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서대문구 홍은동 토지와 삶의 기록: 그때 그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2025년 8월 26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6일 전
문화재 발굴 · 지표조사 ·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역사
서대문 홍은동, 390필지가 품은 1912년의 농촌논·밭·사찰·무덤이 말하는 문화재 지표조사의 모든 것
서대문구 홍은동 · 390필지 · 535,354㎡ · 문화재 발굴조사의 현장
출처: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 문화재 지표조사 기초자료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당신이 오늘 걷는 홍은동 골목에는 벼가 자라고 사찰의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서대문구 홍은동. 지금은 빌라와 아파트가 빼곡한 주거지이지만, 1912년 이 땅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390필지, 535,354㎡.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여느 마을보다 넓은 이 땅에 논과 밭이 물결치고, 사찰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었으며, 이씨 가문이 140필지로 마을의 중심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그림자도 4필지를 통해 이미 이 농촌 마을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당신이 매일 지나치는 홍은동의 골목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할 겁니다.
목차
1912년 홍은동의 풍경과 의미 — 535,354㎡의 농촌 세계
논과 밭 — 삶의 터전이 된 457,522㎡의 경작지
대지와 가옥 — 93필지가 이룬 마을의 중심
분묘지와 사사지 — 죽음과 신앙이 공존하던 공간
산과 잡종지 — 일상 속의 다양한 토지 활용
성씨별 토지 소유 — 이씨 140필지, 마을을 이끈 일곱 가문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 식민지의 그림자가 농촌에 닿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홍은동의 과거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마무리 — 과거의 기록이 현재와 미래에 주는 의미

SECTION 01
1912년 홍은동의 풍경과 의미 — 535,354㎡의 농촌 세계
서대문구 홍은동. 지금은 서울 서북부의 주거 밀집 지역으로 알려진 이 동네가, 1912년에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seoulheritage.org)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홍은동은 총 390필지, 535,354㎡의 광활한 땅이었습니다.
535,354㎡.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어느 마을보다 넓은 면적입니다. 합정동(62만㎡)에 이어 이 시리즈 두 번째 규모입니다. 그 광활한 땅 위에 빽빽한 아파트는커녕 고층 건물 하나 없었습니다. 대신 산자락과 골짜기를 따라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작은 사찰이 마을 한편에 자리 잡고, 이씨·김씨·강씨 가문의 집들이 드문드문 모여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었습니다.
1912년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지 2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식민지 토지조사사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던 이 시기에 홍은동의 땅 기록이 남겨졌고, 그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100년 전 이 마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문화재 발굴 기관들이 이런 역사 자료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390총 필지 수
53.5만㎡총 면적
253밭 필지 수
140이씨 소유 필지
93대지 필지 수
4동척 소유 필지
SECTION 02
논과 밭 — 삶의 터전이 된 457,522㎡의 경작지
1912년 홍은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한 것은 논과 밭이었습니다. 논이 33필지, 168,771㎡, 밭이 253필지, 288,751㎡였습니다. 합산하면 286필지, 457,522㎡로 전체 홍은동 면적의 85%가 넘는 땅이 경작지였습니다.
밭이 논보다 훨씬 많았다는 사실이 홍은동의 지형적 특성을 말해줍니다. 서대문구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홍은동은 물이 고이기 어려운 구릉지 지형이 많아, 물이 덜 필요한 밭농사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콩, 조, 보리, 고추, 감자. 253필지의 밭에서 이 작물들이 계절마다 자라나 홍은동 사람들의 밥상을 채웠습니다.
상상해보세요 — 1912년 홍은동의 가을산자락을 따라 펼쳐진 밭에서 보리와 콩을 거두는 손길이 분주합니다. 33필지의 논에서는 황금빛 벼 이삭이 고개를 숙이고, 마을 사람들이 두레를 이루어 함께 타작을 합니다. 산 중턱 작은 사찰에서 저녁 종소리가 울리면, 하루 일을 마친 농부들이 삼삼오오 집으로 돌아갑니다. 535,354㎡ 위에서 펼쳐지던 이 풍경이 지금 아파트 숲 아래 잠들어 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이 광활한 경작지 기록은 핵심 참고 자료가 됩니다. 논의 수로 흔적과 논둑 구조, 밭의 경계선과 농경 층위가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홍은동처럼 오랜 농경이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다양한 시대의 농업 방식 변화가 토양 층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SECTION 03
대지와 가옥 — 93필지가 이룬 마을의 중심
전체 390필지 중 93필지, 41,798㎡가 대지였습니다. 전체 면적의 약 8%에 불과합니다. 이 낮은 비율이 홍은동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토정동(75%), 원효로4가(95%)와 비교하면 극명한 차이가 드러납니다. 홍은동은 주거 중심지가 아닌, 순수한 농경 마을이었습니다.
