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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서울의 시간, 1912년 종로구 내수동을 들여다보다

  • 2025년 8월 8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1일

빌딩 숲 아래, 1912년 내수동 김씨의 64필지가 잠들어 있다


249필지 中 김씨 혼자 64필지. 일본인 8필지가 이미 들어와 있던 종로 한복판. 청동기 유물까지 나온 서울 땅 아래의 시간 — 문화재 지표조사가 꺼내는 내수동의 기억


목차

1. 잊혀진 서울의 시간, 1912년 내수동을 들여다보다

2. 249필지 61,801㎡, 땅의 숫자에 담긴 이야기

3. 김씨 64필지 — 내수동 권력 구조의 정점

4. 이씨·박씨·최씨가 이루던 균형

5. 일본인 8필지 — 종로 한복판까지 파고든 그림자

6. 문화재 지표조사, 내수동에서 시작되는 이유

7. 청동기 유물까지 — 서울 발굴 성공 사례

8. 도시개발과 문화유산, 우리의 선택

9. 발굴조사 의뢰, 어떻게 시작하나

10. 마무리 — 기억 위에 서 있는 도시


지금의 내수동을 걷는다면 빌딩과 도로가 전부처럼 보인다. 그런데 딱 그 자리, 1912년에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있었다. 249필지의 기와집과 골목길, 그리고 그 안에서 김씨 가문 혼자 64필지를 들고 있었다. 종로구 전체 동네들을 살펴오면서 지금까지 본 단일 성씨 최대 필지 수다.

그리고 그 마을에 이미 일본인 8필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차 소리와 기와지붕이 가득하던 골목 한켠에서 식민지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문화재 지표조사의 시각으로 꺼내본다.



1. 잊혀진 서울의 시간, 1912년 내수동을 들여다보다

1912년 종로구 내수동. 지금은 정부 기관과 빌딩이 밀집한 도심의 한가운데지만, 그 시절에는 마차와 인력거가 골목을 오가고 장독대마다 계절의 냄새가 배어 나오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한 평 한 평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그 위에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어지던 공간이었다.

이 동네의 1912년 기록을 펼쳐보면 단순한 숫자 이상의 것이 보인다. 토지 소유자의 이름이 곧 마을의 권력 지도였고, 국유지와 법인 소유지의 등장이 근대화의 물결이었으며, 일본인 소유지의 확대가 시대의 그림자였다.


2. 249필지 61,801㎡, 땅의 숫자에 담긴 이야기

1912년 내수동은 249필지 대지(61,801㎡), 1필지 밭(383㎡), 그리고 국유지 4필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 규모로 보면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 중 상당히 큰 편이다.

249필지

대지 필지 수

61,801㎡

대지 총면적

4필지

국유지

1필지

383㎡ — 도심 속 마지막 농경 흔적

일본인 소유

8필지

지금까지 살펴본 동네 중 최다

밭 1필지(383㎡)는 의미심장하다. 249필지의 대지에 비해 극히 작은 규모지만, 종로 중심부에 그나마 하나의 농경지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 내수동이 완전한 도심형 동네로 전환되는 마지막 과도기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3. 김씨 64필지 — 내수동 권력 구조의 정점

내수동에서 가장 강렬한 숫자가 여기 있다. 김씨 64필지. 249필지의 약 26%다.

26%

1912년 내수동 대지 249필지 중 김씨가 차지한 비율.


4필지 중 1필지가 김씨 소유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종로구 동네들 중 단일 성씨 최대 필지 수다. 64필지. 이 숫자는 단순히 가장 많은 집을 가졌다는 게 아니다. 마을의 방향을 결정하고, 골목의 경계를 정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언권을 가졌다는 뜻이다. 내수동의 김씨 가문은 이 동네에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반을 갖고 있었다.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이 64필지 구역은 가장 우선적인 조사 대상이 된다. 여러 세대가 같은 자리에서 삶을 이어온 가문의 집터는 유물 층위가 가장 두껍게 쌓여 있기 때문이다. 내수동 김씨의 흔적이 땅 아래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가 이 동네 발굴의 가장 큰 기대치다.



4. 이씨·박씨·최씨가 이루던 균형

김씨의 압도적인 64필지 뒤로, 이씨 32필지, 박씨 16필지, 최씨 12필지가 따랐다.

김씨

64필지

이씨

32필지

박씨

16필지

최씨

12필지

김씨와 이씨를 합산하면 96필지로 전체의 39%다. 이 두 성씨가 내수동의 중심축이었고, 박씨와 최씨가 그 옆에서 균형을 잡았다. 다른 종로구 동네들과 비교하면 이씨가 2위를 유지하면서도 김씨와의 격차가 꽤 크다는 점이 내수동의 특징이다. 김씨 한 가문의 압도적 우위 아래서 다른 성씨들이 각자의 자리를 지키던 구조였다.


5. 일본인 8필지 — 종로 한복판까지 파고든 그림자

내수동에서 가장 불편한 숫자가 여기 있다. 일본인 8필지.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들 중 가장 많은 일본인 소유 필지다. 당주동(4필지), 누하동(3필지), 누상동(3필지)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일본인 8필지는 강제 병합 2년차인 1912년 기록이다. 이 숫자가 다른 종로구 동네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내수동이 일본의 서울 도심 침투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일찍, 그리고 집중적인 대상이 됐음을 보여준다. 행정 중심지와 가까운 위치가 일본인들의 선호도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8필지의 주인들이 어떤 경로로 이 땅을 소유하게 됐는지, 어떤 목적으로 활용했는지를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당시 서울 도심의 권력 구조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문화재 발굴 시 이 8필지 구역에서 일본식 유물과 조선식 유물이 같은 지층에서 발견된다면, 그것은 내수동 역사의 가장 복잡한 층위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가 된다.



