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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중구 봉래동4가의 땅과 사람들, 그리고 서울의 100년 이야기

  • 2025년 9월 1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서울역 옆, 1912년 봉래동4가 300필지의 충격적인 진실 — 밭이 집보다 넓었던 서울 도심,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기반 서울 지역 아카이브

지금 당신이 서울역 근처를 걷는다면, 아마 이 사실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1912년, 바로 그 자리는 집보다 밭이 더 넓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사람들은 흙을 일구며 콩과 채소를 키웠고, 좁은 골목에는 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가 뒤섞였다. 300필지, 193,858㎡. 이 숫자는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니다. 도시와 농촌이 충돌하고, 조선인과 외세가 뒤엉켰던 서울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순간이다. 지금부터 그 순간 속으로 들어간다.


목차

  • 01봉래동4가, 서울 도심의 작은 역사 지도

  • 021912년 봉래동4가의 집과 대지, 삶의 무대

  • 03밭과 산 — 토지 이용의 진짜 모습

  • 04땅을 가진 성씨들의 분포와 그 속의 권력

  • 05국유지와 법인 소유지 — 시대의 구조가 남긴 자리

  • 06일본인과 프랑스인의 땅 — 식민과 교류의 흔적

  • 07봉래동4가에서 읽는 서울의 변천사

  • 08문화재 발굴·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 09봉래동4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우리의 역할


1912년 서울 중구 봉래동4가. 300필지, 193,858㎡. 그리고 집보다 더 넓었던 밭. 서울에서 가장 뜻밖의 도시 풍경이 이곳에 있었다.

193,858㎡는 앞서 살펴본 삼림동·삼각동·북창동 중 가장 넓은 면적이다. 서울역 바로 옆, 남대문 인근에 자리한 봉래동4가가 이렇게 광활한 땅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땅의 쓰임새다. 주거지보다 밭이 더 넓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여전히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seoulheritage.org의 서울 지역조사 데이터가 발굴해낸 봉래동4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한 층씩 벗겨본다.



01 봉래동4가, 서울 도심의 작은 역사 지도

봉래동4가는 지금 우리가 아는 서울역·남대문시장 권역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다. 조선 말기부터 교통과 상업의 요지였던 이곳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한 지역 중 하나였다. 기차역이 들어서고, 일본인 상권이 확장되고, 서양 선교사들이 활동하는 공간이 되면서 봉래동4가는 서울의 근대화가 가장 먼저 충돌한 현장이 되었다.

1912년의 기록은 바로 그 변화의 한복판을 포착한다. 300필지라는 숫자 안에는 전통적인 조선의 마을 구조와 외세의 침투, 농업과 도시 생활의 공존이 모두 담겨 있다. 이 동네 한 곳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우리는 당시 서울 전체가 어떤 흐름 속에 있었는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02 1912년 봉래동4가의 집과 대지, 삶의 무대

300

총 필지 수

193,858㎡

총 면적

247필지

대지 (집터)

83,451㎡

대지 면적

봉래동4가에서 집터로 쓰인 대지는 247필지, 83,451㎡였다. 전체 면적의 약 43%에 해당하는 수치다. 300필지 중 247필지가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공간이었다는 것은, 이 마을이 단단한 주거 공동체였음을 말해준다.

당시의 집들은 기와를 얹은 한옥이나 소박한 초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방과 부엌, 광이 이어졌고, 집과 집 사이 골목은 이웃들이 일상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좁은 골목에서 뛰어놀았고, 부모들은 마당에서 김장을 담그거나 이웃과 저녁을 나눴다. 247개의 대지는 단순한 부동산 단위가 아니라, 247개의 살아 숨 쉬는 가정이었다. 그 위에서 서울의 생활사가 쌓여 갔다.



03 밭과 산 — 토지 이용의 진짜 모습

밭 (농경지)

52필지

110,136㎡

대지 (집터)

247필지

83,451㎡

산 (임야)

1필지

271㎡

여기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난다. 밭의 면적이 무려 110,136㎡다. 247필지에 달하는 집터 면적 83,451㎡보다 훨씬 넓다. 필지 수는 52개로 집터보다 훨씬 적지만, 밭 하나하나의 규모가 컸다는 의미다. 서울 도심 한복판, 서울역 인근에서 이 정도 규모의 농지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기준으로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다.

이 밭에서는 무엇이 자랐을까. 콩, 보리, 채소, 고추. 주민들의 식탁을 채우는 작물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자라고 있었다. 일부는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도시라고 해서 완전히 농업과 단절된 게 아니었다. 봉래동4가는 도시와 농촌 사이 어딘가에 있는 '과도기적 마을'이었고, 그 독특한 경계선 위에 삶이 존재했다. 반면 산은 단 1필지, 271㎡에 불과했다. 이 지역이 애초에 평지 중심의 지형이었고, 농사와 거주에 최적화된 땅이었다는 증거다.

"서울 한복판에서 밭이 집보다 넓었다. 우리가 '도시 서울'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농촌 위에 세워진 것이다."