93채의 집. 그 하나하나에 가족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넓은 농경지 사이 이곳저곳에 집들이 드문드문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집집마다 불이 켜지던 풍경. 도시의 번잡함과는 거리가 먼, 조용하고 자족적인 농촌 공동체가 바로 홍은동이었습니다.
문화재 발굴 관점에서 93필지의 대지는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주춧돌, 기초석, 우물터, 아궁이 잔재, 생활 도구 파편이 지표 아래에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홍은동처럼 농경지와 주거지가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에서는, 대지 구역의 시굴조사가 집터 유구를 집중적으로 드러낼 수 있습니다.
SECTION 04
분묘지와 사사지 — 죽음과 신앙이 공존하던 공간
홍은동의 390필지 중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신앙의 공간들이 있었습니다. 분묘지 1필지, 393㎡와 사사지 3필지, 2,842㎡가 그것입니다.
분묘지 393㎡는 홍은동 사람들이 조상을 모신 공간이었습니다. 명절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무덤 앞에 모여 제를 올리고, 기일이면 가족들이 찾아와 조상과 교감하던 신성한 터였습니다. 단 1필지라도, 그 안에 담긴 기억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더욱 주목할 것은 사사지 3필지, 2,842㎡입니다. 이는 홍은동에 불교 사찰이나 신앙 공간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3필지라는 것은 단순한 작은 암자가 아니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찰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자락에 자리 잡은 홍은동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면, 이 사사지는 산 중턱이나 산기슭에 위치한 조용한 절이었을 것입니다.
사사지 3필지는 문화재 발굴에서 특히 중요한 조사 대상입니다. 불상 파편, 기와, 청동 제기류, 사찰 건물지 유구가 출토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홍은동의 사사지는 이 시리즈의 다른 마을들과 비교해도 규모가 크고 필지 수가 많아, 조사 가치가 높은 지점으로 평가됩니다. 분묘지와 사사지가 인접해 있었을 경우, 두 지점의 복합 발굴은 당시 홍은동의 신앙 생활과 장례 문화를 동시에 복원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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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05
산과 잡종지 — 일상 속의 다양한 토지 활용
홍은동 기록에는 산 3필지, 9,133㎡와 잡종지 4필지, 23,662㎡도 있었습니다. 이 필지들이 당시 홍은동 사람들의 일상을 보완하는 공간들이었습니다.
산 3필지, 9,133㎡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 자원 창고였습니다. 겨울을 대비해 땔감을 구하러 오르고, 나물을 캐고, 버섯을 따던 곳. 홍은동이 산자락에 위치한 만큼, 이 임야는 마을과 자연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도 했습니다. 홍수를 막고, 마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어 주던 생태적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잡종지 4필지, 23,662㎡는 주목할 만한 규모입니다. 다른 마을들의 잡종지와 비교해도 면적이 넓습니다. 이 잡종지는 도로와 하천 주변 부지, 혹은 특별한 용도가 없이 남겨진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던 넓은 공터이거나, 여러 목적으로 유연하게 활용되던 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SECTION 06
성씨별 토지 소유 — 이씨 140필지, 마을을 이끈 일곱 가문
1912년 홍은동의 토지 기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씨 가문의 압도적인 존재감입니다. 이씨가 무려 140필지를 소유하며 마을 전체의 토지 소유 구조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씨140필지압도적 1위
김씨41필지두 번째
강씨36필지세 번째
정씨27필지네 번째
박씨22필지다섯 번째
홍씨16필지여섯 번째
한씨12필지일곱 번째
이씨 140필지는 이 시리즈에서도 단연 특별합니다. 창전동의 김씨 98필지, 이촌동의 김씨 64필지를 모두 뛰어넘는 수치입니다. 전체 390필지의 36%를 한 가문이 차지했다는 것은 이씨 가문이 홍은동에서 얼마나 오랜 기간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을 공동 행사, 제사, 두레와 같은 공동체 활동에서 이씨 가문의 목소리는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홍씨 16필지도 눈길을 끕니다. 홍은동(弘恩洞)이라는 지명에 홍(弘) 자가 들어간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이 홍씨 가문과 연관이 있는지. 그것은 더 깊은 역사 연구가 필요한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이씨 140필지의 분포를 추적하면 홍은동의 옛 마을 구조를 가장 정밀하게 복원할 수 있습니다. 논 33필지와 밭 253필지 중 이씨 가문이 어느 구역의 땅을 주로 보유했는지를 파악하면,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어느 구역을 먼저 살펴야 하는지가 결정됩니다. 토지 기록과 성씨 분포가 맞물리는 순간, 지표조사의 정밀도는 크게 높아집니다.
