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강서구 내발산동의 놀라운 모습을 만나보시겠어요?
- 2025년 5월 25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5월 19일
문화재 지표조사문화재 발굴조사강서구 역사내발산동1912년 서울
발산역 그 땅 아래,100년 전 서울 최대 황금 들판이 잠들어 있다
1912년 강서구 내발산동 토지대장으로 읽는 잊혀진 풍경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 기초자료
발산역 스타필드, 카페, 아파트 단지.
지금 우리가 아는 내발산동의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잠깐, 그 땅 밑을 한번 봐.
1912년의 내발산동은 서울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드넓은 황금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 들판 위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 시작한다.
목차
발산역 너머, 1912년의 내발산동을 만나다
서울 서쪽의 쌀 창고 — 압도적인 논의 규모
풍요의 땅 — 184필지의 밭이 품은 생명력
마을 사람들의 집터, 그 온기를 찾아서
잠든 기억들 — 분묘지와 잡종지의 흔적
성씨로 읽는 내발산동의 사람들
국유지 36필지 — 국가가 품은 이 땅의 비밀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주목하는 이유
과거의 들판 위에서 오늘을 걷다

01 — 발산역 너머, 1912년의 내발산동을 만나다
지금의 내발산동을 생각하면 스타필드 마켓, 발산역 환승 통로, 아파트 단지가 먼저 떠오른다. 서울 서쪽 교통의 요충지이자, 직장인들이 퇴근길에 한 번쯤 들르는 번화한 동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내발산동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 익숙한 풍경 아래에, 전혀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문화유산 발굴조사 기관이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1912년의 강서구 내발산동은 총 598필지, 2,142,293㎡의 규모를 자랑하는 마을이었다. 200만 제곱미터가 넘는 이 넓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70%에 해당한다. 지금의 빌딩과 도로가 들어서기 전, 이 광활한 땅은 논과 밭, 작은 한옥 마을, 그리고 조용한 숲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12년은 일제가 조선 전역의 토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토지 기록은 오늘날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핵심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땅의 과거를 알아야 땅 아래에 무엇이 잠들어 있는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그 1912년의 내발산동을 한 장 한 장 펼쳐보자.
총 필지
598필지
1912년 기준
총 면적
2,142,293㎡
여의도의 약 70%
논(답)
361필지
1,526,737㎡
밭(전)
184필지
515,440㎡
02 — 서울 서쪽의 쌀 창고, 압도적인 논의 규모
1912년 내발산동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압도적인 논의 규모다. 전체 598필지 중 361필지, 면적으로는 1,526,737㎡가 논이었다. 전체 면적의 무려 71%가 논이었다는 뜻이다. 이 숫자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지금의 발산역 주변 전체, 아파트 단지들과 상업 지역을 전부 합쳐놓은 그 공간 대부분이 벼가 자라는 논이었다는 것이다.
내발산동이 이토록 넓은 논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지형 덕분이었다. 한강의 지류가 가까이 흘러 수리 조건이 좋았고, 주변 야산이 바람을 막아주는 지형이어서 벼농사에 최적의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봄이면 모내기 소리가 온 마을을 깨우고, 여름이면 짙은 초록의 벼가 물결처럼 출렁였으며, 가을이면 황금빛 이삭이 고개를 숙이는 장관이 펼쳐졌다. 내발산동은 그 자체로 서울 서부의 거대한 쌀 창고였던 셈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기관들이 논이었던 지대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가 있다. 논은 물이 항상 고여 있어 산소가 차단된 환경이기 때문에 유기물의 보존율이 높다. 실제로 서울 강서 일대와 한강변 발굴 현장에서는 논 지층 아래 목기, 씨앗류, 농기구 파편이 발견되는 사례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361필지에 달하는 내발산동의 논 지대는 그래서 문화재 지표조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구역으로 분류된다.
03 — 풍요의 땅, 184필지의 밭이 품은 생명력
논이 내발산동의 주인공이었다면, 밭은 그 조연이자 사람들의 밥상을 직접 책임지던 생명줄이었다. 184필지, 515,440㎡에 달하는 밭은 전체 면적의 약 24%를 차지했다. 절대적인 면적으로 따지면 서울 월드컵경기장 면적의 70배가 넘는 규모다.
