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시간을 거슬러 용산구 서계동으로 가보자
- 2025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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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5월 12일
용산 한복판에골목과 밭과 사람이 있었다.
1912년 용산구 서계동 — 216필지, 88,773㎡가 품고 있던 조선의 마지막 풍경. 집터와 성씨, 그리고 스며든 변화의 기록
목차
1.1912년, 시간을 거슬러 서계동으로
2.서계동은 얼마나 넓었을까 — 토지 통계로 본 마을의 규모
3.그땐 집이 몇 채였을까 — 대지가 79%인 마을
4.밭과 땅의 비율, 그리고 삶의 풍경
5.누가 살았나 — 성씨로 보는 마을 구성
6.조용히 들어온 변화, 일본인의 등장
7.서계동이 주는 오늘날의 시사점
8.문화재 지표조사 — 골목의 기억을 꺼내는 방법
9.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1. 1912년, 시간을 거슬러 서계동으로

서울 용산. 지금은 고층 오피스 빌딩과 복합 쇼핑몰, 외국 대사관이 뒤섞인 이 도심이 113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하철 1호선 남영역 근처, 오늘날 재개발 논의가 끊이지 않는 서계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그런데 1912년 이 마을은 지금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마트폰도 없고, 지하철도 없고, 아스팔트도 없던 그 시절.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히 웃고 울고 밥을 지었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팀이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 기록을 따라,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자. 흙길을 걷는 기분으로 한 걸음씩 따라오면 된다.
2. 서계동은 얼마나 넓었을까 — 토지 통계로 본 마을의 규모
총 필지 수
216필지
촘촘하게 채워진 도심 마을
총 면적
88,773㎡
축구장 약 12개 규모
대지 (1위)
70,049㎡
205필지, 전체의 79%
밭
18,724㎡
11필지, 생계의 터전
1912년 서계동의 전체 면적은 약 88,773㎡, 총 216필지다. 축구장 12개 정도 크기의 동네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수치만 놓고 보면 그냥 작은 마을 같지만, 당시의 서울이 지금보다 훨씬 한적했다는 걸 감안하면 서계동은 꽤 활기찬 주거 밀집 지역이었다.
다른 동네들이 논밭 위주였던 것과 달리, 서계동은 전체 면적의 79%가 대지였다. 논이 거의 없었고, 밭도 11필지뿐이었다. 이건 서계동이 순수한 농촌 마을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의 주거와 생활이 밀집된 준도심 성격의 마을이었음을 뜻한다. 용산이라는 지리적 위치가 이미 그 시절부터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대지 79%밭 21%
대지 205필지
밭 11필지
3. 그땐 집이 몇 채였을까 — 대지가 79%인 마을

서계동 216필지 중 무려 205필지가 대지였다. 비율로 따지면 95%. 실제 집이 세워진 땅이 마을 전체를 거의 꽉 채우고 있었다는 뜻이다. 총 대지 면적은 70,049㎡로, 마을 전체의 79%가량을 차지했다. 이 수치는 앞서 살펴본 외발산동, 일원동, 천왕동, 증산동과 비교해도 유독 높다. 서계동은 처음부터 주거 중심의 마을이었다.
그 집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화려한 대저택보다는 작고 단출한 가옥들이 골목을 따라 어깨를 나란히 했을 것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마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저녁이면 밥 짓는 냄새가 골목 전체를 채웠을 그 풍경. 좁지만 따뜻했고, 촘촘하지만 서로를 알고 지내던 마을이었다. 그 집터들 아래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아직 아무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4. 밭과 땅의 비율, 그리고 삶의 풍경
논은 한 필지도 없었다. 서계동은 논농사가 불가능한 지형이거나, 이미 주거 중심으로 토지 이용이 굳어진 동네였다. 대신 11필지, 약 18,724㎡의 밭이 있었다. 지금의 서계동에서 밭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지만, 100년 전엔 이 골목 어딘가에서 채소가 자라고 곡식이 익었다.
흙 묻은 손으로 무와 배추를 뽑고, 참깨와 고추를 말리던 삶. 대지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서계동에서, 이 11필지의 밭은 마을 사람들의 끼니를 책임지던 소중한 생계 공간이었다. 작지만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그 밭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 자리가 지금은 무엇으로 덮여 있는지, 문화재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가능하다.
5. 누가 살았나 — 성씨로 보는 마을 구성
김씨
36필지
이씨
34필지
박씨
22필지
1912년 서계동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진 성씨는 김씨로 36필지였다. 이씨가 34필지로 바짝 뒤를 쫓았고, 박씨가 22필지로 세 번째였다. 김·이·박, 조선 시대 이래 이 땅에 깊이 뿌리내려온 세 성씨가 서계동의 절반 가까운 사유지를 나눠 갖고 있었다.
이 숫자가 단순한 통계가 아닌 이유는, 그 안에 마을의 관계망이 있기 때문이다. 김씨와 이씨 집안 사이에 혼인이 있었을 수도 있고, 박씨 어른이 마을 대소사를 이끌던 큰 어른이었을 수도 있다. 서로 이웃하며 살았기에 집안끼리의 사연이 골목 하나하나에 스며 있었을 것이다. 그 사연의 물적 흔적이 지금도 지층 어딘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6. 조용히 들어온 변화, 일본인의 등장