SECTION 07
국유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 식민지의 그림자가 농촌에 닿다
홍은동의 390필지 기록에서 가장 무거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국유지 9필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 4필지. 이 두 종류의 필지들이 1912년 홍은동에 식민지 권력이 어떻게 침투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맥락 —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홍은동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조선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설립한 대표적인 식민지 기관이었습니다. 서울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서대문구 농촌 마을 홍은동에도 동척의 손길이 미쳤다는 사실은, 식민지 경제 착취가 얼마나 촘촘하고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씨 가문 중심의 자족적 농촌 공동체에 국유지 9필지와 동척 4필지가 자리 잡았다는 것은, 이 평화로운 마을 위에도 식민지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국유지 9필지는 관청 관련 시설, 도로, 하천 주변 부지 등으로 쓰였을 것입니다. 동척 소유 4필지는 수익을 위한 농경지이거나 이후 개발을 위해 확보해둔 땅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13필지의 땅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씨와 김씨, 강씨 가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이야기를 복원하는 것도 문화재 발굴조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SECTION 08
문화재 지표조사와 연결되는 홍은동의 과거
1912년 홍은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진행하는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발굴조사와 직접적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홍은동은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 다른 마을들과 달리 순수 농경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이는 농경 문화재가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분묘지 1필지와 사사지 3필지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구역들에서는 토기 조각, 기와, 제기류, 불교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사사지의 경우 건물지 유구가 잔존할 수 있고, 분묘지에서는 매장 문화재가 발견될 수 있습니다.
홍은동처럼 광활한 농경지를 가진 지역에서는 문화재 조사가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특히 이씨 가문의 140필지가 분포된 구역을 중심으로, 사찰 터와 분묘지 주변을 우선 살피는 전략이 효과적입니다. 1912년 토지 기록은 이 모든 단계의 첫 번째 나침반입니다.
서대문구는 재개발이 꾸준히 이루어지는 지역입니다. 홍은동의 구릉지에 새로운 건축 공사가 시작될 때마다, 253필지의 밭 아래 농경 층위와 93필지 대지의 집터 유구, 그리고 사사지의 불교 유물이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문화재 지표조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SECTION 09
성공 사례 — 발굴이 되살린 서울의 기억들
홍은동의 가능성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입니다.
성공 사례 01 — 서울 아파트 개발 부지에서 조선 후기 무덤군 발견
최근 서울 내 아파트 개발 현장에서 지표조사를 진행했을 때, 조선 후기의 무덤군과 생활 유구가 발견된 사례가 있었습니다. 당시 조사 기록과 발굴 결과를 비교해보니 옛 문헌과 토지대장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홍은동의 분묘지 기록은 이와 정확히 동일한 조건입니다. 지표조사 없이 개발이 진행된다면, 그 무덤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성공 사례 02 — 인사동 금속활자, 지표조사가 역사를 살리다
종로구 인사동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발굴에서 조선 전기 16세기 층의 금속활자, 일성정시의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홍은동의 사사지 3필지도 이와 유사하게, 지표조사가 선행된다면 불교 관련 귀중한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성공 사례 03 — 서울 구릉지 농경 유적 발굴과 층위 분석
서울 서북부 구릉지에서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농경 층위가 연속으로 확인된 사례가 있습니다. 밭의 경계선, 수로 흔적, 다양한 작물의 씨앗 탄화물이 출토되어 당시 농업 방식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홍은동처럼 구릉지 농경이 중심인 지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발굴 성과입니다.

SECTION 10
마무리 — 과거의 기록이 현재와 미래에 주는 의미
1912년 홍은동의 토지 기록은 단순히 과거의 문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서울 문화재 발굴의 지도를 미리 보여주는 길잡이 같은 존재입니다.
253필지의 밭에서 자라던 곡식, 33필지의 논에서 찰랑이던 물, 93필지의 집터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리고 사사지에서 울려 퍼지던 종소리. 이씨 140필지의 기름진 땅과 동척 4필지의 어두운 그림자. 이 모든 것이 홍은동이라는 땅의 진짜 얼굴입니다.
지금 우리가 홍은동 골목에서 마주치는 빌라와 아파트 사이에도, 그 옛날 땅의 기억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지켜내는 것이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의 이유입니다. 390필지의 기억이 지금 당신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390필지의 기억이 지금당신의 발 아래에서 기다린다"
이씨 가문의 140필지, 사찰의 종소리가 울리던 사사지 3필지, 단 1필지 분묘지에 잠든 이름 모를 조상들. 253필지의 밭에서 고개 숙인 곡식들. 그 모든 것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골목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동척의 4필지가 드리우던 그림자보다 더 오래, 이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기억을 땅속에서 꺼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의 사명입니다.
관심을 갖는 것, 기록을 읽는 것, 개발 전에 조사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홍은동의 390필지는 오늘도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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