필지의 위치가 바로 이 역사적 층위를 추적하는 핵심 자료가 된다.

✦ ✦ ✦


5

창덕궁 9필지 — 북한산 자락에 왕실이 남긴 흔적

창덕궁 9필지. 서대문구(4필지), 광진구(30필지)에 이어 이 시리즈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창덕궁 소유 토지다. 강북구의 창덕궁 9필지는 어떤 땅이었을까.

강북구 지역인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는 조선 시대 왕실 사냥터(강무장)와 관련이 있었다. 왕이 직접 사냥을 나와 활을 쏘던 이 일대의 일부 토지가 창덕궁 소유로 유지됐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조선 왕실은 북한산 인근의 사찰들을 왕실 원찰로 지정했는데, 그 원찰 주변 부지가 창덕궁 소유 9필지의 일부를 구성했을 수도 있다.

창덕궁 9필지와 사사지 4필지의 위치적 연관성이 중요하다. 강북구의 사사지 4필지 8,558㎡는 이 시리즈에서 비교적 많은 편이다. 북한산 일대에는 조선 시대부터 수많은 사찰이 있었으며, 일제는 의병들이 북한산 사찰을 근거지로 삼을 것을 우려해 사찰 대부분을 불태웠다고 기록은 전한다. 사사지 4필지가 그 사찰들의 마지막 부지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6

성씨 6종과 우이동·수유동·미아동 마을 사람들

1912년 강북구에는 6개 성씨가 기록에 남을 만큼의 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성씨 수로는 이 시리즈 중간 수준이지만, 구성이 특별하다.

김씨427필지1위

이씨347필지2위

박씨214필지3위

윤씨158필지4위 · 주목

전씨141필지5위 · 주목

최씨107필지6위

이 시리즈에서 윤씨가 4위를 차지한 것은 강북구가 처음이다. 윤씨 158필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강북구 일대는 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으로, 이 일대에 해평 윤씨 또는 파평 윤씨 가문의 세거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윤씨 집성촌이 확인된다면, 그 묘역이 분묘지 26필지의 일부를 구성했을 것이다.

전씨 141필지도 주목해야 한다. 전씨는 전국적으로 비교적 드문 성씨다. 강북구에서 141필지를 소유한 것은 이 일대에 전씨 집성촌이 수 세대에 걸쳐 자리잡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집성촌의 위치는 논 분포 패턴과 대지 분포를 분석해 추정할 수 있으며, 그 마을 아래에는 조선 시대 주거 유구와 생활 유물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7

소유자 구조와 북한산 의병 — 토지조사 직전까지의 저항

조선인(성씨)

약 2,119필지 (90.8%)

90.8%

일본인

137필지 (5.9%)

5.9%

동양척식(주)

52필지 (2.2%)

2.2%

국유지

30필지

30필지

법인

9필지

창덕궁

9필지



1912년 강북구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직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북한산에 일본 헌병대가 주둔한 것은 1910년대 초반이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의병과 독립군들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강북구를 감싸고 있는 북한산 자락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집결하고 은신하는 장소였다.

일제 헌병대는 의병들을 쫓아 북한산에 진입했고, 북한산성 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다. 의병의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작전이었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이 강북구 일대를 측량하던 시점, 그 산 위에서는 여전히 저항의 숨결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1912년 강북구 임야 53필지는 그 저항의 무대였던 산의 기록이다.


8

문화재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의 필요성

논 52.1%의 비옥한 농경 지대, 미아리 공동묘지 지정의 역사, 북한산 의병의 저항, 창덕궁 9필지의 왕실 흔적, 사사지 4필지의 소각된 사찰. 이 모든 역사가 강북구 5,163,573㎡의 땅 위에, 그리고 그 아래에 쌓여 있다.

조사 단계

강북구 핵심 적용 지점

기대 성과

문화재 지표조사

논 852필지 우이천변 저습지 분포·분묘지 26필지 미아리 공동묘지 전(前) 기록 대조·사사지 4필지 소각 사찰 위치 확인·창덕궁 9필지 구 왕실 소유지 현황

조사 우선 구역 선정

시굴조사

우이천변 수전 지역 문화층 깊이 측정·윤씨·전씨 집성촌 추정 구역 건물지 트렌치·북한산 사찰 소각 유구 흔적 확인

유구 성격·층위 확인

표본조사

일본인 137필지 침탈 전후 경작지 층위 구분·미아리 1912년 분묘지 26필지 묘제 확인·임야 53필지 의병 근거지 유물 조사

유적 범위·성격 파악

본발굴조사

전면 발굴·기록·국가유산청 보고·강북구 역사관 연계 전시

역사 복원 완성

9

성공 사례 — 북한산과 미아리의 역사를 발굴하다

강북구와 인접 지역의 발굴 성과들이 이 일대의 고고학적 가능성을 증명한다.

성공 사례 01

북한산성 성벽 발굴 — 조선 3시기 축성이 한 유적에서

북한산성 발굴조사에서 조선 숙종 때(17세기), 영조 때(18세기), 순조 때(19세기)에 각각 보수·축성된 세 시기의 성벽 층위가 한 유적 안에서 확인됐다. 조선 시대 산성 운영과 군사 시스템의 변천을 실물로 보여주는 성과였다. 1912년 임야 53필지 구역이 이 성벽의 주변부와 겹칠 수 있어 추가 발굴 가능성이 있다.

성공 사례 02

우이동 계곡 생활 유구 조사 — 수백 년의 취락 흔적

우이동 북한산 둘레길 정비 과정에서 조선 시대 산촌 취락의 주거 흔적과 도자기편, 석제 생활 도구가 수습됐다. 1912년 대지 312필지와 논 852필지의 분포 구역이 이 취락 위치와 겹치는 것으로 분석됐다. 지표조사 단계에서 1912년 토지조사부와 현재 지적도를 대조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성공 사례 03

미아리 공동묘지 이전 후 발견된 조선 분묘 층위

1957~58년 미아리 공동묘지 이전 과정과 그 이후 개발 사업에서 일제강점기 공동묘지 층위 아래에서 조선 후기 분묘들이 발견됐다. 이것은 1912년 분묘지 26필지가 일제의 공동묘지 지정 이전에 이미 민간 묘역이 형성되어 있던 곳임을 확인해 준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1912년 분묘지 기록과 공동묘지 기록을 층위별로 분석한 것이 조선 분묘 발견으로 이어졌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논 52.1%, 의병의 산, 공동묘지가 된 오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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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852필지, 전체 면적의 절반이 논이었던 땅.


그 논물에 발을 담갔을 김씨, 이씨, 윤씨, 전씨.


북한산에서 의병들이 마지막 저항을 이어가던 그 해,


일제는 논 옆 오패산을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산 자들의 논 사이에, 죽은 자들의 공간이 들어섰다.


지금 그 땅 아래엔 산 자와 죽은 자,


저항하는 자와 수탈당하는 자의 기억이


모두 층층이 쌓여 있다.


— 강북구 2,335필지, 모든 기억을 위해

1912년 강북구의 논을 걸어다니던 사람들은 알았을까. 이 풍요로운 땅이 얼마나 빠르게 바뀔지를. 논은 공동묘지가 됐고, 공동묘지는 아파트가 됐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논도 있고, 공동묘지도 있고, 조선 마을도 있다. 그것들을 꺼내는 것이 발굴조사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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