04 땅을 가진 성씨들의 분포와 그 속의 권력

김씨

67필지

이씨

38필지

박씨

20필지

최씨

19필지

정씨

17필지

주씨

12필지

신씨

11필지

봉래동4가의 조선인 토지 소유자 중 단연 돋보이는 성씨는 김씨다. 67필지는 전체 300필지의 22.3%에 해당한다. 마을에서 다섯 집 중 하나 이상이 김씨 소유였다는 뜻이다. 그 영향력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결정에서 발언권을 가졌고, 이웃들의 경조사에서 중심 역할을 했을 것이며, 외세의 침탈 속에서도 지역 공동체를 지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씨(38필지), 박씨(20필지), 최씨(19필지), 정씨(17필지), 주씨(12필지), 신씨(11필지)로 이어지는 성씨 분포는 봉래동4가가 특정 가문의 독점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가문이 공존하며 경쟁하고 협력하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다양한 성씨가 기록에 남아 있다는 것은, 봉래동4가가 그만큼 인구 밀도가 높고 활발한 생활 공간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성씨 분포 데이터는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에서도 중요하게 활용된다. 특정 성씨가 밀집한 구역에서는 그 가문의 생활 방식과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는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과 발굴이 만나는 지점에서 역사는 더욱 입체적으로 복원된다.



05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 — 시대의 구조가 남긴 자리

5필지

국유지

2필지

법인 소유지

봉래동4가에는 국유지 5필지와 법인 소유지 2필지가 있었다. 앞서 살펴본 삼림동(2필지), 북창동(1필지)과 비교해도 봉래동4가의 국유지 비중은 눈에 띈다. 5필지의 국유지는 도로, 관공서, 공공시설 등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했던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봉래동4가가 이미 서울의 중요한 행정·교통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법인 소유 2필지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법인이라면 학교, 종교 단체, 혹은 초기 기업 형태의 조직이었을 것이다. 교육 기관이나 교회가 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고, 근대적 상업 조직이 거점을 마련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봉래동4가가 단순한 주거·농업 공간을 넘어 교육, 종교, 산업의 기반이 교차하는 복합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국유지는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특히 중요한 발굴 대상이 된다. 옛 관아나 공공 건물이 있던 자리에서는 당시의 행정 체계와 도시 관리 방식을 보여주는 유구가 출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봉래동4가의 5필지 국유지도 언젠가의 발굴조사에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06 일본인과 프랑스인의 땅 — 식민과 교류의 흔적

일본인

24필지

전체의 약 8%

프랑스인

3필지

선교·외교 거점

봉래동4가에서 일본인은 24필지를 소유했다. 앞서 살펴본 북창동의 47필지보다는 적지만, 전체의 약 8%에 달하는 비중이다. 열 채 중 하나 가까이가 일본인 소유였다는 의미다. 1912년은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일본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발판 삼아 조선인들의 생활 기반에 빠르게 파고들고 있었다.

프랑스인의 3필지는 숫자로는 작지만 상징성이 깊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남대문 일대를 중심으로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봉래동4가는 그 활동 반경 안에 있었다.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교육·의료 공간을 마련했거나 거주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인의 3필지는 서양의 종교와 문화가 서울 도심 골목 깊숙이까지 이미 들어와 있었다는 생생한 증거다.



07 봉래동4가에서 읽는 서울의 변천사

봉래동4가의 토지 기록을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이 작은 동네가 당시 서울의 모든 모순과 변화를 한 곳에 압축해놓은 것처럼 보인다. 대지와 밭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공간, 7개 성씨가 뒤섞인 활발한 공동체, 일본인과 프랑스인이 뿌리내린 국제적 현장,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까지 더해진 복잡한 층위. 이 모든 요소가 한 동네 안에서 동시에 존재했다.

봉래동4가의 변천사는 서울 전체의 변천사다. 농촌에서 도시로, 조선에서 식민지로, 전통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이 이 300필지 안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이 지역이 고층 빌딩과 번화가로 가득 찬 것은, 바로 그 변화의 끝에 있는 결과다. 하지만 그 빌딩 아래 몇 미터 아래에는 여전히 김씨 할아버지의 집터가, 누군가의 어머니가 일구던 밭의 흔적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08 문화재 발굴·지표조사가 중요한 이유

봉래동4가의 기록은 문서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땅 아래에는 당시의 유구와 유물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문화재 지표조사란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해당 지역의 역사적 가치를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다.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에는 법적으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며, 중요한 흔적이 발견되면 표본조사, 시굴조사,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진다.

봉래동4가처럼 대규모 밭과 주거지, 외국인 소유지가 공존했던 지역에서는 발굴을 통해 단층적 조선식 생활 유적뿐 아니라 일본식 건물 기초, 근대 농업 관련 유구 등 다층적 역사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서울 도심의 근대 생활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실제 발굴 성공 사례

서울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조선시대 상가터와 다리 흔적, 생활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물길 아래 잠들어 있던 수백 년의 기억이 복원 작업을 계기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봉래동4가의 농경지 흔적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복원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seoulheritage.org가 서울 25개 구 전역의 동별 기록을 아카이빙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러한 사전 기록이 축적되어야 발굴 지점의 우선순위를 정밀하게 설정할 수 있고, 출토된 유물의 역사적 맥락을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 문서 기록과 발굴 성과가 만날 때, 역사는 가장 생생하게 살아난다.



09 봉래동4가가 던지는 메시지와 우리의 역할

1912년의 봉래동4가 기록을 다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서울'은 사실 수백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밭이 집보다 넓었던 동네, 7개 성씨가 함께 살았던 공동체, 일본인과 프랑스인이 골목을 공유했던 공간.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아스팔트 아래에 있다.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는 그 아래에 있는 것들을 꺼내어 기억하는 행위다. 전문가만의 일이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 내가 매일 걷는 골목, 내 발 아래의 땅에 어떤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도시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시작이다. 봉래동4가의 300필지는 그 관심의 출발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밭이 집보다 넓었던 서울 한복판.


지금은 빌딩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흙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300필지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그 땅 아래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귀 기울이기로 선택한다면,


봉래동4가는 오늘도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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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 blog.naver.com/seoul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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