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한복판, 1912년 중구 남학동의 비밀
- 2025년 7월 21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22일
서울 문화유산 발굴조사
1912년 남학동,조선인의 이름이 사라진 땅— 문화재 지표조사가 밝히는서울의 숨겨진 진실
seoulheritage.org 자료 기반 · 서울 중구 남학동 토지 실증 분석
지금 당신이 걷는 서울 도심 그 땅 아래,
누군가의 이름이 지워진 채 묻혀 있다.
당신은 그 위에 서 있다.
목차
서울 도심 한복판, 사라진 동네의 실체
1912년 남학동의 토지 통계 — 숫자가 말하는 충격
25필지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 조선인 소유주의 부재
국유지 2필지가 숨기고 있는 것
일본인 23필지, 식민지 서울의 민낯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땅이 기억하는 방식
성공 사례 — 발굴조사가 되살린 서울의 이름들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
25총 필지 수
15,312㎡총 면적
0명조선인 소유주
23필지일본인 소유
2필지국유지 (사실상 일제 소유)
100%조선인 배제율

1. 서울 도심 한복판, 사라진 동네의 실체
남산 기슭을 따라 걷다 보면 지금은 어디에도 표지판 하나 서 있지 않은 동네가 있다. 바로 서울 중구 남학동이다. 현재의 지도 위에서는 거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1912년 이 자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삶의 공간이었고, 그 안에는 누군가의 땅이, 집이, 그리고 하루하루의 시간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땅의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힘이 그 도시를 설계했는지를 직면하게 된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분석한 1912년 토지조사부에는 남학동의 모든 필지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오래된 종이 한 장이 말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강렬하다. 이 글에서는 그 기록을 토대로, 지금은 사라진 남학동의 풍경과 그 안에 담긴 역사를 되살려보려 한다.
2. 1912년 남학동의 토지 통계 — 숫자가 말하는 충격
1912년 기준, 서울 중구 남학동의 전체 필지 수는 25필지였다. 총면적은 15,312㎡. 오늘날의 감각으로 환산해보면 소형 아파트 단지 두세 개가 들어설 수 있는 규모다. 그리 넓지 않다. 하지만 이 숫자를 단순히 크기로만 이해하면 안 된다.
중요한 건 그 25필지가 어떻게 분배되어 있었느냐다. 대지, 즉 집이 세워진 토지는 몇 필지였는지, 밭이나 기타 용도의 토지는 또 어떻게 나뉘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소유권이 누구에게 속해 있었는지가 핵심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남학동의 25필지는 주거용 대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일부 잡종지와 도로 부속 토지 등이 혼재했다. 면적 15,312㎡는 당시 남산 인근의 도시 조직 밀도를 감안할 때 상당히 조밀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조밀한 공간에서 25필지가 어떻게 구획되고, 누가 소유했는가를 들여다보는 순간 — 모든 것이 달라진다.

3. 25필지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 조선인 소유주의 부재
남학동 25필지 전체 어디에도, 조선인의 이름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가. 허구처럼 느껴질 수 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동네에서, 조선인이 단 한 필지도 소유하지 못했다니. 하지만 이건 소설이 아니다. 1912년 토지조사부에 실린 엄연한 사실이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에 걸쳐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겉으로는 근대적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인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박탈하고 일본인 및 조선총독부 소유로 이전시키는 과정이었다. 남학동의 사례는 그 결과가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다.
오늘날 서울 중구의 어느 골목을 걷든, 그 땅 아래에는 이런 구조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문화재 발굴기관이 단순히 유물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층위를 읽어내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국유지 2필지가 숨기고 있는 것
25필지 중 23필지가 일본인 소유였다면, 나머지 2필지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었을까. 그 답은 '국유지'다. 얼핏 보면 그나마 국가 소유이니 조선을 위한 토지 아닐까 싶지만, 이 생각은 당장 수정해야 한다.
1912년의 '국가'는 조선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은 이미 1910년에 강제로 소멸되었고, 이 시기의 국유지는 실질적으로 조선총독부, 즉 일본 제국의 재산이었다. 명칭만 국유지였을 뿐, 그 토지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과 관리 권한은 일제의 손에 있었다.
결국 남학동 25필지 전체가, 조선인의 손 바깥에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단순한 토지 통계가 아니라, 식민지 서울의 권력 구조를 그대로 투영한 지도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발굴조사를 통해 하나씩 빛 속으로 나오고 있다. 땅을 파는 행위가 과거를 되살리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5. 일본인 23필지, 식민지 서울의 민낯
23필지. 전체의 92%에 해당하는 이 숫자는 단지 비율이 아니다. 이건 서울 도심 한 동네에서 조선인이 얼마나 철저히 배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당시 남학동 인근은 남산과 가깝고, 조선총독부 관련 시설 및 일본인 거주 구역이 확장되던 방향이었다. 일본인 이주민들은 식민지 지배 체제의 혜택을 받으며 서울 도심의 알짜배기 토지를 빠른 속도로 점유해 나갔다. 남학동은 그 흐름 안에 완전히 편입된 동네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동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땅에서 일상을 보냈을 조선인들은 어디로 밀려났을까. 그들의 삶은 토지대장에 기록조차 되지 않은 채로 사라진 것이다. 역사란 결국 기록된 것들의 이야기다. 기록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찾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은 서울 전역을 대상으로 지역별 토지 현황과 역사적 맥락을 분석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중구, 종로구, 용산구, 마포구 등 서울의 핵심 구역에 대한 기초 역사 데이터를 축적하며, 이를 실제 발굴조사 및 지표조사에 연계하고 있다.
남학동의 사례처럼, 한 동네의 토지 기록이 시대 전체를 들여다보는 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기관의 연구는 반복적으로 증명해왔다.
6. 문화재 지표조사와 시굴조사, 땅이 기억하는 방식
'문화재 지표조사'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우리 일상과 매우 가까운 이야기다. 서울에서 건물을 짓거나 도로를 내거나 재개발을 할 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절차가 바로 문화재 지표조사다.
지표조사는 공사 전에 해당 토지의 역사적 가치와 매장 문화재 가능성을 파악하는 조사다. 문헌 조사와 현장 관찰을 통해 지하에 유물이나 유구가 존재할 가능성을 판단하며, 필요한 경우 시굴조사(트렌치 발굴)나 표본조사, 그리고 전면 발굴조사로 단계적으로 이어진다.