1912년 서계동 토지 기록에는 조선인 성씨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등장한다. 일본인이 서계동 안에 19필지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전체 216필지 중 약 9%다. 숫자만 보면 적어 보이지만, 그 맥락을 알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인의 조선 내 토지 소유는 빠르게 늘어났다. 용산은 특히 일본군 군영이 자리 잡고, 철도 관련 시설이 밀집하면서 일찌감치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간 지역이었다. 서계동의 19필지는 그 흐름 속에서 서계동 마을에 스며든 외부의 힘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역사적 맥락
용산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군사 기지를 설치하며 급격히 변화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관련 시설과 일본인 거주 구역이 확장되면서 용산 일대의 토지 구조가 크게 재편되었다. 서계동의 일본인 소유 19필지는 이 역사적 흐름의 일부다.
그 변화는 서계동 골목 사람들의 일상에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이웃집이 하루아침에 낯선 언어를 쓰는 집이 되는 경험. 그 불편함과 낯섦이 당시 서계동 사람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것도 땅이 기억하고 있을 수 있다.
7. 서계동이 주는 오늘날의 시사점

지금 서계동은 재개발 바람 한가운데 있다. 낡은 주거지를 철거하고 새 아파트를 짓는 계획이 오랜 시간 논의되어왔다. 그런데 그 땅을 파기 전에 한 번쯤 멈춰 서야 할 이유가 있다. 1912년의 기록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205필지의 집터 아래에는 113년간 쌓인 생활의 층위가 있다. 김씨 집안이 쓰던 식기, 이씨 어른의 온돌 구조, 박씨 가문이 심었던 나무의 뿌리 흔적. 이것들이 단순한 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곧 이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도시 재개발과 문화유산 보존은 대립 관계가 아니다. 제대로 된 지표조사 한 번이 그 둘을 조화롭게 이어줄 수 있다.
8. 문화재 지표조사 — 골목의 기억을 꺼내는 방법

서계동처럼 대지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역사적 사건이 켜켜이 쌓인 지역일수록 문화재 지표조사의 중요성은 커진다. 지표조사는 개발 이전에 해당 부지의 역사적·고고학적 가치를 사전에 확인하는 절차다. 집터, 골목, 밭이 있던 자리 어디서든 조선시대 생활 유물이나 근대 역사 유산이 나올 수 있다.
특히 서계동처럼 일제강점기 기록이 분명히 남아 있는 지역은, 근대 문화유산의 관점에서도 조사 가치가 높다. 일본인 소유 19필지가 있었던 자리에 어떤 구조물이 있었는지, 그것이 지금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역사 작업이다.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seoulheritage.org)에서는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 전역의 지역 조사 기록과 발굴 의뢰 절차를 안내하고 있다.
지표조사 →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 발굴조사. 재개발 예정지나 건축 계획 부지는 사전에 조사 의무 여부 확인 필수. 국가유산청 협업포털(e-minwon.go.kr) 또는 seoulheritage.org에서 의뢰 가능.
9. 역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서계동의 이야기는 오래된 통계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숫자 하나하나 뒤에 실제 사람이 있었다. 김씨 집안의 큰아들, 이씨 어르신의 딸, 박씨 가문의 막내. 그들이 웃고 울던 골목이 지금도 서계동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이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유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지금 이 도시의 방향을 결정하는 모든 행위, 재개발 계획, 도로 공사, 공원 조성. 이것들이 과거의 층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더 책임 있는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는 그 동네는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가. 그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역사는 다시 살아난다.
문화재 지표조사 · 시굴조사 · 발굴조사 의뢰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국가유산청 협업포털 → e-minwon.go.kr
소규모 국비 지원 발굴 → 한국문화재재단 연계
용산구 관할 문화재 문의 → 용산구청 문화관광과
"1912년 서계동 골목,김씨 어른의 손때가 밴 그 나무 문짝은 어디로 갔을까.땅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우리가 물어봐야 대답한다."
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국가유산청 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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