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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마포구 상암동의 시간 속 풍경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025년 7월 4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2일



문화재발굴 · 지표조사 · 마포구 역사

월드컵경기장 아래1912년의 논과 밭이 잠들어 있다

마포구 상암동 477필지 토지대장으로 읽는 문화재 발굴의 모든 것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상암동 지표조사 심층 리포트



목 차

  • 01지금은 상암, 그때는 어떤 마을이었을까

  • 02논밭과 대지, 잊혀진 풍경 속으로 — 477필지의 땅 구성

  • 03성씨로 보는 상암동의 땅 주인들 — 이씨 142필지의 비밀

  • 04동양척식주식회사 8필지 — 이 땅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

  • 05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 — 땅속에 묻힌 이야기

  • 06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로 제대로 알기

  • 07성공 사례 — 기와 조각 하나가 마을 형성사를 다시 썼다

  • 08마무리 — 우리 주변 땅에도 이야기가 있다


지금 상암동 하늘을 수놓는디지털미디어시티의 LED 빛 아래,110년 전 누군가는 벼를 심고조상의 무덤 앞에서 절을 올렸습니다.그 기억이, 지금도 그 땅 아래 있어요.

상암동. MBC 사옥, 월드컵경기장, 스타트업 사무실, 한강공원. 지금의 상암동은 서울에서 가장 현대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동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세련된 풍경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 이 땅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논이 넘실거리고, 밭이 계절마다 색을 바꾸고, 이씨와 김씨와 권씨의 집이 옹기종기 들어선 농촌 마을이었죠.

1912년 마포구 상암동의 토지대장. 477필지, 970,146㎡. 이 숫자 안에 당시 상암동 사람들의 삶 전체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기록을 하나씩 꺼내어, 문화재 발굴과 지표조사가 왜 이 첨단 도시 한복판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으면 상암동이 전혀 다르게 보일 거예요.


01

지금은 상암, 그때는 어떤 마을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2년. 지하철 6호선이 없고, 경의중앙선이 없으며, 월드컵대교도 없던 시절입니다. 한강 가까이 자리한 상암동은 그 지리적 이점을 살려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동네였습니다. 지금 월드컵공원 자리, 하늘공원 자리, MBC 사옥 자리, 그 모든 곳에 벼가 자라고 채소밭이 있었습니다.

총 477필지, 970,146㎡. 97만 제곱미터가 넘는 이 광활한 땅은 지금의 상암동 전체 면적에 버금가는 규모입니다. 그리고 그 땅 위에 논이 있고, 밭이 있고, 집이 있고, 무덤이 있었습니다. 농촌과 마을과 삶과 죽음이 모두 이 497만 제곱미터 안에 공존하고 있었죠.

1912년 상암동

논·밭·집터·분묘가 어우러진 한강변 농촌 마을. 이씨·김씨·권씨 가문이 땅을 나눠 살던 조용한 공동체.

2025년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월드컵경기장, MBC 사옥. 서울에서 가장 현대적인 미디어·문화 거점.

이 극적인 변화 속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1912년의 상암동은 지금 어디로 갔을까요?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깔리면서 지표면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땅 아래 일정 깊이에는 그 시절의 이야기가 아직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역할입니다.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은 서울 25개 구 전체의 1912년 전후 토지 기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상암동처럼 논·밭·분묘가 복합적으로 존재했던 대규모 농경 지역은 문화재 발굴 잠재성이 특히 높은 지역으로 평가됩니다.




02

논밭과 대지, 잊혀진 풍경 속으로 — 477필지의 땅 구성

477필지라는 숫자 안에 어떤 땅들이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1912년 상암동의 생활 방식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912년 상암동 토지 구성

🌾

186필지 · 583,764㎡

🌿

223필지 · 316,986㎡

🏡

집터(대지)

63필지 · 44,228㎡

🌫

잡종지

4필지 · 25,044㎡

🪦

분묘

1필지 · 122㎡

논이 186필지, 583,764㎡로 전체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합니다. 한강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이 논농사를 가능하게 했겠죠. 가을이면 58만 제곱미터의 황금빛 들판이 펼쳐졌을 겁니다. 그 옆으로는 223필지 316,986㎡의 밭이 이어졌어요. 필지 수만 보면 논보다 밭이 더 많습니다. 채소와 잡곡이 다양하게 재배됐을 거예요.

집터인 대지는 63필지 44,228㎡. 논과 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이지만, 이 63필지 위에서 상암동 공동체의 일상이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잡종지 4필지 25,044㎡는 용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경계의 땅이었는데, 이런 잡종지에서 종종 흥미로운 구조물이나 유물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분묘 1필지 122㎡입니다. 면적은 작지만 존재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 마을에 무덤이 있었다는 건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에서 삶이 이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부장품, 비석, 제례 흔적 같은 유물이 이 필지 주변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닙니다. 논 한 필지, 밭 한 필지, 분묘 한 필지. 모두 그 위에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이 깃든 땅의 초상입니다.