봄이면 고추 모종이 심겨지고, 여름이면 호박 덩굴이 뻗어나갔다. 가을이면 고구마를 캐고 무를 뽑아 김장 준비를 시작했다. 밭 고랑 사이를 걸어 다니던 내발산동 사람들의 발자국이 켜켜이 쌓인 그 땅은, 지금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땅은 기억한다.
밭은 논과 달리 배수가 잘 되는 완만한 경사지나 야산 자락에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당시 내발산동의 지형 구조를 역추적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밭 지대는 다양한 생활 유물, 특히 토기나 도자기 파편, 철제 농기구 등이 출토되는 구역으로 분류된다. 사람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았던 땅인 만큼, 그 아래에 남겨진 기억도 가장 다채롭다.
04 — 마을 사람들의 집터, 그 온기를 찾아서
드넓은 논밭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터가 있었다. 1912년 내발산동의 대지 기록을 보면, 마을 곳곳에 한옥들이 점점이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수십 층짜리 아파트가 아닌, 마당이 있고 텃밭이 딸린 아담한 집들이 들판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이른 아침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 짓는 연기가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풍경. 사립문을 나선 아버지가 논으로 향하고, 어머니는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팽이를 돌리던 그 일상. 그 온기가 지금도 이 땅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다. 집터는 문화재 발굴 현장에서 가장 풍부한 유물을 품고 있는 지점이다. 온돌 흔적, 기와 조각, 생활 도구들이 그 집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대신해 남아 있다.

05 — 잠든 기억들, 분묘지와 잡종지의 흔적
마을 어딘가에는 사람들이 떠난 자리가 있었다. 1912년 내발산동의 분묘지는 2필지, 3,074㎡였다. 논과 밭 사이, 조용한 야산 자락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을 이 무덤들은 당시 내발산동 사람들이 조상과 이어지는 공간이었다. 봄가을로 성묘를 오고, 제삿날이면 온 가족이 모여 절을 올리던 그 자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또 하나 흥미로운 땅이 있다. 잡종지 11필지, 38,899㎡다. 잡종지란 농경지나 주거지처럼 특정 용도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땅을 의미한다. 대장간이나 옹기 가마터, 장터, 혹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어떤 삶이 펼쳐졌는지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 땅은 분명히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었다.
분묘지
2필지
3,074㎡
잡종지
11필지
38,899㎡
국유지
36필지
별도 관리
전체 필지
598필지
총 2,142,293㎡
분묘지는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구역 중 하나다. 분묘 주변에는 묘비 파편, 청동 제기, 도자기 제사 용기 등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고, 드물게는 그 아래에서 더 오래된 유물층이 확인되기도 한다. 잡종지 역시 다양한 생활 유물이 혼재할 수 있는 구역으로, 발굴조사 기관들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06 — 성씨로 읽는 내발산동의 사람들
1912년의 토지대장에는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다. 성씨라는 형태로. 내발산동 토지 소유 현황을 보면 이 마을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난다. 김씨가 198필지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이씨가 137필지, 유씨가 92필지, 박씨가 34필지, 장씨가 21필지, 송씨와 최씨가 각각 19필지, 황씨가 16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8필지의 김씨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김씨 집안 사람들이 대를 이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는 증거다. 유씨가 92필지라는 것도 흥미롭다. 유씨는 서울에서 그리 흔한 성씨가 아닌데, 내발산동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이씨, 박씨, 장씨, 송씨, 최씨, 황씨까지. 다양한 성씨들이 같은 들판을 일구고, 같은 우물을 나누며 살아갔다.

성씨별 토지 분포는 문화재 조사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특정 씨족이 집중적으로 소유한 구역에는 그 문중의 제사 공간, 사랑채, 집단 주거지가 밀집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 지표조사 기관들은 이런 씨족 분포 자료와 고문서, 족보를 함께 분석해 발굴 구역의 역사적 성격을 사전에 파악한다.
198필지의 김씨, 137필지의 이씨, 92필지의 유씨. 이 숫자들 뒤에는 각자의 삶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일구었던 내발산동의 들판이, 지금 우리 발아래에 잠들어 있다.