남학동처럼 일제강점기에 급격히 도시 구조가 변형된 지역은 지하에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 시대 건물지, 우물터, 생활 유물 등이 지표 아래 잠자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유산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개발 이전 단계에서 반드시 문화재 발굴기관에 조사를 의뢰해야 한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단순히 법적 절차를 충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기억을 지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공사가 시작된 후에는 되돌릴 수 없다. 한 번 파괴된 유구는 다시 복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7. 성공 사례 — 발굴조사가 되살린 서울의 이름들
성공 사례 01
서울 종로구 재개발 구역, 조선 후기 생활유구 대량 발굴
수년 전, 서울 종로구의 한 재개발 예정 구역에서 착공 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팀이 현장을 살피던 중, 지표 바로 아래에서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자기 파편, 건물 초석이 확인되었다. 즉각 시굴조사로 전환되었고, 결국 전면 발굴조사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해당 구역은 문화재 보존 조치를 받아 지하 전시 공간으로 재설계되었다. 주민들은 아파트 주차장 대신, 조선 시대의 생활 공간 위에 서 있는 살아있는 역사 박물관을 얻게 되었다. 지표조사 하나가 도시 전체의 정체성을 바꾼 사례다.
성공 사례 02
서울 중구 정동 인근 근대 건물지 시굴조사 — 대한제국 유구 확인
서울 중구 정동 일대의 한 공사 부지에서도 문화재 지표조사가 선행되었다. 현장 조사 결과, 이 지역이 대한제국 시기 관련 시설 인근임이 문헌상 확인되었고, 시굴조사를 통해 근대 초기의 벽돌 기초와 우물 구조물이 발견되었다. 단순한 건물 신축이 역사 발굴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 사례는 개발 행위가 역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공존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 발굴기관과 협력하는 것이 결국 더 풍부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길임을 증명한 사례였다.

8.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짓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서울에서 건축이나 개발을 계획하고 있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일정 면적 이상의 토지에서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문화재 지표조사를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이를 생략하거나 임의로 공사를 강행하면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공사 중단과 함께 막대한 비용이 발생한다.
특히 서울 중구, 종로구, 용산구, 마포구와 같은 역사 중심 지역은 지하 유구 존재 가능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높다. 이런 지역에서는 단순 지표조사를 넘어 시굴조사까지 요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조사를 전문 기관에 의뢰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양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은 서울 전역의 문화재 지표조사, 시굴조사, 표본조사, 전면 발굴조사를 전문적으로 수행한다. 서울의 역사 지층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수의 실제 발굴 성과를 통해 그 전문성을 검증받은 기관이다.
개발 전 조사 의뢰는 seoulheritage.org를 통해 가능하며, 발굴조사 비용, 법적 절차, 공사 일정 관련 FAQ도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서 공사나 개발을 앞두고 계신가요?문화재 지표조사, 지금 바로 문의하세요.
9.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
남학동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떠올려보자. 25필지, 15,312㎡, 조선인 소유주 0명. 이 숫자들은 단지 통계표 속의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조선인의 이름이 지워진 땅의 기록이고, 억압당한 시대의 흔적이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조각이다.
1912년 그 땅을 걸었던 조선인들은 토지 소유자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그들의 집은, 그들의 삶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을까. 바로 땅속에 있다. 도자기 한 점, 기와 한 조각, 우물 하나. 그것이 그들이 남긴 목소리다.

문화재 발굴조사는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다. 문화재 지표조사는 그 목소리가 영원히 묻혀버리지 않도록 지키는 행위다. 우리가 도시를 개발할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서울은 단순히 새로운 건물이 세워지는 도시가 아니라 오래된 기억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될 수 있다.
지금도 서울 어딘가의 땅 아래에서, 아직 발굴되지 않은 이름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이름들을 불러내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다.
당신이 걷는 서울 도심 그 아래에는지워진 이름들이 숨 쉬고 있다.
우리가 그 이름들을 부르는 순간,역사는 비로소 살아난다.
그 부름의 시작이, 바로 문화재 발굴조사다.
—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 seoulheritage.org
문화재지표조사문화재발굴서울문화유산발굴조사시굴조사표본조사서울중구발굴남학동역사일제강점기서울1912년토지문화재발굴기관서울문화재연구서울도심발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