03

성씨로 보는 상암동의 땅 주인들 — 이씨 142필지의 비밀

477필지의 상암동 땅. 그 위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토지대장의 성씨별 소유 현황을 들여다보면 1912년 상암동의 사회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성씨

보유 필지 수

순위 및 특기

이씨(李氏)

142 필지

1위 · 압도적 최다

김씨(金氏)

60 필지

2위

권씨(權氏)

56 필지

3위

황씨(黃氏)

44 필지

4위

박씨(朴氏)

35 필지

5위

최씨(崔氏)

29 필지

6위

오씨(吳氏)

18 필지

7위

장씨(張氏)

13 필지

8위

문씨·조씨(文·趙氏)

각 12 필지

9위 공동

강씨(姜氏)

11 필지

11위

동양척식주식회사

8 필지

일제 식민지 수탈 기관

기타 성씨

나머지

다양한 가문 공존

이씨 142필지. 이건 단순히 "이씨가 땅이 많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477필지 중 142필지, 즉 전체의 약 30%를 이씨 한 성씨가 소유했다는 건 이 가문이 오랜 세월 이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집성촌적 성격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상암동 이씨 가문의 선대 묘역, 종택, 제사 공간 같은 것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위 김씨 60필지, 3위 권씨 56필지. 권씨가 상위권에 오르는 건 서울 지역 토지대장에서 비교적 드문 패턴입니다. 상암동에서 권씨가 56필지를 차지했다는 건, 이 가문이 이 지역에서 특별한 역사적 연고를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황씨 44필지, 박씨 35필지, 최씨 29필지, 오씨 18필지, 장씨 13필지, 문씨·조씨 각 12필지, 강씨 11필지까지 다양한 가문이 고르게 분포해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성씨가 공존했다는 건 상암동이 단순한 단일 집성촌이 아닌 복합 공동체였음을 의미합니다. 각 가문의 다양한 생활 양식, 다른 제례 방식, 가문별 특색 있는 건축 구조가 같은 층위에서 함께 발견될 수 있어요. 이런 다양성은 문화재 발굴 조사에서 더욱 풍부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04

동양척식주식회사 8필지 — 이 땅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

성씨별 소유 목록 맨 아래에 조용히 자리 잡은 이름 하나. 동양척식주식회사. 8필지. 숫자는 작지만 무게는 다릅니다.

1908년 일제가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조선 전역에서 토지를 수탈하는 핵심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농민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이거나 법적 분쟁을 이용해 강취하고, 그 땅을 일본인 이주민에게 불하했습니다. 상암동에서도 그 손길이 8필지에 뻗쳐 있었어요.

그 8필지가 원래 누구의 땅이었는지, 어떤 과정으로 동척 소유가 됐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씨 142필지, 김씨 60필지, 권씨 56필지를 거느렸던 이 마을 어딘가에서 8필지의 땅이 강제로 빼앗겼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급하게 이주한 가족들이 남긴 흔적이 지금도 그 땅 아래 있을 수 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지였다는 사실은 문화재 지표조사 시 중요한 역사적 맥락으로 고려됩니다. 수탈과 강제 이주 과정에서 방치된 생활 유구, 의도적으로 숨겨둔 가보나 문서, 급하게 떠나면서 남긴 유물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암동의 디지털미디어시티가 빛나는 LED 간판을 밝히는 그 자리, 그 땅 아래 어딘가에는 100년 전 억울하게 땅을 잃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을지 모릅니다. 문화재 발굴이 역사 복원이자 역사적 정의 회복과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05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중요성 — 땅속에 묻힌 이야기

돌 하나, 기와 조각 하나, 토기 파편 하나. 이것들이 단순한 흙더미 속 잡동사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이 작은 파편 하나가 그 땅 위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 전체를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1912년 상암동의 이씨 가문은 142필지 위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논에서 벼를 키우고,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집에서 가족을 돌봤겠죠. 그 일상의 흔적들 — 부서진 밥그릇, 녹슨 낫, 화덕 재, 마당 돌, 우물 구조물 — 이 지금 상암동 어딘가의 흙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상암동처럼 논과 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던 지역은 농업 관련 유구의 발굴 가능성이 높습니다. 논두렁 구조, 수리 시설 흔적, 씨앗 저장 도기, 농기구 매장 등이 그 예입니다. 또한 63필지의 집터 아래에는 조선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생활 유적이 중첩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땅속에 묻힌 작은 문서 조각 하나, 조선식 기와 파편 하나가 1912년의 사람들을 일깨웁니다. 그 발견들이 상암동을 단순한 '공간'이 아닌 '사람들의 삶터'로 복원하는 힘을 가집니다.