07 — 국유지 36필지, 국가가 품은 이 땅의 비밀
1912년 내발산동에는 36필지의 국유지가 있었다. 전체 598필지 중 36필지, 비율로 보면 약 6%다. 다른 동네와 비교했을 때 특별히 높은 비율은 아니지만, 그 위치와 용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매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국유지는 조선 왕조 말기부터 국가가 직접 관리하던 토지들이었다. 역참(驛站), 군사 훈련장, 국가 창고, 관리들의 공무 관련 시설 등이 국유지 위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내발산동의 36필지 역시 그런 공공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이 국유지들은 상당 부분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넘어갔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대한민국 정부의 소유가 되었다가 점차 민간에 불하되거나 공공시설 부지로 전환되는 과정을 밟았다.
지금의 내발산동에서 공원이나 도로, 공공 건물이 들어선 자리 중 일부는 그 36필지의 국유지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100년 전의 국유지 기록이 오늘의 도시 구조에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08 — 문화재 지표조사·발굴조사가 주목하는 이유
내발산동처럼 논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다양한 성씨 집단이 공존하며, 분묘지와 잡종지까지 고루 분포된 지역은 문화재 지표조사에서 유존 가능성이 높은 구역으로 분류된다. 특히 면적 2,142,293㎡에 달하는 광활한 농경지는 개발이 진행될수록 그 아래의 문화층을 위협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가유산청 규정에 따라, 이런 지역에서 건축이나 토지 형질 변경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문화재 지표조사를 거쳐야 한다. 지표조사에서 유존 가능성이 확인되면 표본조사(2% 이내) → 시굴조사(10% 이내) → 정밀발굴조사 순으로 단계가 진행된다. 소규모 발굴조사의 경우 2023년부터 국비 지원이 가능해졌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내발산동 1912년 토지 통계 요약
논361필지 / 1,526,737㎡ (전체의 71%)
밭184필지 / 515,440㎡ (전체의 24%)
분묘지2필지 / 3,074㎡
잡종지11필지 / 38,899㎡
국유지36필지
최다 성씨김씨 198필지, 이씨 137필지, 유씨 92필지

성공적인 발굴 사례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2021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발굴 현장에서는 지표조사와 시굴조사를 거쳐 진행된 정밀발굴조사를 통해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천문시계 일성정시의가 항아리에 담긴 채 발견되었다. 이 발굴이 가능했던 것은 1910년대 지적 기록에서 해당 구역이 집터와 관청 부지였음을 사전에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발산동의 1912년 기록 역시 그런 미래의 발굴 성과를 위한 씨앗이 될 수 있다.
09 — 과거의 들판 위에서 오늘을 걷다
이렇게 1912년의 내발산동을 한 바퀴 돌아왔다. 598필지 2,142,293㎡의 땅 위에서 우리는 황금빛 벼를 수확하던 농부들을 만났고, 밭 고랑 사이를 걷던 사람들을 만났다. 집터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들을, 분묘 앞에서 절을 올리던 후손들을, 그리고 각각의 필지 위에서 삶을 일구던 김씨, 이씨, 유씨, 박씨, 장씨의 이름들을.
그들이 떠난 자리에 지금 우리가 서 있다. 발산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그 자리, 스타필드 카트를 밀며 걷는 그 자리, 퇴근길에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그 자리. 그 모든 자리가 100년 전에는 벼가 익어가던 들판이었고, 사람들이 땀 흘리며 살아가던 생의 현장이었다.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조사는 그 기억을 지우지 않기 위한 노력이다. 개발이 땅을 바꾸기 전에, 먼저 그 땅이 품고 있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땅 아래에 잠든 유물을 통해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 그것이 발굴조사 기관들이 하는 일이고,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
다음에 발산역에 내릴 때, 혹은 내발산동 어딘가를 걸을 때 잠깐 발걸음을 멈춰보자. 그리고 물어보자. 이 땅은 어떤 사람들이 살았던 곳일까. 그 질문 하나가, 우리를 역사 속으로 이어주는 가장 짧은 다리가 된다.
361필지의 논이 황금빛으로 물들던 그 가을,
이름 없는 농부들이 벼 이삭을 껴안고 웃었다.
그 웃음이 땅 아래에 아직 남아 있다.
발산역을 지나는 오늘의 당신에게,
그 100년 전의 온기가 닿기를 바란다.
과거를 기억하는 발걸음이
이 도시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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