6. 문화재 지표조사, 내수동에서 시작되는 이유

1912년 내수동의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발굴조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그 땅이 긴 시간 어떤 기억을 품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지표조사의 첫 번째 단계다. 김씨 64필지가 어느 위치에 집중됐는지, 일본인 8필지가 어느 구역에 분포했는지를 알면 발굴 지점을 훨씬 정확하게 선정할 수 있다.

토지대장 분석지표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정밀발굴

지금의 내수동은 빌딩 숲이지만, 그 아래에는 오래된 기초석, 담장, 기와 파편이 잠들어 있을 수 있다. 지표조사에서 단서가 포착되면 시굴조사·표본조사로 이어지고, 본격 발굴조사를 통해 숨은 이야기들이 세상에 드러난다. seoulheritage.org는 내수동을 포함한 서울 25개 구 전역의 역사 토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아카이브해 이 과정을 지원하고 있다.


7. 청동기 유물까지 — 서울 발굴 성공 사례

서울 한강변에서 지표조사 후 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청동기 시대 유물이 발굴된 사례가 있다. 서울 도심 개발 예정지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온다는 것이 믿기지 않겠지만, 이것이 서울의 실제 모습이다. 서울은 수천 년간 사람들이 살아온 공간이고, 그 모든 시간의 흔적이 지금도 땅 아래에 층층이 쌓여 있다.

이 발굴 성과는 단순한 유물 발견에 그치지 않았다. 도심 깊숙이 자리한 과거의 마을이 복원됐고, 그 결과가 도시 재생의 방향 자체를 바꿨다. 내수동도 같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 김씨 가문의 64필지 아래, 혹은 일본인 소유 8필지 구역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는 조사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청동기 유물 발굴 사례처럼 지표조사의 작은 씨앗이 도시 재생 방향 전체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문화재 조사는 규제가 아니라 도시의 미래를 더 깊이 설계하는 도구다.



8. 도시개발과 문화유산, 우리의 선택

도시가 발전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발전의 속도가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그 도시는 뿌리 없이 높아지는 건물처럼 위태롭다. 내수동의 1912년 기록이 지금 우리에게 묻는다. 속도만을 쫓을 것인가, 기억과 함께 갈 것인가.

속도만 쫓는 도시

김씨 가문의 기와집 위에 빌딩이 올라선다. 64필지의 기억이 콘크리트 아래 영원히 묻힌다.

기억과 조화된 도시

지표조사가 먼저 묻는다.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 답 위에서 더 단단한 도시가 세워진다.

이 선택이 내수동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서울 어디서든 재개발이나 건축을 계획 중이라면, 그 땅에 먼저 물어보는 과정이 지표조사다.


9. 발굴조사 의뢰, 어떻게 시작하나

문화재 지표조사나 발굴조사를 의뢰하려면 국가유산청 허가를 받은 전문 조사기관을 통해 정식 절차를 밟으면 된다. seoulheritage.org에서는 서울 지역 문화유산 발굴조사에 특화된 전문적인 지원이 이루어진다.

의뢰 전에는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발굴조사의 단계별 차이를 이해하고, 조사 목적과 대상지를 명확히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발사업자, 건축주, 지방자치단체, 일반 시민 누구든 의뢰가 가능하다. 특히 종로구처럼 역사 밀집 지역은 일정 규모 이상의 개발 사업 시 지표조사가 법적 의무다.

종로구 내수동처럼 역사적 밀집 지역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전 조사 없이 진행되는 공사는 법적 리스크와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10. 마무리 — 기억 위에 서 있는 도시

오늘 내수동 어딘가를 걷게 된다면, 발아래 땅을 한 번 느껴봐 줬으면 한다. 김씨 가문의 가장 넓은 집터였을 수도 있고, 이씨의 골목 담장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 소유했던 8필지 중 한 귀퉁이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온 수천 년의 기억이 그 바로 아래에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249필지, 61,801㎡. 이 숫자 뒤에는 이름도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하루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을 쓸고, 골목에서 이웃을 만나고, 저녁이면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던 그 사람들. 그 기억이 지금도 이 땅 아래에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꺼내는 일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우리가 오늘 도심 속 땅을 파헤치며 발견하는 기와 조각, 목재 기둥, 백자 파편은 모두 이 오래된 토지 기록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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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 숲 아래, 김씨의 64필지와 청동기의 기억이 함께 잠들어 있다

249필지, 61,801㎡. 지금까지 살펴본 종로구 동네 중 단일 성씨 최다 64필지의 김씨 가문. 그리고 역시 가장 많은 일본인 8필지. 청동기 유물까지 나오는 서울 땅 아래의 시간이 지금도 내수동에 잠들어 있다. 문화재 발굴은 그 기억을 꺼내어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약속이다.



내수동 종로 인근에서 건축이나 재개발을 준비 중이라면 지표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도움이 됐다면 주변에 공유해줘.

지표조사 의뢰 방법 알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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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 https://www.seoulherita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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