06

지표조사·시굴조사·발굴조사, 단계별로 제대로 알기

서울에서 문화유산 조사를 의뢰하거나 개발 사업을 앞두고 있다면, 이 네 가지 단계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각 단계의 목적과 순서를 이해하면 사업 일정 계획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1

지표조사 — 땅의 역사를 먼저 읽는다

문헌, 고지도, 지적도, 항공사진을 분석해 문화재 존재 가능성을 판단합니다. 상암동처럼 1912년 기록에 논·밭·분묘가 모두 확인되는 지역은 지표조사에서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현장 육안 조사도 병행하며, 모든 발굴 절차의 첫 번째 문입니다.

2

표본조사 — 예비 확인으로 방향을 잡는다

소규모 부지이거나 시굴 전 방향 설정이 필요할 때 진행합니다. 지표조사 결과를 검증하고 시굴조사의 위치와 깊이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합니다. 전문 기관에 "표본조사부터 시작해보자"고 의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첫 단계입니다.

3

시굴조사 — 실제로 파서 확인한다

격자 형태로 선정된 구역을 직접 굴착해 지하 문화재 층위를 확인합니다. 상암동의 논 186필지 아래 수리 시설 흔적, 밭 223필지 아래 농기구·토기 같은 유물 가능성이 시굴로 확인될 수 있습니다.

4

발굴조사 — 역사를 온전히 세상으로 꺼낸다

시굴에서 문화재가 확인된 구역을 전면 발굴합니다. 가장 긴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귀중한 정보를 얻는 최종 단계입니다. 결과에 따라 보존 조치 또는 기록 완료 후 공사 재개가 결정됩니다.

특히 상암동처럼 대규모 농경 지역이었던 곳에서 개발 사업을 진행할 때, 표본조사를 첫 번째 단계로 선택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입니다. 당신이 몰랐던 '내 땅의 역사'가 표본조사 하나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거든요.




07

성공 사례 — 기와 조각 하나가 마을 형성사를 다시 썼다

실제 발굴 성공 사례

홍대 인근 한 공사 현장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조선시대 말 기와 조각과 생활 유물 다수가 발견됐습니다. 이 발견은 단순한 유물 수집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현지 주민과 역사학자가 함께 발굴 과정에 참여하고, 해석과 전시까지 협력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어요. 그 결과 지자체의 문화재 보존 정책 강화로 이어졌고, 그 지역의 마을 형성사가 새롭게 쓰였습니다. 단순 발굴을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 회복으로 확장된 가장 모범적인 사례입니다.

이 사례에서 핵심은 발굴 결과를 지역 공동체와 함께 나눴다는 점입니다. 조사 결과를 전문가들끼리만 공유하는 게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함께 역사를 발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물은 박물관 수장고 속 번호표가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상암동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142필지의 이씨 가문 후손이 지금 어딘가에 살고 있을 수 있어요. 권씨 가문, 황씨 가문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어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발굴 조사가 그 기억들을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어요. 그게 문화재 발굴이 단순한 땅 파기가 아닌 이유입니다.

이제 상암동은 디지털미디어시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이름 아래에, 조용히 논을 갈고 밭을 일구던 이씨와 김씨와 권씨의 이야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 세상에 보여주는 것, 그게 문화재 발굴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08

마무리 — 우리 주변 땅에도 이야기가 있다

1912년의 상암동 토지대장을 다시 펼쳐봅니다. 477필지, 970,146㎡. 186필지의 논, 223필지의 밭, 63필지의 집터, 그리고 1필지의 분묘. 이씨 142필지, 김씨 60필지, 권씨 56필지, 황씨 44필지, 그리고 이름 없이 지나가는 수십 개의 다른 성씨들.

그 땅 위에서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봄이면 논에 모를 심고, 가을이면 벼를 베고, 겨울이면 분묘 앞에서 조상을 기억했습니다. 그 모든 삶의 흔적이 지금 이 순간, 월드컵경기장과 MBC 사옥과 스타트업 빌딩 아래 조용히 잠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집 앞마당, 동네 공터, 재건축을 앞둔 낡은 건물 자리. 그 조그마한 땅이라도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통해 한 사람의 역사, 한 가족의 이야기가 새롭게 깨어날 수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만큼 두껍고 오래된 역사 위에 세워진 곳이거든요.

지금 서울에서 문화유산 조사, 시굴조사, 지표조사 또는 발굴조사를 의뢰하고 싶다면 서울문화유산(seoulheritage.org)을 찾아보세요. 상암동처럼 숨은 이야기가 깃든 장소를 놓치지 않도록, 표본조사부터 시작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논물에 반사되던 노을빛,


밭두렁에 쪼그려 앉아 김을 매던 손,


분묘 앞 절하는 아이의 작은 등.



상암동의 땅은 그 모든 기억을


110년 동안 혼자 간직했습니다.



디지털 빛이 하늘을 수놓는 지금,


그 기억은 여전히 땅 아래 살아 있습니다.



삽 한 번, 붓 한 번이


그 잠든 이야기를 세상으로 불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움직여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상암동을 지나게 된다면,잠깐 발을 멈추고 그 땅을 느껴보세요.110년 전 이씨 가문의 논이 있던 그 자리,지금도 그 기억이 거기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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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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